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계 위에서 - 오규원
층계의 위는 밑에서 보면 높지만
위에서 보면 층계의 위도
내 발의 아래이고 내가 신은 구두의 밑이다
층계의 위에서 보아도 층계의 위는
언덕의 밑이고 산의 밑이다
높은 곳은 보다 높은 곳의 가슴이거나
턱수염 밑이고 낮은 곳은
보다 낮은 곳의 엉덩이거나 아랫배이거나
그런 높이로 층계는 이어져 있다 나는
보다 높은 곳의 사타구니쯤에서 피우던
담배를 구두 뒷발로 뭉개고 앉아 있다
층계와 마주하고 앉은 거리에는
한 시대의 낡은 집과 새 집이 보이고
집과 집 사이로 한 시대의 오늘이
내왕하는 은밀한 골목이 보인다
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지붕과
돌아앉아 있는 지붕이 보이고
닫힌 門과 열린 門이 보이고
열린 門이 닫히는 순간이
남의 일처럼 보인다 남의 일처럼
내 옆으로 개 한 마리가 와 남의 나라
역사처럼 나란히 구겨진다
층계 위에서 보면 층계의 위는
하늘 밑에서 너무 밑이고 그리고
층계의 위보다 내 키가 민망하도록 높다
층계의 아래위는 내가 내통해야 할
모양 그대로 완강한 집들
나는 올라온 사람이면 반드시 다시
내려가야 할 층계 위에 있고 층계는
내가 토해놓은 불임 시대의
누우런 헛구역질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