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물화 - 문정영
한낮에 아이가 사비연필로 그리는 밑그림 속으로
나는 거미가 되어 기어 들어갔다
금세 흰 도화지에는
네거티브필름 같은 윤곽이 드러나고
나는 오래된 거미줄 위에서 뼈뿐인
이파리 사이를 오가며 흔들거렸다
곧은 어깨를 펴고
꽃을 받쳐든 둥근 줄기에도
내 몸의 허무가 닿았다
깨진 화분의 사금파리에서
뿜어 올라오는 한 줄기 빛에
다른 세상을 생각하던 눈이 감겼다
갈색보리잠자리가
내 입 속에서 날개치고 있었다
엑스레이에 찍힌 검은 꽃대의
금간 갈비뼈, 누군가 애초에
줄기가 부러진 나무를 그린 것일까
4절지 도화지 속에 뿌리 내린
삶을 재생시키는 꽃화분 하나
나는 그 동안 부러진 나무의 그림자를
거미줄로 감싸고 있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