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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중화(九羅重花) - 김수영
― 어느 소녀에게 물어보니
너의 이름은 글라지오라스라고
저것이야말로 꽃이 아닐 것이다
저것이야말로 물도 아닐 것이다
눈에 걸리는 마지막 물건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듯
영롱한 꽃송이는 나의 마지막 인내를 부숴버리려고 한다
나의 마음을 딛고 가는 거룩한 발자국소리를 들으면서
지금 나는 마지막 붓을 든다
누가 무엇이라 하든 나의 붓은 이 시대를 진솔하게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치욕
물소리 빗소리 바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곳에
나란히 옆으로 가로 세로 위로 아래로 놓여있는 무수한 꽃송이와 그 그림자 그것을 그리려고
나의 붓은 말할수없이 깊은 치욕
이것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글이기에
(아아 그러한 시대가 온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냐)
나의 동요없는 마음으로
너를 다시한번 치어다보고 혹은 내려다보면서 무량의 환희에 젖는다
꽃 꽃 꽃
부끄러움을 모르는 꽃들
누구의것도 아닌 꽃들
너는 늬가 먹고 사는 물의것도 아니며
나의것도 아니고 누구의것도 아니기에
지금 마음놓고 고즈너기 날개를 펴라
마음대로 뛰놀 수 있는 마당은 아닐지나
(그것은 골고다의 언덕은 아닌
현대의 가시철망 옆에 피어있는 꽃이기에)
물도 아니며 꽃도 아닌 꽃일지나
너의 숨어있는 인내와 용기를 다하여 날개를 펴라
물이 아닌 꽃
물같이 엷은 날개를 펴며
너의 무게를 안고 날아가려는 듯
늬가 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생사의 선조뿐
그러나 그 비애에 찬 선조도 하나가 아니기에
너는 다시 부끄러움과 주저를 품고 숨가뻐하는가
결합된 색깔은 모두가 엷은 것이지만
설움과 힘찬 미소와 더불어 관용과 자비로 통하는 곳에서
네가 사는 엷은 세계는 자유로운 것이기에
생기와 신중을 한몸에 지니고
사실은 벌써 멸하여있을 너의 꽃잎 우에
이중의 봉오리를 맺고 날개를 펴고
죽음 우에 죽음 우에 죽음을 거듭하리
구라중화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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