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메마른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눈물샘은 여전히 자극 받지만 감동의 순도가 높지 않습니다. 가공의 눈물입니다. 드라마나 영화, 혹은 독서를 통하지 않으면 쉽게 흘러내리지 않습니다.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인 순수한 생명으로서의 눈물은 사실 말라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돌아보면 곡절 많은 시간들을 적잖이 보냈으나 눈물로 맞고 보낸 시간이 너무 적습니다. 눈물의 정화 없이 보낸 기억들은 그리하여 나에게 삭막함으로 남아 있습니다. 눈물을 좀 흘려야겠습니다.
이 시의 배경에는 어린 아들의 죽음이 놓여 있습니다.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나는 내 가슴의 상처를 믿음으로 달래려고 그러한 심정으로 썼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과 고통을 눈물로 정화시키고자 하는 바람이 이 시를 낳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슬픔과 고통의 정화 차원에 머물러 있기를 스스로 거부합니다. “나의 전체”이며 “나의 가장 나중 지니인 것”인 눈물이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 되는 까닭입니다. 꽃이 시들어 새로운 생명의 씨인 열매를 맺듯 순수한 눈물 역시 옥토에 떨어져 생명의 씨가 됩니다. 순정함의 순환이자, 생명의 순환입니다. 슬픔이 슬픔을 넘어 새로운 생명 탄생의 경이로 바뀝니다.
한 스무 해 전, 나는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눈물'이 새겨진 무등산 자락의 다형 시비를 찾았을 때입니다. 마른 날이었는데도 시비는 눈물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 무렵은 온 세상이 분노로 치떨고 있을 때였습니다. 무등산 자락에서 다형시비도 그 무참한 살육을 슬프게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비에 흐르는 눈물을 여러 차례 마음으로 닦았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새로이 지어 주신” 「눈물」에서 갑자기 생명력을 느꼈습니다. 광주의 눈물은 민주라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임을 문득 깨달은 것입니다.
이 봄에는 생명의 눈물, 깨달음의 눈물을 좀 흘려야겠습니다.
<시인 정우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