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 김경인
나는 멈춘다,
검은 사람들과 더 검어질 사람들이
서서히 낯빛을 잃어가는 숲길에서
언 땅 속에 꼼지락거리는 말들을 파헤치는 말발굽의 아우성과
식물도감 십칠 페이지 낡고 찢어진 풍경을 다 잊고서
너는 받아 적는다,
부화 직전 깨져버린 개개비의 청청록록 알껍질과
이제 막 날아오른 푸른머리흰눈의 발에 묶인, 슬픔처럼 길게 늘어진 철끈을
너는 그것을 알고 있다,
한 줌의 어둠 안에 사로잡히기 위해 네가 펼쳐든 대낮의 연분홍 양산이 접힐 때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너의 목소리
빌려준 나의 팔다리들
그리고 아직 내 것인, 옛집 문고리에 달라붙은 얼굴에 대해
네가 꽃이었을 때
숲은 흰 빛.
밀서를 봉하기 위해 기꺼이 흘러내리는 촛농처럼 내가 흘러들어간
내가 키운 편애(偏愛)와 편집(偏執)의 호두나무야
울퉁불퉁한 열매를 잔뜩 달고 시름시름 자라나야지
여러 개의 물혹을 매달고 느리게 달려가는 추억처럼
파란 얼음 아래 어른거리는 물고기 비늘
내가 떠나온 시간의 사금파리들이 창백하게 반짝일 때
물속의 녹슨 자물쇠는
아무것도 고백할 것 없는 아이의 몸통에 다시 채워진다
너는 황혼 다음, 검푸른 어둠
호주머니 속 작은 손전등
호주머니 속엔 차가운 손이 두 개
나는 두드림을 반복하는 녹슨 문고리
어떤 이름도 적힌 적 없는 종이
죽은 글자들을 뜯어먹고 살찐 들쥐들이 짚덤불 아래 비좁은 잠자리를 다투는
숲,
숲으로부터
내가 경험하지 못한 문장이
가볍게 떠오르다 사라졌다
내가 처음 네게 가 닿던 그날,
창문에 서리다 사라지는 입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