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 정영주
1
누설처럼 담을 넘어요
집을 버리는 용기도 혁명이지요
핸드폰에 저장해 가는 목록이면 충분해요
잠적을 들키는 것도 통쾌한 제안이니까요
시행착오만 두고 가야지요
이럴 땐 니체의 천 개의 눈이 필요해요
목록만 가지고 천 개의 고원을 넘는 일,
위험한 책은 호기심이 아니라 고집이니까
겹겹의 눈이 챙겨야겠지요
고집이 질병이라구요? 모험은 보험인 거 모르세요
하하, 그러니 수명이 다한 담은 넘어야지요
산은 고원으로 가는 통로니까
맹수처럼 눈에 불을 켜고 달려가야지요
불임이 문제거든요
‘예와 아니오’의 중간은 늘 불임이예요
자유의지를 묶어 논 집은 비상구가 많지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주사위는 주사위인데 단 한 개뿐인 숫자
암시와 묵시처럼 가장하지만
그 벽엔 못 하나 칠 수 없답니다
자, 눈 감고 열만 세세요
쉿!
2
밤보다는
고양이처럼 엎드린 새벽에게 속삭일 거예요
꼭 데려가야 한다면
미명의 기도를 택할 거구요
고통스럽게 기뻐할 거예요
오랫동안 한 곳에 채집된 어둠은
기록에서 삭제하지 않을 거예요
섬광 같은 황홀이 있었다면
그게 통로가 되겠지요
그렇게 참혹한 계단이 있다면
가장 짐승에 가까운 무릎으로
비상구를 찾는 것이 구원이 될 거예요
오랫동안 가둬온 도주
빛이 있다면 잔인한 거지요
지금은 다 닳아진 무릎만 믿을 수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