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강가에서 예언서를 태우다 - 박현수
예언서를 끼고 아이들과 나는 강가로 간다
강물은 멈추어 서서 겨울을 견디기로 하였나 보다
지금 물결은 기억에 불과하다
강가에 무성하던 풀도 마른 생애를 남기고 사라졌다
예언서를 태우기 좋은 계절이다
비결(秘訣)도 도참(圖讖)도 마른 풀처럼 타들어간다
아빠, 왜 이 책들을 태우는 거야?
모처럼의 불장난에 신이 난 아이가 물었다
우리 바깥에 있는 미래를 불태우는 거야
이것 봐, 이제부터는 지금이 우리의 미래야
대답엔 관심도 없이 아이는 불 꼬챙이로 책을 뒤적인다
잠깐 열린 책 사이로 불길이 달려든다
한때 불처럼 타오르던 구절들이 사라진다
오리라던 미래는 연기되었고 이제 더 이상 연기될 시간은 없다
저 구절에 매달린 사람들의 표정이 사라진다
예언서를 쓴 사람은 예언자가 아니라
마른 풀처럼 부서지기 쉬운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부서지기 쉬운 마음이 저 책을 내 서가로 끌어들였다
그 마음이 불타지 않는다면
세상의 모든 예언서는 한 권도 불타지 않을 것이다
한 줄이 불타면
그대로 마음속에 한 줄이 다시 쓰이리라
불은 맹렬히 타오르고
내 마음은 흩날리는 재처럼 소란스럽다
이제 타버린 그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더 태울 예언서도 없는데
생각은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난다
아이들은 사제처럼 불가에 앉아
불 꼬챙이를 흔들며 남은 한 페이지까지 태우고 있다
마지막 예언이 사그라지자 삶이 모처럼 시시해졌다
겨울 강가를 떠나다 우리는 동시에 돌아다보았다
예언이 성취한 것은 한 줌 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