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한낮 - 김점미
숲의 두런거리는 바람을 상상하다 잊었던 일들을 한 낮 태양처럼 떠올린다.
방안에는 터덜터덜 낡은 선풍기 한 대 맥없이 돌아가고 어제부터 갈고 간
늙은 칼날도 팽팽한 고기압선 자르지 못한다. 언젠가 20대였던 날, 똘똘 뭉
친 열정의 힘으로 우울한 사랑을 나누었던 사람의 때 이른 부고, 더위 때문
에 너덜해졌다고 싱크대에 서서 수도꼭지 크게 틀어 놓고 마음을 씻는다.
사라진 시간들이 속옷까지 다 젖도록 흘러내린다. 발 밑이 흥건해졌다.
더운 머리를 식히려고 사진첩을 들여다본다. 8월 한 낮, 익어 있는 태양 같
았던 몇몇 사진들이 저기압대를 형성한다. 소나기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에
세상은 홍수 진다. 마음이 여기저기 주책없이 흩어지면서 세월의 고무줄을
잡아당긴다. 그의 죽음이 나를 감소시키는 더운 한 낮,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라고 위로하더라도, 한때 내 대륙의 전부이고 내
대양의 전부였던 그의 그림자는 머리 위서부터 직선으로 꽂혀진다, 이 한
낮에.
삶이 무료하다 느끼던 어느 날, 미국의 한 골프장에 서 있는 장대 선인장
한 그루 있는 사진을 신문에서 오려 책상 앞에 붙였다. 총알 같은 드라이
브샷이 크리스털 문신 마냥 선인장을 장식하고, 더러는 총알이 빠져나간
구덩을 사막의 태양과 바람이 메우고 있었다. 선인장은 정말이지 어딘가
딴 곳으로 이사하고 싶었을 게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불행을 알고도 그
자리에 박혀있어야만 했다.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 내 우울한
사랑이 그의 시선에 박혔던 것도, 그래서 아프게 골프 공을 맞아내어야
했던 것도 운명이었으리라.
불현듯, 깜깜해진 한 낮이 불안하게 부딪히는 前線에 무너지는 더위 속에
서 새로 돋아나는 대륙과 대양의 숲, 오랜 세월의 이끼가 바위 틈 속속히
묻어나는 숲의 너그러운 바람을 상상한다. 우울한 샹송**처럼 흩어지는
더위를 바라보면서.
* 영국 시인 존 단의 시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중에서
** 이수익 시인의 시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