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 김인자
장마비속입니다 새삼스레 비엔 푸른곰팡이, 아니 슬픔의 냄새 같은 게
배어있다고 수선 떨고 싶지는 않습니다 비는 우울로 빚은 술, 마시면 취
하는 알코올이지만 때론 마시지 않고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취하는 도수
높은 술입니다 늦은 밤의 빗소리는 먼길을 걸어와 종신서원을 마친 수도
자의 기도하는 뒷모습을 떠올리지만 폭풍 속의 비는 미친개의 번뜩이는
눈알입니다 칠흑의 들판을 내달려 무엇이든 물어뜯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 근질거리는 이빨을 가진 미친개의 속성, 비는 우글거리는 생명입니
다 두꺼운 옷을 벗겨 적나라하게 원시의 시간을 걷게 하는 길 안내자입
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당신'이라는 따뜻한 호칭을 허락한 이름도
'비'입니다 비는 세상의 모든 남자를 정부情夫가 되게 하고 세상의 모든
여자 또한 정부情婦로 만듭니다 고백할까요? 어느 날 그와 내가 눈맞은
후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마음은 콩밭에만 가있는 말하자면 그는 나의
기둥서방이고 나는 그 사내의 내연의 처인 셈이지요 그러나 싫지 않습
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복병 같은 장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