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 - 문성해
할인점에서 고르고 고른
새 냄비를 하나 사서 안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때마침 폭설이 내려
이사온 지 얼마 안된 불안한 길마저 다 지워지고
한순간 허공에 걸린 아파트만을 보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품속의 냄비에게서
희한하게도 위안을 얻는 것이었다
깊고 우묵한 이 냄비 속에서 그동안
내가 끓여낼 밥이 저 폭설만큼 많아서일까
내가 삶아낼 나물이 저 산의 나무들만큼 첩첩이어서일까
천지간 일이 다 냄비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고
불과 열을 이겨낼 냄비의 세월에 비하면
그깟 길 하나 못 찾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품 속의 냄비에게서
희한하게도 밥 익는 김처럼
한줄의 말씀이 길게 새나오는 것이었다
문성해 시집"자라"[창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