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읽어보세요 - 하여진
손을 대지 않아도 바람이 넘겨주는 책장
시속 60에서 머들령 터널 지나고 나면 시속 80으로 넘겨주는데요
덜커덩 넘어가는 깊은 하늘 속으로 기러기 한 마리 날아가는
삽화 한 장 펄럭이네요
가로, 세로, 글자들, 무덤 같은 괄호는 빨간 밑줄 그으며
산을 읽을 때는 세로로 읽어야 해요
돌로 눌러두지 못한 산의 기억들이 골짜기를 열고
눈포단 밑으로 흐르는 도정搗精의 물소리
투명한 맨발로 온산을 졸졸졸졸 날아다녀요
태양이 산 그림자 지우고 내려오는 아침
청국장 냄새 굴뚝마다 진동하는 산내마을 이야기 속에
‘끼니는 잘 챙겨뭉냐’ 어머님 음성에 울컥 빠지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닿습니다
노면 고르지 못함 고인물 튐 과속방지턱
읽어가다 다시 떠오르는 문장,
우좌로 이중 굽은 도로표지는 굽은 길 오를 때
급하게 먹은 마음일랑 한번쯤 쉬었다 가는 바람의 길
가끔 반사경에서 튀어나온 트럭이 책장을 휙 넘길 때
눈으로 꼭 밟고 있어야 해요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계절을 꿀꺽 삼켜버리거든요
걱정하지 마세요. 인생은 짜여진 목차처럼
안개가 가라앉으면 길섶으로 봄은 되돌아와요
지금 읽고 있는 농공단지에 눈이 내리네요
숫눈 쌓인 캄캄한 이면을 침 발라 얼른 넘기면
까만 유리창에 비친 남자와 여자가 주고받은 대화 속에
나도 하마터면 길을 잃을 뻔했거든요
산다는 게 좀 슬프지도 않으면 재미있겠어요?
그만 졸다, 잘못 내려온 길을 되짚어 갑니다
헤드라이트에 살아나는 17번국도,
먼 우주에서 내려온
황금오리알, 별자리가 뜨는 밤
책갈피로 그믐달 끼워놓고
읽다 만 책을 덮습니다, 밤새도록
달이 책 속에서 자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