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디 멀리 다녀온 것 같다 - 이문재
-적어도 앞으로 백년 동안은
좋은 것은 나쁜 것이고 나쁜 것이 좋은 것이다*
멀리 떠나 있다 온 것 같다
죽어가는 것들은 여전히 죽어가고 있고
대량생산은 국경을 넘나들며 여전히 혈기왕성했다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종합비타민은 하루 한 알씩 복용하고 있었고
사랑을 유지하는 데는 백년 전과 다름없이
돈이 들어갔다 그러나 만주에서 돌아온 외삼촌이 그랬듯이
사랑을 추억할 때는 사랑을 위하여 그 비용을 제했다
내가 아주 오랜만에 돌아온 것 같다
민주주의는 소음과 똑같은 소음의 대결이었고
쯔나미는 쯔나미가 발생한 직후에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다
은행나무는 일억번째 가을을 맞이하면서
일억년 전과 똑같은 향기를 내뿜었다
일요일은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왔다
암을 이겨낸 초로의 성직자가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자식 교육에는 왕도가 없다고 털어놓았다
이탈리아 명문 프로축구 구단주에게 친선경기를 갖자고
제의한 바 있는 멕시코반군 부사령관이
우리를 제발 그냥 내버려두라고 요구하는 탈근대 혁명가가
다시 대장정에 오른다는 소식이 인터넷에 떴다
내가 어디 오래 떠나 있다 온 것이다
정보화사회로 진입한 이래 인간은 전기인간이었다
선진국 아기는 태어나기 전부터 전원에 연결되었고
죽은 사람은 죽고 나서 사흘 만에야 전원에서 떨어져나갔다
자궁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오염되었으며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군인들의 정자는 무기력해졌고
코폴라 감독 마니아를 자처하는 경비행기 조종사는
양 날개에다 고성능 스피커를 달고 항공 방제를 했다
일상은 여전히 일상적이어서 두려웠다
개똥은 약에 쓰이지 않기 위해 늘 숨어다녔으며
없어도 될 것들은 개똥처럼 지천에 깔려 있었다
농부는 농사를 잘 지으면 배 두드리며 겨울을 나고
시 잘 쓰는 시인은 언제 어디서나 당당해야 하는데
아직도 여전히 시인과 농부가 맨 끝 인류의 마지막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어디 멀리 갔다가 온 것이다
과도정부는 윤달에 들어 있는 농경사회의 명절이었으며
칠칠이 최북은 애꾸눈 그대로 눈 아래 얼어 죽어 있었고
지금 머리를 긁적이며 비밀번호를 새로 만드는 사람들은
거개가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사람들이었다
혁명은 여전히 냉장고와 좌변기 사이에 있었다
케이비에스 제일 에프엠 방송처럼 나른한 오전이다
아무래도 내가 또 어디 멀리 다녀와야 할 것만 같다
그런데 너 말이다 너 너는 어디 갔다 오지 않았느냐?
* E. F.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재인용한
1931년 케인즈경의 발언. '좋은 것은 나쁜 것이고 나쁜 것이 좋은 것'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1막 1장에 나오는 마녀의 대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