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돌아본 하루 - 강정
나무 하나 없는 곳에서도
나무가 보인다
죽은 자들이 대낮 창천 아래에서
민낯으로 속삭이고 있는 거다
채 다 얘기하지 못한 잎사귀들이 벌렁벌렁 바람의 윤곽선을 본딴다
허공 한가운데 커다란 창이 떠 있다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창 밖 너머 그들의 얼굴 보려 하지만
자꾸 내 얼굴만 얼비친다
표정이 바뀔 때마다 나무들이 우는 소리를 낸다
수십 년 전 심폐를 빠져나간 녹슨 공기의 진동
돌개바람이 인다
피와 재가 섞인 물단지 하나,
참수당한 시간의 머리통인 양
길 위에 구른다
문득 지구의 원형이 대기 바깥에서 우는 소리
가장 가까운 곳의 나무가 천천히 걸어와
핏물을 들이켠다
뒤돌아본 옛 도시가 불타고 있다
마지막 봄이 오면
말끔히 성장(盛裝)한 거지가 잿더미를 머리에 이고
바람을 순장(殉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