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버린 여자 - 전순영
비가 내리는 밤이면 그의
우산이다가
허기가 질 땐 먹이가 되어 주고
지칠 땐 풀밭이 되어 포옥 품어 주는 여자
양털 침실에 누우면 절벽을 기어오르는 담쟁이넝쿨
좌정하고 앉으면 불의 기 물의 기 강아지의 기
불러들이고
옥죄었던 몸 풀어놓고
백설 공주이다가 탁녀이다가
눈을 따악 감고 누드 모델이 된다
왼쪽 뇌 속엔 고전이 가득 담긴 책장이다가
오른 쪽 뇌 문을 열면 와르르 뛰어나와
침대가 되어
마마 자국 손톱 자국 마른 주름살
가슴 찌르던 옹이까지 흠뻑 싸안는 눈먼
홑이불이다가
한 개비 담배 연기로 피어오르는 동그라미 속에
흩어지는 수만 마리 나비 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