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래기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 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 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 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 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가장 오래 세찬 바람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 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 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 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저들을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 사람들의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 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꾸기 위해 서리에 맞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우리 주위에 시래기가 되어 생의 겨울을 나고 있는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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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1954년 충북 청주 출생.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로 등단. 주요 시집으로 『접시꽃당신』,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외. <민족예술상>, <신동엽 창작기금>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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