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는, 상상 밖에 있다 - 이영식
상자는 상상 이상이다
상자 뚜껑이 열리기 전까지 내부는 4차원이다
상자는 하룻밤 사이에 이승과 저승을 오갈 수도 있다
상자 속에 누워 포장이사 가는 당신의 마지막 밤을 생각해 보라
상자는 뚜껑 하나로 명료하게 빛과 어둠을 나눈다
상자는 태어날 때부터 몇 개의 못을 박아 넣고 면죄부를 받았다
상자 속에는 예수와 부처가 기대거나 포개 눕기도 한다
상자는 밖이 궁금하지 않다, 조바심은 인간 몫이다
상자 안의 세계가 소원이라면 열어라
상자 모두가 판도라의 마술을 부리지는 않는다
상자 바닥에 빛 한 부스러기 없을 때 그 허무를 어쩔 것인가
상자 한 개쯤은 품고 살자, 열쇠를 무덤까지 갖고 가더라도
상자는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을 위무할 것이다
상자는 저를 세우지 않는다
상자 속에 돌이 담겨있으면 돌 상자
상자 속에 진주가 들어앉으면 보석함이다
상자는 힘이 세다
상자가 악어 이빨을 숨기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상자가 문제인가 소문이 문제인가
상자는 침묵의 요새, 수천 년도 입 다물고 간다
상자 속의 성배를 찾으려 마라
상자는 자물쇠 고리가 걸려 있을 때 깊어진다
상자 속 허튼 꿈으로 엿보았다가 사막의 죄* 짓지 마라
상자는 쌓여 빌딩이 되고 직장이 되고 밥을 퍼 나른다
상자를 향해 발기하는 동안 또 다른 상자가 살을 붙여온다
상자를 구워먹자, 상자는 늘 상상 밖이다
상자 속에는 흑암의 태양이 새똥 같은 별자리를 낳는다
상자에게는 상자의 문법이 있고 계율이 있다
상자는 매일 쌓이고 매일 무너진다
상자, 깨지고 부서져 화목으로 던져지는 저 성자(聖者)에게 경배를―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고도 남에게 말하지 않은 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