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의 기억 - 백상웅
1
북받친 사람처럼 눈 쏟아졌다. 녹슨 용골 드러낸 어선은 급한 마음에 뱃머리를
항구로 돌리고 육지를 밀었다. 눈발은 그대 아픈 곳에 관심도 없어 척추 부러진
어선을 껴안았다. 뼈마디 뚫고 솟아오른 엔진이 늙고 비릿하였다. 눈덩이가 기
름때 낀 심장을 철퍽 삼키며 왕성한 식욕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파란 페인트칠
벗겨진 앙상한 배를 하얗게 씹으며, 눈발을 고장난 어선의 멱살을 잡던 쇠줄을
깨물어 끊었다.
2
백년 만의 폭설이라고 했다. 마을 바깥에 그리운 이 있었지만, 발신음은 산을
넘지 못하고 귓바퀴에 차가운 신호음만 뿌렸다. 귓밥을 파내면 짠한 이름만 묻
어나왔다. 주먹 쥐면, 길은 튼 손등처럼 툭 끊어졌다. 그리움도 백년 만에 부러
졌을까? 혼자 남을 때, 내 사랑의 방식은 바닥에 깔려 출항을 기다리는 그물이
었다. 겨울볕에 누워, 얼고 젖기를 반복하며 어선의 등에 업히기를 한없이 기다
리는 것. 발자국은 방파제 끝까지 질질 끌려다녔다. 눈덩이가 바다로 떨어질 때
배의 후미는 출렁 가라앉았고, 폐선의 굽은 등에 꽂힌 깃발은 외로운 이의 발자
국을 내놓으라는 듯, 하얀 쇠창살에 갇힌 수평선을 그만 놓아주라는 듯, 온몸으
로 울며 눈송이의 귀싸대기를 올리고 있었다. 허공 속에 오롯이 찍혀 있는 눈송
이의 발자국, 오래 서 있었기에 단단한 발자국이 먼 바다로 밀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