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1954~ ), '세든 봄' 전문
세들어 사는 집에 배꽃이 핀다
빈 손으로 이사와 걸식으로 사는 몸이
꽃만도 눈이 부신데 열매 더욱 무거워라
차오르는 단맛을 누구와 나눠볼까
주인은 어디에서 소식이 끊긴 채
해마다 꽃무더기만 실어보내 오는가
눈 내리고 바람은 찬데, 벌써 입춘 지나 우수다.
나뭇가지마다 꽃들은 눈부시게 터질 날을 기다리며
열심히 꿈틀거리고 있으리라.
세든 집에는 '세든 봄'이 온다.
집세만 냈는데 꽃과 열매는 세든 집인지도 모르고 들어온다.
시인은 세도 안 내고 거저 받는 봄이 황송하기만 하다.
집주인은 봄을 보내지 않았지만,
마음이 가난한 자는 그 무진장한 봄을 스스로 받는다.
김기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