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의 명작으로 손꼽힙니다. 하지만 백무산 시인이 보기에 그 명작은 ‘욕망 표출’에 다름아닌 모양입니다. 욕망이 앞선 나머지 현실에서 보면 얼토당토하지 않은 집을 그려 넣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림에서 그린이의 욕망을 읽어내는 시인의 눈이 매섭습니다.
그러나 더 매서운 것은 그의 눈이 아니라, 그가 펼쳐내는 사유의 힘입니다. 추사의 ?세한도?에서 “이상하게 크고 긴 건물과 낯선 문”에 드리워진 추사의 지향을 읽어낸 이를 나는 본 적이 없습니다. 깊은 사유와 통찰 아니고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세한도>에 그려진 추사의 지향은 시인이 볼 때 ‘한심한 꿈’입니다. 하지만 추사의 마음으로 보면 이는 ‘당연한 꿈’일 겝니다. 추사는 결코 신분에서 자유로운 ‘자유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사대부 집안 양반 관료의 꿈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살림집도 아닌 이상한 집을, 땅이 아닌 공간, 이를테면 사념의 공간인 소나무 뿌리 위에 버젓이 얹혀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백무산 시인의 ?세한도?에는 ‘전복의 아름다움’도 담겨 있습니다. 삶을 소외시킨 관념과 현실의 현격한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우리의 통념을 여지없이 깨버립니다. 통렬한 발상의 자각이 일어납니다. 과연 시의 이와 같은 힘은 다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나는 ‘진정성’이라고 믿습니다. 내가 사는 집의 눈, 사람이 살도록 집을 짓는 목수의 눈, 세상만물과 조화를 꿈꾸는 자연의 눈이라는 진정성. 거기에 사유의 힘이 보태진 것이라고 봅니다.
자, 이 같은 생각으로 <세한도> 속 집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누가 보이십니까. 무엇이 보이십니까. 당신이 심연 속에 가라앉혀 둔 어설픈 욕망의 찌꺼기는 혹 안 보이십니까.
<시인 정우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