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이 하는 독서 - 김지향
현관문을 나선다 열린 봄의 입 속에 활짝 펴진 책장을
밟고 간다 덜컥, 발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책장이 있다
다리를 홀쳐맨 삐죽한 책갈피 속엔 나보다 훨씬 늦게
나온 버들가지 휜 허리를 뚫고 바람꽃처럼 팔랑거리는
연두 빛 손톱, 내 발이 읽는다 발의 속독이 끝나기 전
에 깨난 생목숨이 봄바람의 목도리를 내 발에 걸친다
내 발은 새 풀잎의 생목숨을 얼른 읽는다 내 느린 발의
읽기가 끝나기 전에 겹치기로 굴러오는 은방울 소리
소리는 소리를 업고 소리의 팔랑개비 속으로 들어가
내 발을 굴린다 발의 귀가 새끼제비를 읽는다 발의 속
력이 소리를 다 읽기도 전에 등 뒤에 버려둔 시냇물 한
토막, 마악 풀기 시작한 몸 전체를 들고 졸졸졸 실타래
로 따라온다 연거푸 풀려나는 시냇물의 몸을 읽지못해
첨벙거리는 뒤꿈치를 한 사발 떠서 높이 던진다 나는
곧추 수직선을 그으며 물살에 박힌다 사방으로 튀는
물살 몇 점 물고 떠오르는 물새 한 쌍, 말갛게 씻긴 하
늘치마에 가만 무늬를 수놓는다 앉은뱅이 장다리꽃이
활짝 면사포를 벗고나와 어서 읽으라고 젖은 내 발을
끌어안고 해죽이 웃는다 산모롱이 큰 길가 뒷짐지고
서 있는 고층 아파트에 이마 부딪쳐 서쪽으로 몸을 돌
리는 햇덩이 새빨간 오지랖을 다 풀어 헤치기 전에
어서 읽어라 읽어라 다잡는다
한꺼번에 다 읽지 못한 책장을 덮으며
(한꺼번에 비어져 나온 욕망도 잘라내며)
눈을 감는 내 발, 나에게 나를 들키고 나니
오늘은 숨겨놓을 신비가 없구나
김지향 시집"발이 하는 독서"[시선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