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지 - 전대호
‘대공원’이라 불리는 역에서 내린 우린
투명하고 둥근 지붕 아래의 계단을 올라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지
사람들은 밀물처럼 쓸려 나오고 있었네
지하철 안에서 보았던 그 젊은 가족도
싸늘한 봄바람 속을 걸어가고 있었네
먼지바람이 불자 아이는 눈을 감았어
이젠 정말 다 컸나 봐, 답답한데도 잘 참던 걸요
경마장이 근처에 있어서 그래
하지만,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라니
정말 산이라도 옮기겠어요
입구를 안내하는 방송이
여러 개의 입구를 안내하는 방송이
끊이지 않고 나오고 있었네
지팡이 끝에 매달려 바퀴를 달고 구르는 나비가
딱딱딱 날개를 부딪치고, 머리를 둘로 묶은 계집애가
나비를 내려다보며 뛰어갔다가 저만치서 다시 달려오고
엄마인 듯한 젊은 여자는 아이에게 이름표를 달아 주
었네
은희, 오늘 어디 왔지? 여기가 대공원이야 대공원
한번 해봐, 대 공 원
‘대공원’이라 불리는 역에서 내린 우리는
느리게 행진하는 군대처럼 광장을 뒤덮고 나아갔지
가슴이나 등에 아이를 데리고, 또는
들춰 올리고 싶은 짧은 치마를 입은 애인의 손을 잡고
만국기가 펄럭이는 곳을 지나 나아갔지
그 젊은 부부도 우리 중대에 소속되어 있었네
그래 나도 오랫동안
희망을 얘기하는 게 출발점이어야 한다고 믿었어
단 한 걸음을 위해서도
땅끝에서 목소리가 들려와야 한다고,
오랫동안 나는 도면을 완성하는 데 매달렸어
한 번도 내 창고를 들여다보지 않았어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내게 무엇이 남겨져 있는지,
내 갈 길은 따로 정해질 거였으니까.
내가 가진 것을 차근차근 들여다보다가 알았어
그들 모두의 빛나는 노력을 말야
이미지에 날을 세우는 장사꾼들과
성(性) 문화에 기생하려는 상품들의
눈물겨운 분투를 더 이상 비웃을 수 없더군
가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이들,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세계를 이끌어 온 진짜 힘에 대한
너 자신의 생각을 회의한다고?
네 세계가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겠구나
곧 네가 혼돈 속에 있다고 결론짓겠구나
그래, 아파라 넌 많이 아파야겠다
많이 아프고 나서도
살아 있는 죄 때문에
돌처럼 만족스럽게 풍화할 순 없겠지
없다면, 감상의 태도를 배우는 건 어떻겠니?
넌 배울 수 있을 거다
뭘 할 수 있다거나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넌 못하니까.
유원지에 가 보렴
눈을 부릅뜨고 보고 오렴
눈물이 날 때까지
왜 젊은 처녀 총각들은 안 보이지 아까 입구에는 꽤 많
던데
전부 다 놀이 기구 앞에 줄 서 있잖아요 애들 있는 사
람이나 이렇게 할 일 없이 걷고 있는 거죠 우리도 하나
타요 아까 본 사슴 썰매 어때요 왜 작은 열차 말예요 앞
에는 뿔 달린 사슴 머리가 붙어 있고 맨 뒤에는 선물 꾸
러미가 달려 있었잖아요
우리 셋이서 앉을 수 있을까?
우린 말랐으니까 충분할 거예요
그녀와 나는
x축을 축으로 하는 크고 느린 타원운동에다
y축을 축으로 하는 작고 빠른 원운동을 합성한
즉, 럭비공의 표면을 나선형으로 움직이는 형식의
놀이 기구를 탔다 소리를 질렀다
앞에 앉아 있던 사내는 기구가 멈추자
여자의 어깨를 감싸면서 뭔가 위로의 말을 했다
우리는 킥킥 웃었다
줄곧 눈을 감고 이를 악물고 있던 건 그였기 때문이다
여자는 웃고 소리 지르고 우리와 눈이 마주치기도 했
었는데
어지러운 듯 손을 이마에 짚으며 비틀거렸다
우리는 더욱 킥킥 웃었다
세상은 안간힘을 써서 나를 놀래려 하지만
지겨운 공중 열차 같애, 난 한 가지만 타 보면
다른 것들은 타고 싶지 않아져
아주 요란하겠지,
평형을 찾느라 세반고리관이 긴장하겠지,
그걸로 그만이야. 전부 다.
난 신비롭거나 반가운 것들로 가득 찬 세상을 꿈꿔 왔어
언제부턴가 열심히 동전을 던져, 내가 원하는 세상이
낯설거나 지루한 것뿐인 이 세상의 뒷면처럼
그래 한 번만 더 던져 보자,
공중 열차를 생각하면 늘 저 요란한 소음이 떠오를거야
이백 년 전 사람들처럼 나도 역사에 관심이 있다
그렇지만, 거대한 수레바퀴?
오래전에 굴렀는지 몰라도 우리가 발견했을 땐
이미 멈춘 수레바퀴였다. 멈췄으니까 발견된거야
그거 말구 그냥 잡다한 표정들, 화장실 벽에 낙서 같은
거 말이다
거창해지지 않으면서도 역사라는 말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
난 그렇게 생각한다, 이백 년 전 사람들은 웃겠지
역사는 공석인 신의 자리를 위해 고안된 단어야
하지만 나는 보았네 강한 빛이 비치고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네
신의 자리는 늘 공석이었고
공석이었어도 산은 움직여 왔음을
찬양받기에 합당한 이는 저 잡다한 표정뿐
사람들이 숨죽이고 바라볼 만큼 짧은 치마를 하나 사
줄래?
난 그것만 입고 다니겠어
정말 지겹도록 시끄러워
그대의 직업이 무엇이든 어디에 살든
어릴 때 처음 유원지에 가 보던 날 그대는 물었다
왜 세상 전체는 유원지가 될 수 없나요?
그대의 직업이 무엇이든 어디에 살든
그때 그대는 아버지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대는 이를 악물며 다짐했지
세상을 위해 유원지가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유원지를 위해 세상이 봉사하도록 만들겠어
그리고 그대는 그렇게 만들어 놓았네
그대의 직업이 무엇이든 어디에 살든
그대는 이달이나 다음 달 달력에, 아니면 최소한
마음속에만 있는 먼 훗날의 달력에 동그라미를 친다
시인들이 만들어 놓은 미끄럼틀을 타고
시인들이 흔들어 주는 요람에 누워 오후의 햇살을 즐
기고
시인들이 거대한 포도송이처럼 들고 다니는 풍선 하나
를 사고
시인들이 호수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어 놓은 외줄을
타야지
시인들이 백조처럼 모여 있는 갈대숲에 가야지
나도 그들처럼 모자를 써야지
조화를 가장 닮은 꽃, 튤립 꽃밭에서
나는 적어 온 시를 부스럭거리며 꺼냈네
제목은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연가(戀歌)’라고 붙일까 한다
저녁 무렵이라면
어떤 풍경이어도 좋겠네
피곤이 약물처럼 온몸에 풀어져
덮어쓸 이불처럼 덮여 올 때
나는 내게 물으리
삶이 여전히 신비롭니?
검은 산과 뿌옇게 밝은 하늘의 경계선이
차창을 따라오며 흔들리거나,
거리에 들어찬 간판들이
오색 빛을 뿜고 있거나,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겠네
튤립 꽃밭에서 그는 부스럭거리며
‘연가’라는 제목의 시를 꺼냈다
늘 그랬듯이 짧은 시였고, 늘 그랬듯이
내가 읽는 동안 그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늘 그랬듯이 나는 읽어 보고 돌려주었고
우리는 말없이 일어나서 갔다
늘 그랬듯이
시대를 움직여 가는 힘과
그대를 움직여 가는 힘이 다를 수도 있다
거기서 슬픔이 오는가,
좁고 아늑한 그대의 뒤뜰은
그대에게서 나왔다는 이유 때문에
어두워 보이는가,
놀아라 초대하라
시가 아니면 또 어떠리
아이가 있는 젊은 부부가 유원지로 가네
가슴에 아이를 안고 있는 남자는 줄곧 눈을 찌푸리고
있네
늘 어두운 터널 속에만 있다가 갑자기 위로 나온 두더
지처럼.
남자의 팔짱을 끼고 가는 작은 덩치의 여자는
등에 검은 배낭을 지고 있네, 기저귀와 우유병을.
봄이 뱀처럼 그녀를 유혹하자 그녀는 아침부터
남자의 발등 위에 긴 한숨을 자꾸 뱉어 냈던 것이네
아이가 있는 젊은 부부가 사진을 찍네
앞면만 있는 네덜란드 식 건물을 배경으로 섰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그들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지
사진을 찍어야 할 장소가 어디인지를.
아주 오랫동안 차례를 기다렸네
찰칵, 한 번 더, 찰칵
‘아이가 있는 젊은 부부’
아이의 머리숱이 적은 뒤통수
사내의 찌푸린 눈
뭐라고 말하고 있는 덩치 작은 여자의 멜빵바지
노출이 너무 많았잖아, 웬일이야?
인간 노출계가 실수를 다 하다니
배경에 있는 집들은 다 죽어 버렸구만
점심을 먹은 젊은 부부가 쓰레기를 치우네
스티로폼 접시 위에 차가운 김밥 한 덩어리와
바람이 날라온 흙먼지가 묻은 떡볶이 한 개
구겨진 종이컵에 남은 네모난 얼음 몇 개를 쓰레기통
에 넣고
남자는 담배를 피우네
자동차 공장인 것처럼 많은 차들이 들어찬 주차장 한
가운데로
걷는 남자는 갈라진 바다 길을 가는 기분이네
그 길 끝에는 조개 속 같은 반지하 방이 있지
길이 막히기 전에 도착하는 게 좋겠어
난 내가 유혹받을 수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됐어요
아이가 있는 젊은 부부는 일찍 유원지를 나섰네
사진을 찍고 점심을 먹은 직후의 일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