황지우(1952~ ),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
나, 이번 생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 손만 댔다 하면 중고품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괘종시계가 오후 2시를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 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괘종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 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막(?)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 밸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도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괘종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 평의 삶: 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 "그래 내 삶이 내 맘대로 안돼!"
서가엔 마르크시즘과 관련된 책들이 절반도 넘게
아직도 그대로 있다
석유 스토브 위 주전자는 김을 푹푹 내쉬고
흔적을 지워야 한다 도둑은.
기억조차 지워야 하지만 지울 수 없는 것이 도둑의 운명.
중고품이 되는 것도 숙명. 내 맘대로 안되니 나는 나의 도둑일까.
아니면 거울아, 거울아! 누구냐. 매일 밤 내 운명에 손을 대는 그 자가.
박상순<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