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약속 - 김미성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까지라도 기다려야
하는 내 운명처럼 불쑥 등 뒤에서 나타날지도 모른다 운
명은 장난처럼 찾아오길 좋아하니까 좀 늦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지켜지는 약속은 그리 많지 않으므로
광화문 우체국 앞에서 가고 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은 슬프다 사람들은 꼭 지켜야 할 약속을 어긴 채
그것을 잊으려고 우체국에 와서 편지를 쓰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알 수 없는 누군가와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모양이다 오래 익은 버릇처럼 눈 내리는 날엔 나도 모
르게 광화문 우체국 앞에 와서 잘 생각나지 않는 누군
가를 만나야만 한다고 고집하곤 한다
기억은 상실해가기 때문에 오늘은 어제나 새롭다
그럼에도 새로운 기억은 또다시 어제의 기억이 된다
그냥 지나쳐 가버린 건 아닐까? 약속한 그 사람이 혹시
나를 못 알아본 건 아닐까? 그래서 스쳐 가버린 건 아닐까?
그렇더라도 눈은 여전히 내리므로 내가 먼저 약속장소를
떠날 수는 없다 눈이 내리는 한 그 사람도 한번쯤 다시
되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약속한 그 사람이 이미 나를 지나쳐갔다 해도 눈 내리는
날 어쩔 수 없이 나는 잊혀져가는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
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