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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아침이 밝았습니다. 모두들 설빔을 준비하고 성묘를 하며 신년구상을 다지겠지요. 후회막급한 날들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지난 길들을 남몰래 토해놓고 이리저리 살펴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붉은 신호등을 어긴 날들도 있고, 가서는 안될 길을 간 적도 있지요. ‘내가 가고 싶은 땅에 가서’ 살고 싶지만 우리가 찍은 발자국은 언제나 가고 싶은 땅이 아니라 ‘떠나고 싶은 땅’에 찍혀 있습니다. 길 위에서 길을 잃어 안절부절못할 때, 눈이 밝은 노시인의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는 선언은 얼마나 큰 위안이며 뒤통수를 후려치는 한 소식인지요. 나의 신년구상도 이처럼 길을 잃는 것입니다. 구걸을 하며, 탁발을 하며 먼 길을 떠나는 것이지요. 3월1일 지리산 노고단에서 도법 스님과 수경 스님과 더불어 묵언의 기도를 한 뒤에 삼인행의 길을 떠납니다. 말이야 거창하게 ‘생명평화의 탁발순례’이지만 사실은 그저 유랑 걸승으로 운수납자의 길없는 길을 한번 가보려는 것뿐이지요. 세상도처를 떠돌며, 한반도의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며 탁발을 합니다. 3년이 걸릴지 5년이 걸릴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북한까지 가게 된다면 더더욱 좋겠지요. 밥을 주면 밥을 먹고, 고기를 주면 고기를 먹고, 술을 주면 술을 마실 것입니다. 재워주면 자고, 안재워주면 노숙을 하겠지요. 가다가 초상집을 만나면 염불을 하고, 자식을 먼저 보낸 농촌의 노인들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천도재를 올릴 생각입니다. 다만 초심으로 돌아가 ‘들리는 말 뜻 몰라’도 그저 만나는 모든 사물과 사람들을 스승으로 삼으며 경청의 자세만은 잃지 않아야겠지요. 바쁠 것도 없고, 조바심을 낼 것도 없습니다. 가다가 왜 가는지 그 뜻을 잊어도 좋습니다. ‘내가 살고 싶은 땅'에 가려면 ‘내가 살고 싶지 않은 땅’에서 먼저 헤매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지요. ‘그 손바닥에 그어진 굵은 손금’이 생명평화의 길이기도 하겠지만, ‘그 뜻을 모른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가다보면 곳곳에서 신경림 시인을 만나겠지요. 이미 오래 전에 선생께서 ‘민요기행’을 다니시던 곳, 바로 그곳에 아직 젊은 신경림 선생이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겠지요. 그저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시인 이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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