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성이 농후한 시편이다. 은하계에는 대략 500억 개의 별이 항성의 궤도를 따라 운행 중이라 한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과학자이나 종교인, 그리고 여타의 사람들과 달리 시인들은 지구인 모두가 우주 안에 미만해 있는 수많은 별에서 와서 별로 돌아갈 존재라고 믿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시인들이란 여전히 근대 이전의 신화를 사는, 덜 떨어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숨막히는 이 광포한 기술과 자본의 시대에 그런 어리석고 덜 떨어진 사람들이 있어 우리는 그나마 숨통을 열어 놓고, 군불 많이 땐 아랫목과도 같이 따뜻한 온정을 나눌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늘에 활짝 핀 꽃으로 피워있는 별을 보며 꿈을 꾸던 시대는 충분히 아름다운 낙원의 시절이었다. 별은 천체 우주를 이루는 단순한 물질적 존재의 의미를 뛰어넘어 개인과 민족의 운명을 예고해주는 지표가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저 엄혹했던 일제 시대 윤동주가 그러하였고, 광기의 연대였던 80년대를 온몸으로 통과했던 김남주가 그러하였다.
하지만 이제 예외적 소수를 제하고는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에게 자신과 민족의 운명을 거는 이들이 드물어 진 게 사실이다. 우리는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늘의 별들이 녹슨 물을 흘리고 있다. 고름 덩어리를 뚝뚝 흘리고 있다. 병색이 완연한 저 늙은 별들은 인간의 탐욕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시 <별>은 다르다. 여전히 꿈과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별이 아름다운 것은/ 서로가 서로의 거리를/ 빛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안도현 시인의 말처럼 숲이 아름다운 것은 나무들 사이의 간격 때문이다.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간격이 무화되면 관계가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리란 소원(疎遠)이 아니라 아름다운 관계인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 아름다운 거리에 서로를 빛으로 이끌어 주는 관계를 노래했다. 이것은 서로의 서로에 대한 애정 투사를 말한다. 요컨대 상생의 삶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별들이 “서로의 빛 속으로/스스로를 파묻”듯이 사람들도 서로의 사랑 속으로 스스로를 파묻어야 하리. 또 “ 새벽이면 모두 제 빛을 거두어/ 지상의 가장 낮은 골목으로” 누워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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