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프 자르는 이들 - 허혜정
언제나 시대는 그들 손에 들려 있다
성황리에 열리는 개관식마다
가슴팍에 축하의 꽃송이를 달고
테이프 커팅을 하고 방명록에 사인을 하는 이들
즐비한 화환이 증명해주는 그들의 힘과
무비카메라에 차곡차곡 담기는 명성
그들은 유창한 연설을 하고
서둘러 기념식수를 하고
분주한 악수를 하고 떠났다
그들은 떠났다. 찹쌀떡을 팔러 온 노인과
배가 남산만한 여자를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
웅웅대는 축사와 마이크 소리를 남겨두고
후원회의 박수를 받으며
한번 더 기억해달라며 떠났다
벌써 오래 전 그들은 떠나갔다
한 세기를 미끄러져간 릴테이프
신문지에 날리던 말들처럼
환한 풀밭에서 골프공을 날리며
리마로, 제네바로 어디론가 떠났다
그렇게 멀리서도 환영처럼 머물러 있던 얼굴
언제나 출렁이는 피킷 속에 등장하던
정의의 전도사들 뉴스메이커들
참모진의 경호에 싸여서도
항상 곁에 있었노라 말하는 이들
만약 시간이 일분일초를 잘라내는 가위라면
지속되는 것만이 역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일미터도 못 굴러가 진창 속에 처박힐 말들을
굳이 기억할 필요는 없는 그들
엄청난 기부자의 머리에 박사모를 얹어주는 대학처럼
액자를 기증하고 그럴싸한 명판을 새기는 이들
시립회관 복지회관 평화센터 명예의 전당에도
맘껏 공부하고 축하공연도 하라던 이들
그들은 떠났다. 뒤처리가 난감한 관리인과
우왕좌왕 흩어지는 군중을 남겨두고
다음 테이프를 자르러 떠났다
돌아오지 않을 시간처럼 그들은 떠났다
현관까지만 발도장을 찍고 갔다
미련한 들러리가 되어 날려주던 엄숙한 갈채 속에
늘 틀렸다고 느꼈다 아니라고 느꼈다
굳이 테이프 하나 자르러 먼 길 달려왔다는 이들
일찌감치 떠나는 게 당연한 이들
감사할 수밖에 없는 방문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