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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 눈이 오십니다. 북풍을 타고 내려온 이 눈보라는 시베리아에서 길을 나서 삼팔선을 넘어 안동을 지나 지리산까지 숨가쁘게 달려왔겠지요. 세상의 모든 길을 지우고 또 지우며 인간의 길에 대한 재해석의 화두를 던집니다. 순식간에 고립된 산중의 외딴 집, 읍으로 가는 길이 사라지고 산 아랫마을이 자꾸 멀어집니다. 고립은 홀로 격리되는 게 아니라 홀로 높게 서는 것. 안상학 시인의 시집 『오래된 엽서』의 「맹인부부」를 읽다가 ‘햇살이 더 어둡다’는 이 한 구절에 무릎을 칩니다. 반달곰처럼 겨울잠이나 푹 자려다 벌떡 일어나 창 밖을 내다봅니다. 세상의 온갖 풍문과 낙서들이 흰 눈의 수많은 지우개로 지워져 한 장의 거대한 백지가 되었습니다. 저 거대한 백지의 세상은 아무래도 구름의 흰 발자국이 아니겠는지요. 잡다한 길들이 사라지고 흘러가는 저 구름의 환한 길이 이 땅에 뚜렷이 새겨진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눈 속에 덮인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길에만 마음을 주다보니 크고 환한 길을 잃어버린 맹인들이었습니다. 그러니 햇살이 더 어두울 수밖에요. 당대의 시인들이 부쩍 ‘길’에 대해 수많은 시들을 써왔지만 대개는 오히려 길이 길에 막혀 혼돈의 길로 빠지는 형국이 많았습니다. 이는 길의 재해석이나 반성도 없이 옛길을 탐하거나 무작정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섣부른 욕망 때문이겠지요. 저 눈밭에 덮인 옛길을 찾으려하거나 새로운 길을 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뛸 것이 아니라 한 발 물러서서 저 눈밭의 세상이 그대로 길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겠지요. 잠시 가던 길을 잃었다고 조급할 게 무어 있겠습니까. 잃은 길도 길입니다. 살다보면 눈앞이 캄캄할 때가 있겠지요. 그럴 때는 그저 눈앞이 캄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바로 그것이 길이 아니겠는지요. 혼돈의 시대, 욕망 과잉의 시대, 폭력의 시대에 안상학 시인의 ‘햇살이 더 어둡다’는 선언은 새로운 반성과 뼈아픈 참회를 요구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합리주의적이고 이성적인 ‘햇살’은 정작 혼돈 그 자체이자 욕망이었고, 남성우월주의의 폭력이었습니다. 이 짧은 문장 하나가 문명적인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눈이 그쳤습니다.
<시인 이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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