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 묘지 1 - 기형도
주인은 떠나 없고 여름이 가기도 전에 황폐해버린 그 해 가을,
포도밭 등성이로 저녁마다 한 사내의 그림자가 거대한 조명속에서
잠깐씩 떠오르다 사라지는 풍경속에서 내 약시(弱視)의 산책은
비롯되었네. 친구여, 그해 가을 내내 나는 적막과 함께 살았다.
그때 내가 데리고 있던 헛된 믿음들과 그 뒤에서 부르던 작은
충격들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네.
나는 그때 왜 그것을 몰랐을까. 희망도 아니었고 죽음도 아니였어야
할 그 어둡고 가벼웠던 종교들을 나는 왜 그토록 무서워했을까.
목마른 내 발자국마다 검은 포도알들은 목적도 없이 떨어지고
그때마다 고개를 들면 어느 틈엔가 낯선 풀잎의 자손들이 날아와
벌판 가득 흰 연기를 피워올리는 것을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네.
어둠은 언제든지 살아 있는 것들의 그림자만 골라 디디며 포도밭
목책으로 걸어왔고 나는 내 정신의 모두를 폐허로 만들면서 주인을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림이란 마치 용서와도 같아 언제나 육체를
지치게 하는 법.
하는 수 없이 내 지친 밭을 타일러 몇 개의 움직임을 만들다보면
버릇처럼 이상한 무질서도 만나곤 했지만 친구여, 그때 이미
나에게는 흘릴 눈물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 정든 포도밭에서 어느 하루 한 알 새파란 소스라침으로
떨어져 촛농처럼 누운 밤이면 어둠도, 숨죽인 희망도 내게는 너무나
거추장스러웠네.
기억한다. 그해 가을 주인은 떠나 없고 그리움이 몇 개 그릇처럼
아무렇게나 사용될 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짧은 촛불들을 태우곤
했다. 그렇게 가을도 가고 몇 잎 남은 추억들마저 천천히 힘을
잃어갈 때 친구여, 나는 그때 수천의 마른 포도 이파리가 떠내려가는
놀라운 공중(空中)을 만났다. 때가 되면 태양도 스스로의 빛을
아껴두듯이 나또한 내 지친 정신을 가을 속에서 동그랗게 보호하기
시작했으니 나와 죽음은 서로를 지배하는 각자의 꿈이 되었네.
그러나 나는 끝끝내 포도밭을 떠나지 못했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는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기척없이 새끼줄을 들치고 들어선 한 사내의
두려운 눈빛을 바라보면서 그가 나를 주인이라 부를 때마다 아,
나는 황망히 고개돌려 캄캄한 눈을 감았네.
여름이 가기도 전에 모든 이파리 땅으로 돌아간 포도밭,
참담했던 그 해 가을, 그 빈 기쁨들을 지금 쓴다 친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