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자의 편지 - 이윤택
시집을 왔다
맹숭맹숭하다
내 위에 포복한 남편...
괜스리 심각한 표정 참을 수 없어
쿡, 웃다가... 뺨따귀를 맞았다.
거의 혼자 방에서 지낸다
책...헤드폰...거울...
그리고 시간은 무제한 방출
그냥 이대로 지워 간다는,
어쩌면 지당한 생각...
볼품없는 옆모습이라도 떠올려야겠다
솜씨없는 연애법이랑 그 잘난 시 나부랑이까지
나에겐 세일러복 시절의 사진첩 같은 것인가
감상에 빠져 있군..이라든지
누구나 가끔 그럴 때가 있어..따위
몰상식한 답변은 사양하겠다
국제시장 골목서 칼국수 사 먹으면서
너가 부자랬음 좋겠다..고
한말... 기억하니?
그때 선생님의 눈길을 끌기 위해
과도한 모험을 서슴지 않고 연출하는 아동처럼
너에게 헌납했던 골목길에서의 키스...
연극이었다...
부산 앞바다 너절하게 떠다니는 걸레조각처럼
나는 가진 게 없어서 늘 죄송했다
도시 집단 이주촌 제1종 생활보호 대상자
밀떡 먹고 검은 똥 누면서 필사적으로
2년제 교육대학 천상의 밧줄처럼 매달려야 했던 여자에게
이 시대는 처음 눈뜬 사랑을 허락할 능력이 있니?
너는 땡전 한푼 없이 날 불러내었고
커피 한잔 마시며 숙녀 흉내라도 내기 위하여
나는 전날 밤 3백개의 플라스틱 꽃술을 더 달아야 했다.
밤새워 2십원 짜리 조화를 만들면서
세 번 네 번 눈을 감았다 떠도
아니다, 이건... 맹목이다...
나는 문이란 문 죄다 열어 제쳐놓고
일기장 속 고이 찔러넣은 감정들 날려 버리기로 했지.
지하다방 희미한 등불 아래 기억을 씻고
광복동 밤길 갈 곳 없이 떠도는 너의 발자국 지우고
한 해 다 지나도 소식 없는
2급 정교사 자격증 따위 믿지 않기로 하고
당신, 나의 권리자가 되어 주겠어요?
교육대졸,
보조개 소유,
33,23,33인치 신부값은 얼마쯤 할까
철 지난 사내들에게 추파를 던졌지
지금 잠옷까지 그럴 듯하게 걸친 채
얼음 채운 잔 ..현실적으로 들고 있다
경탄할 만한 세상 아니니?
아침마다 한강을 넘는 단조로운 어깨들의 꿀꿀거림 속에서
힘차게 승용차 기어를 밟는 남편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으니
잘들 해보라지...
내가 보여주는 한 편의 멜로드라마 또한
한강의 기적처럼 새로운 미덕으로 떠오를 것이니
너 같은 철지난 사림(士林)들은
상처를 내보이며 엄살 떨다가
자식새끼 하나 없이 일찍 죽어라
내 그때,
너에 대한 생각들로
밤치장 하고, 불밝힌 강변로 소요하며
제법 우아한 모습으로 울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