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의 시말서 - 김신영
한번도 사랑한다는 고백없이
불혹을 넘겼습니다
사랑을 위해
이 세상 끝까지 간 적은 더구나
없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일찍 가서 대기 하지 않았고
늘 헐레벌떡 지각을 일삼았습니다
먼저 말을 건네지도 않았고
앞에 나서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열정이라는 단어조차 알지 못한 체
반생을 살았습니다
눈물을 펑펑 쏟을 만큼 서글픈 일도
너무 아파서 죽음의 길목에 간일도 없습니다
밋밋한 삶에 미지근한 삶에
너무 달지도 시지도 않은 과일처럼
자극적인 것은 하나도 없는 반생입니다
크게 웃어본 일이 언제인지
즐거운 일도 없이
좁은 문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으며
야산에 올라 야호를 외치고
몇 번 공을 차다 숨이 턱에 오르는
빈약한 반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죽음을 각오하고 맹세하지 않았고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건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구걸하듯이 되는 데로
미미하게 미물이 되어
작은 일에 작게 웃고
작게 떠들고 작게 걸었습니다
목숨은 가늘고 길어져서 뱀꼬리를 달았습니다
집요하게 사냥을 한 적이 없어
기쁨으로 넘쳐나는 만찬을 맛보지도 않았으며
격식을 갖출 필요는 더더구나 없었습니다
떨릴 만큼 위대한 존재 앞에 서 본적도 없으며
내 스스로 아무도 감동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럭저럭 죽을둥 살둥 아등바등
제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고
성취된 것도 하나 없습니다
눈물겨운 반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