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미정(1967~ ) '사랑은 야채 같은 것' 부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씨앗을 품고 공들여 보살피면
언젠가 싹이 돋는 사랑은 야채 같은 것
그래서 그녀는 그도 야채를 먹길 원했다
식탁 가득 야채를 차렸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오이만 먹었다
그래 사랑은 야채 중에서도 오이 같은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야채뿐인 식탁에 불만을 가졌다
그녀는 할 수 없이 고기를 올렸다
그래 사랑은 오이 같기도 고기 같기도 한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중략)
결국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사랑은 그가 먹는 모든 것
모든 정의(定義)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이게 마련이다. 사랑에 대한 정의도 마찬가지다. 이 시에서처럼 사랑의 정의를 끝없이 바꾸어가는 과정 자체가 사랑인지도 모른다. '나'의 정의가 마침내 '너'의 현실에 닿을 때까지 사랑은 나와 너를 바꾸어간다. 사랑은 고귀한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잡식성의 식욕으로 우리를 삼킨다.
나희덕<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