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 기형도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반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인사(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宿醉)는 몇 장 지전(紙錢)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