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림(1939~ ), '손' 전문
유리창으로 넘어온 햇살이 사기그릇에 찰랑찰랑 넘칩니다.
한 손이 조심스레 사기그릇을 들고 방 가운데 섭니다
사기그릇 속의 햇살은 사기그릇과
햇살 사이 방과 유리창 사이
무명으로 파동합니다
한 손이 고요로히 햇살을 적습니다
한 손이 떨립니다 한 손이 멈춥니다
떨림과 멈춤이 거의 동시적으로 되풀이되면서
속이 들여다보이는 시간들을 빨랫줄에 넙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 이상 방 안에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사기그릇 속의 햇살은 넘치면서 적멸의 소리로 울리지만
소리들은 영토를 넓히지 못하고 울타리 안에서 사라져갑니다
사기그릇에 넘치는 한 그릇 햇살. 시인이 방 한가운데로 가져가자 그것은 방안 가득 파동 친다.
손이 얼른 시에 잡아두려 하지만 햇살은 잡히지 않고 손은 떨림과 멈춤만 되풀이한다. 햇살이
사라지기 전에 손이 한 일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시간들'을 빨랫줄에 넌 것. 시를 쓴다는 것은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손으로 영원히 햇살을 잡아두려는 일이 아닐까?
김기택<시인>
김기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