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 - 김경후
1
자정의 책상엔
지우개 또는 얼룩진 종이
지우고 지우고 또 지운다
한때 사람들은 빵조각으로 글씨를 지웠지
빵이 아니라 망각을 달라
2
지우개, 외딴 성당의 고해소
그것에겐 흙바닥에 떨어진 미사보
끊어진 장미묵주 냄새가 난다
어둡게 피 흘리는 기억들
내 혀에서 떨어져 가루로 흩어져라
모든 기억을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지웠다는 기억
입속에서 잿빛 성체가 부서져 떨어진다
3
핏자국을 핥는 혓바닥, 지우개
흉터들의 감옥이자 숙성실
문지르고 문지르고 또 문지른다
이제 지우개가
나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