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리 호숫가에서 - 김인희
고모리 호솟가에 가면
『69』라는 이름의 까페가 있었다
사람들은 『69』를 오랄섹스의 상징으로 읽었다
주인은 언제부터인가 까페 이름을 『물』이라고 고쳤다
『69』의 에너지는 물이 될 수 있다고 주인은 말했다
그녀는 그 호수를 배경으로 먼먼 무의식의 바탕에 깔린
아름다운 기억 하나를 떠올린다
호숫가에는 소희야라는 지혜의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의 섬세한 손가락엔 반지가 하나 끼워져 있었다
그녀는 늘 약속의 날이 다가오는 반지를 들여다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호수 속에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하나수라는 거대뱀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하나수는 마을의 기억
마을의 새로운 시간이었다
하나수는 수많은 물고기를 잉태하고 있었다
어느 날 호숫가에 한 낚시꾼 사내가 나타났다
이 호숫가에서 하나수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낚시꾼이었다
그의 손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소희야와 똑 같은 반지가 하나 끼워져 있었다
천년을 움직이지 않던 호수의 물이 거세게 풍랑을 일으켰다
풍랑은 하나수의 해산의 비밀을 도우려
뽀얀 물안개로 마을을 가득 덮었다
호수의 물은 서로 얼싸안고 도는 듯이 보였다 『69』처럼
하나수의 해산은 여자와의 약속이었고
마을을 이끌어 갈 새로운 시간의 탄생이었다
고모리 호숫가에 수많은 물고기들이 태어나자
세상의 물안개는 모두 다시 호수로 돌아 왔다
맑은 물이 강마다 넘쳐흘렀다
물고기들이 강을 타고 마을 가운데로 흘러 내려갔다
안개가 걷히자 호수를 담고 있던 둥근 마을의 아침이
신부의 손에 낀 반지처럼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