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우는 파도 - 한정원
햇빛 내리는 바닷가,
파도는 철썩, 수만 송이의 꽃을 피운다
아무 것도 두 번 일어나지 않는다고
절벽 위에서 너는 수수 꽃처럼 말했지
우리의 생명도 죽음도 똑같은 반복은 없다고
곤두박질치는 물살을 붙잡고 여기까지 왔다
삶에 엎드려 기도하던 굴복이, 진눈깨비의 시간이
다시 결가부좌를 틀며 눈을 뜬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 손잡이가 따뜻하다
현관 앞 식구들의 신발이 구름처럼 꿈틀댄다
주머니 속에서 살을 찌르는 작은 열쇠도 고맙다
천천히 손잡고 걸어가는 노부부의 팔십평생이
보슬비 속 우산이 된다
응급실 복도에서 울었던 계절이 있었던가
그때 나는 혼자가 아니었기에
지금 고요한, 바람 부는, 불빛 흔들리는 저녁이
머리에 손을 얹는다
파도처럼 부딪치면서 꽃을 피웠던 날들이
지금 아프지 않다
그 기억을 갖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