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없는 세상에 남긴다 - 이승하
ㅡ잔 에뷔테른의 유서
이젠 정말 아무것도 두렵지가 않네요
달콤한 잠 한번 자보았음 좋겠어요
영광은 비참함 뒤에 오는 것이라고
속악(俗惡)과 지고(至高)는 함께 가는 것이라고
말하지 말아주세요
우리는 모두 어둠 속에서 태어나
밝음 가운데 죽어가지요
딱 한 차례의 개인전
피를 토하면서 그린 그림들이
풍기 문란하다고 철거 명령을 받아
단 한 점도 팔리지 않았죠
그게 운명이라 그이가 다시 피 토할 때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몽파르나스의 잿빛 포도(鋪道)를 달려
술을 사오는 것
쾌락의 지옥이여
너와도 이제는 결별이구나
악마는 나에게 와 키스해다오
그리고 뱃속의 아기야
너와도 이제는 이별이란다
너는 엄마 얼굴도 보지 못하고
흉측한 빚더미의 이 세상을 향해
한번 울어보지도 못 하고 죽겠구나
“이따리아! 까―라 이따리아!”
오오, 신이시여
악마도 당신을 믿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내게 돌려주소서
사랑했던 그 사람을
사랑이란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됨의 길을 가르치는 과정이 아닙니까
더운 영혼으로 배워가는 과정이 아닙니까
불 없는 아틀리에에서
굳은 빵도 떨어진 식탁에서 그이는
그림을 그렸지요
마시고 싶다, 저 햇빛을
마시게 해달라고 외치면서 화폭에다
핏빛 생명을 토했지요
안고 싶다, 저 태양을
그리운 남국의 태양을 한번만 더
안게 해달라고 외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