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연기 같은 것 - 오탁번(1943~ )
시는 저녁연기 같은 것이다.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마을, 초가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가 바로 시다.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놀다가 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 내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보이던 어머니의 손짓 같은 연기, 하늘로 멀리멀리 올라가지 않고 대추나무 높이까지만 피어오르다가, 저녁때도 모르는 나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논두럭 밭두럭을 넘어와서, 어머니의 근심을 전해주던 저녁연기, 이게 바로 시다.
저녁밥을 먹으려고 두레반 앞에 앉으면, 솔가지 타는 내가 배어 있는 어머니의 흰 소매에서는 아련한 저녁연기가 이냥 피어오른다
‘시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답한 글이다. 산문이지만 운문과 방불하다. 산문·운문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혹자는 여기에서 “시는 저녁연기 같은 것”을 읽고 가겠지만 나는 탈경계를 읽는다. 정확히 말하면 시론과 시의 탈경계다. 시론인데도 리듬이 있다. ‘저녁 연기’가 라이트모티프(Leitmotiv)로서 탄주되고 있다. 리듬이 없는 산문은 읽어내기가 싫다. ‘시’가 없는 산문은 읽기 싫다.
<박찬일·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