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장나무 잎사귀에는 낯선 길이 있다 - 송수권
봄날, 누리장나무 잎사귀에 오면
낯선 길이 하나 있다
누리장나무 잎사귀에 불어 사는
민달팽이 한 마리
누리장나무 잎사귀 뒤에
제 몸 숨길 줄 알고
잎사귀 위에 올라와
젖은 몸 말릴 줄안다
붉은 말똥가리 새끼
저 하늘에 떠도는 동안
꽃 피는 그 소리에 움찔 놀라고
두 뿔에 감기는 구름
돌들로 감옥을 쌓고
말씀으로 예루살렘이 불타는
정든 유곽의 길을 지나
혁명(革命)의 길을 지나
봄날,
누리장나무 잎사귀에 오면
내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길이 하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