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명(1965~ ), 「면도」 전문
벽 속에 그의 수염이 있다.
벽 속에 그의 얼굴이 있다.
벽 속에 끝나지 않는 하루가 있다.
깎아내야 할 순간들이 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벽 속에 모든 것을 밀어넣는다.
밀어넣는 자신의 동작까지
남김없이 넣어버린다.
그리고 한밤중에 몰래 일어나
벽 속에 들어가서
그는 자신의 수염을 깎는다.
수염에 덮여 있는 얼굴을 깎는다.
얼굴에 섞여 있는
얼굴이 되지 못하는
얼굴
그 낯선 것은 얼마나 뒤늦게 떠오르는 것일까.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 것일까.
깎인 얼굴들이 세면대로 떨어진다.
뾰족한 얼굴들
새파란 얼굴들
어제보다 긴 얼굴을 달고
그는 생각한다.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는 것은 얼마나 신기한 일일까.
면도한 얼굴은 수직의 벽처럼 깨끗하고 매끈하다. 수염은 그 매끈한 직선에 저항하면서 자꾸 귀찮게 돋아난다.
벽을 더럽고 낯설게 만든다. 면도는 그런 일상의 수많은 일탈을 제거하거나 벽 속에 넣어 벽을 깨끗하고 매끈
하게 유지하는 행위다. 수염처럼 일상에 저항하는 ‘낯선 것’은 아주 천천히 자라지만, 깎으면 너무나도 빨리
사라진다.
김기택<시인>
김기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