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만의 나날들 - 진이정(1959∼1993)
약 냄새, 
돈은 슬퍼라, 
어린 육체보다 더 슬픈 십원짜리 지폐, 
황혼, 두견, 소양강 처녀보다 더 슬픈 
내 어릴 적의 십원짜리 지폐, 
미국 중앙정보부가 노나주었던 십원짜리 지폐, 
어느덧 나의 사회과학적 상상력은 그 사내의 선의를 믿지 못하네 
코끝에선 약냄새가 났고, 
미친 듯이 돈을 뿌리는 백인 병사의 곁을 지나 
적산가옥 앞길을 지나 
포대기에 업힌 나는 어디론가 실려가고 있었다 
외삼촌의 술주정이 약냄새에 섞여 날 어지럽게 한다 
박카스를 한 병 마시곤 다시 잠든 외삼촌 
그는 영원히 잠들어 있다 
그의 아트만은 사라지고 없다 한다 
그러니 거룩한 브라만의 존재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내가 그리워하는 건 
박카스에 취한, 구체적인, 생생한 그의 아트만이다 
난 그런 현실감에 목마른 것이다 
자동차 바큇살을 호이루라고 부르던 시절, 
'빵꾸 나오시' 집에서 나는 살았다 
일용할 봉지쌀과 함께 퇴근하던 외삼춘의 구체성은 
저 머나면 브라만 속으로 사라졌다 한다 
그러니 내가 브라만을 좋아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 
봉지쌀의 아트만이 사라졌듯이, 내 유년시절의 아트만들도 
이젠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기분을 슬프다고 하는 것일까 
이 범아일여의 천지에서 아니 슬픈 것이 무엇이던가 
오십환짜리 백동전처럼 남루한 슬픔이지만, 
슬픔의 화폐개혁은 아직도 기약 없어라 
슬픔의 지폐에서 길어올린 육십년대 꼬마의 쾌락들, 
땡이와 연필 함대, 크라운 산도, 코롬방 아이스케키…… 
고 코묻은 아트만들, 
아트만과 브라만은 하나다, 라는 말씀조차 
내겐 더 이상 위안이 되지 않는다 
브라만을 믿지 않듯, 지금 나는 
온갖 종류의 아트만을 신뢰하지 않는다 
죽으면, 그렇다…… 
그냥 없어지는 것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거의 삼십 갑자가 흘렀다 
그리고 나는 중년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이제 난 구체성의 신, 일상성의 보살만을 믿기로 한 것이다 
덧없음의 지우개 앞에, 난 흑판처럼 선뜻 맨살을 내밀 뿐이다 
아트만이 무너진 마당에 
인생이 꿈이란 건, 그 얼마나 뻔한 비유인가 
이제부터 나의 우파니샤드는 
거꾸로 선 현실이다 
하지만 못내 구체적인, 빵꾸 나오시 가게의 흙바닥에 굴러다니던 
호이루와 몽키스패너들의 그 완강함이다 
나, 아트만 없이 숨쉬고 있다 
브라만에 구걸하지 않으리라 
난 이제서야 그 옛날의 십원짜리 지폐를 꺼내든다 
그 슬픈 돈을 내고 구체적인 박카스 한 병 사먹으리라 
슬픔의 드링크에 취해, 내내 위안 받으리라 
나라는 물건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 라는 각성이 
둔한 내 뒷골을 쑤셔야만 하리라 
하하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니 
그럼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