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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47호
2013.1.24 (음12.13)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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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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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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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들빈들 노는 것이 좋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일을 하면 마음이 흡족해진다. - 안네 프랑크(1929~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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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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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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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서울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 이재성
바늘을, 한 움큼 삼킨, 목까지 잠기는 시커먼 스모그의 급류 속으로 나는 떠내려 간다. 허위적거리며, 산발한 물귀신의 머리카락에 발목을 잡힌 채, 납빛 가면을 쓴 사람들이 다리 위에서 내려다 본다. 나는 세상을 사랑한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아니야, 물소리야. 저기 사람이 떠내려가는데? 아니야, 나무토막이야. 그런가? 정말, 그런데! 닿는 곳이 어디인가. 세상에서 그렇게 잊혀져 간 사람들. 강의 하구 부드러운 모래섬에서, 봄날 죽었던 가지에서 다시 피어나는 잎새처럼, 꽃잎처럼
서해안 개펄같이 질퍽한 시장바닥을, 다리가 퇴화한 파충류처럼 얇은 뱃가죽을 문지르며 기고 있는 사람이 있다. 어디서 잃었을까? 이데올로기 전쟁의 피냄새를 맡은 상어의 이빨이 물어뜯었을까? 공사판에서 질통을 지고 오르다 아찔한 현기증에 실족을 했을까? 그러나, 그의 하체에는 생명만큼 질긴 고무타이어가 새살로 돋았다. 무좀 방지 구두 깔창과 양말을 유모차에 가득 싣고, 온몸으로 밀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창으로 찔리듯, 매미의 호각소리에 맞추어 내려꽂히는 삼복더위의 뜨거운 햇살에 등을 마구 찍히며, 저 세상으로 가는 4호선 지하철역 입구, 비닐하우스에서 속성으로 재배된 꽃 옆에서 점자책 가사를 더듬으며 늙은 스피커통으로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의 목 위에는 철셔터문이 단두대의 칼날처럼 위태롭게 걸려 있고, 사람들은 세상의 오자 투성이의 점자책을 더듬으며, 시간의 단두대 밑을 오고간다.
오늘 아침 여기서 끔찍한 교통사고가 났었다. 신호등의 파란 불만 보고 건너던 임산부가 트럭의 바퀴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이름도 얻지 못하고 죽은 어린 영혼의 무덤은 어디인가. 마구 물어뜯을 사람들의 목덜미를 겨냥하며 술취한 미친 개떼들이 질주한다. 깨진 빗살무늬토기같이 생긴 횡단보도를 목숨걸고 건넌다. 인신매매 당한 어린 소녀들의 피를 빨아먹은, 유흥가의 네온사인의 혈관 속으로 붉은 피고름이 흐른다. 음란한 눈을 깜짝거리며 사람들을 유혹한다 환락의 진공청소기 속으로 빨려들어간 사람들은 "나"를 잊어버린다.
어두운 저편에서 사람들이 태어나고, 또 저편으로 사라지는 회전문, 문이 돌고 돌아 환히 열린 세상은 언제인가. 언제 튕겨져 나와야 볼 수 있는가.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는 원심분리기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가죽과 살이 해체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뻐근한 고개를 쉬지 않고 돌리며 감시하는 선풍기의 눈 밑에서, 잠들지 않고 깨어 있다면, 잠들지 않고 깨어 있다면, 나는 이번 정거장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 내일 아침 마당에서 가슴의 나무에 핀 사람의 숲을 볼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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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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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2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1. 꿈을 이루기 위한 스프
333 이야기
그 당시 나는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 있는 토론토 북부의 사슴 농원에서 주말 세미나에 참석 중이었다. 금요일 밤, 우리가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더 올라간 지점에 있는 배리라는 마을을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수백만 달러의 재산 피해가 났다. 일요일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배리에서 잠시 차를 멈췄다.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운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을 전체가 말 그대로 쑥밭이 되어 있었다. 눈에 보이는 온 사방이 폐허로 변해 버렸다. 집들은 풍비박산나고, 자동차들이 뒤집힌 채로 여기저기 뒹굴었다. 바로 그날 밤 보브 템플턴도 차를 몰고 같은 고속도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도 나처럼 차를 멈추고 서서 그 재난을 구경했다. 단지 그는 나와는 다른 생각 을 했다. 보브는 캐나다 온타리오 주와 퀘벡 주에서 방송되는 텔레미디어 라디오 방송국의 이사였다. 그는 자신이 소속된 라디오 방송을 이용해 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 틀림없이 뭔가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나는 토론토에서 다른 세미나를 이끌고 있었다. 세미나가 진행되는 동안 보브 템플턴과 텔레미디어 사의 또 다른 이사인 보브 존슨이 세미나장에 들어와 뒤켠에 서 있었다. 그들은 배리 마을 사람들을 위해 자신들이 뭔가를 해 야만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었다. 세미나가 끝난 뒤 우리는 보브의 사무실로 갔다. 그는 회오리바람에 희생된 사람들을 돕는 일에만 온통 정신이 몰두해 있었다. 그는 오직 그 애기뿐이었다. 그 다음 주 금요일에 그는 텔레미디어 방송국의 모든 간부들을 자신의 사무실로 소집했다. 그는 차트를 세워 놓고 맨 위에 글씨로 3자 세 개를 썼다. 그러고 나서 간부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3시간짜리 방송으로 지금부터 3일 만에 3백만 달러를 모금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돈을 배리 마을 주민들에게 주는 겁니다."
갑작스런 제안에 실내엔 침묵만이 감돌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침내 누군가 말했다.
"템플턴 씨, 당신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요. 그건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요."
보브 템플턴이 말했다.
"잠깐만요. 난 여러분에게 그것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묻고 있는 게 아닙니다. 또 우리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난 다만 여러분에게 그렇게 하고 싶은가 아닌가를 물었을 뿐입니다."
사람들 모두가 말했다.
"그거야 물론 하고는 싶죠."
그러자 보브 템플턴은 333이라고 쓰여진 글자 밑에 크게 T자로 금을 그었다. 한쪽에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 다른 한쪽에는 이렇게 썼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 그런 다음 그는 모두에게 말했다.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칸에는 크게 가위표를 하겠습니다. 우린 왜 이 일 이 불가능한가를 놓고 토론할 만큼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요. 그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 칸에 모든 아이디 어를 적어 나갑시다. 좋은 결론이 내려질 때까지 우린 이 방을 나갈 수가 없습 니다."
다시금 침묵이 감돌았다. 마침내 누군가 말했다.
"캐나다 전지역에 라디오 생방송을 하는 겁니다."
보브 템플턴이 말했다.
"매우 좋은 생각입니다."
그는 그것을 차트에 적었다. 그러나 그가 문장을 채 다 적기도 전에 누군가 말했다.
"캐나다 전역에 라디오 생방송을 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우리 방송국은 캐나다 전역에 중계국을 갖고 있지도 않아요."
그건 대단한 설득력 있는 반대였다. 그들은 온타리오 주의 퀘벡 주에만 중계국을 갖고 있었다. 템플턴이 말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얘긴 나중에 합시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라디오 방송국들끼리는 언제나 경쟁이 심하기 때문이었다. 방송국들이 서로 협조를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으며,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할 때 그렇게 하도록 만든다는 것은 시제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갑자기 누군가 한 가지 제안을 내놓았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캐나다 방송계에서 가장 명성을 얻고 있는 하비 커크와 로이드 로버트슨에게 이 방송의 진행을 맡기는 겁니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전국적인 텔레비전 방송의 앵커를 맡고 있었으며, 라디오에는 절대 출연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때가 금요일이었다. 그 다음 주 화요일, 그들은 '라디오 마라톤'을 시작했 다. 캐나다 전역에서 50개가 넘는 방송국들이 이 방송에 참여했다. 배리 마을 주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한, 누가 이 방송을 주도하는가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비 커크와 로이드 로버트슨이 생방송 진행을 맡았으면, 그렇게 해서 그들은 실제로 3시간의 방송을 통해 3일 만에 3백만 달러를 모금하는 데 성공했 다.
당신 역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왜 할 수 없는가보다 어떻게 그것을 해낼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다면 말이다.
보브 프록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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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과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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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인 유전자 - 리처드 도킨스
제7장 - 가족 계획 (2/2)
현시 행동 원-에드워즈의 착상 중에서 가장 놀랄 만한 것은 '현시(epideictic) 행동'이라는 사고 방식일 것이다. 현시란 말은 그가 만든 말이다. 많은 동물은 자신의 생활의 많은 시간을 큰 무리 속에서 지내고 있다. 이 종의 무리짓기 행동이 자연 선택에 의해 촉진되었다는 것은 어째서일까. 이에 관해서는 다소간 상식적인 각종의 이유가 시사되고 있고 몇 개에 관해서는 제10장에서 말하고자 생각하고 있으나, 윈-에드워즈의 생각은 그것들과는 아주 먼 이야기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저녁 때에 찌르레기가 큰 무리를 이루거나 많은 모기가 문기둥의 상공을 윙윙거리고 있을 때 그들은 스스로 자기 개체군의 밀도 조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주장은, 개체군 밀도가 높을 때는 출생률을 감소시킨다는 것이므로, 그들이 개체군의 밀도를 추정한 후에 어떤 수단을 강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치에 맞는 말이다. 이것은 항온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내부에 온도계를 반드시 배치해야만 하는 것과 꼭 같은 이유이다. 윈-에드워즈에게 있어 현시 행동이란 개체군 밀도의 추정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는 동물이 의도적으로 모여 무리를 지어보는 것 외에는 별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의식적인 개체수 추정이 행해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개체군 밀도에 관하여 개체가 수용한 감각 자극을 생식 시스템에 결부시키는 자동적인 신경, 또는 호르몬 메커니즘을 생각하고 있다. 이상에서 간단하게나마 나는 윈-에드워즈의 이론을 올바르게 평가하려고 노력했다. 만약 내가 이것에 성공했다면 독자는 지금 그의 이론이 언뜻 보아서 그럴듯하게 납득된 기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이 언뜻 보아 그럴듯하다고 해서 그 증거까지 유력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책의 여기까지를 읽은 독자는 의심하고 덤빌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안됐지만 증거는 별로 쓸모없다. 증거를 구성하는 다수의 사례는 확실히 그의 견해에 따라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겠으나, 같은 식으로 보다 정통적인 '유전자의 이기성'의 관점에서도 설명이 잘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 계획 이론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에 입각한 가족 계획 이론을 세운 제1인자는 위대한 생태학자 랙(David Lack)이었다. 더욱이 그는 그 이론을 유전자의 이기성에 입각했다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의 연구는 주로 야생 조류의 한 둥지의 알 수에 관한 것이었지만, 그의 이론이나 결론은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종류의 새도 그종에게 특유한 한 둥지의 알 수를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 가령 북양가마우지(gannet)와 바다오리(guillemot)는 한 번에 한 개의 알을 품는데, 제비는 3개, 박새는 6개 또는 그 이상의 알을 품는다. 물론 이 한 둥지의 알 수에는 변이도 있다. 한 번에 알을 2개밖에 안 낳는 제비도 있고, 박새처럼 12개의 알을 낳는 수도 있다. 한 마리의 암놈이 산란하여 품는 알의 수는 다른 특성과 같이 비록 부분적이기는 한 유전적지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사태가 그 정도로 단순한 것은 있을 수 없음에 틀림없으나, 말하자면 알을 2개 낳게 하는 유전자, 4개 낳게 하는 대립 유전자 등등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자! 이렇게 되면 유전자 풀 속에서 수를 늘려 가는 것은 이들 유전자 중 어떤 것일까. 유전자의 이기적 이론으로는 이 문제가 크로즈업 된다. 표면적으로 보면 알을 2개 또는 3개 낳게 하는 유전자에 비하면 알을 4개 낳게 하는 유전가 유리한 것은 뻔한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르나 "많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식의 단순한 논의가 옳지 않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분명하다. 만약 그 논의가 옳다면 4개의 알을 낳기보다는 5개가 더 좋고 또한 10개, 100개가 좋고 나아가서 무한히 산란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 될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 논의는 논리적으로 부조리에 부딪치게 된다.
다수의 알을 낳으면 이익뿐만 아니라 대가를 치러야 함은 분명하다. 애낳기의 증가는 아이에 대한 보호 효과의 감소를 지불해야 할 운명에 처한다. 임의의 환경 조건하에 있는 임의의 종에 관한 특정의 한 둥지의 최적 알 수가 존재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 랙 이론의 요점이다. 랙과 윈-에드워즈의 견해가 갈라지는 것은 "누구의 입장에서 보아 최적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답하는 방법에 있어서이다. 윈-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이다. 모든 개체가 목표로 하는 최적 알 수는 집단 전체에 있어서의 최적 알 수라는 것이다. 한편 랙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각각의 이기적인 개체는 어미가 키울 수 있는 새끼의 수를 최대로 할 수 있는 한둥지의 알 수를 선택하는 것이다. 3개의 알이라는 것이 제비로서 만일 한 둥지의 최적의 알 수라면 이것에 대한 랙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된다. 네 마리의 새끼를 키우려고 하는 개체가 최종적으로 키워 낼 수 있는 수는 세 마리밖에 키우지 않으려고 하는 경쟁자가 키울 수 있는 새끼 수보다 결국 적어지게 되는 것이다. 명백한 이유로서 생각되는 것은 네 마리의 새끼를 키운다면 각각의 새끼에게 분배되는 먹이의 양이 부족하기 때문에 성숙 단계에까지 자라 살아 남는 것이 거의 없게 된다는 결론일 것이다. 이것은 4개의 알에게 분배되는 난황의 양, 그리고 부화 후 새끼에게 주어지는 먹이의 양, 둘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다. 즉, 랙에 따르면 개체가 한 둥지의 알 수를 조절하는 이유에는 이타적인 점 같은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산아 제한을 행하는 것은 집단을 위한 자원을 과잉으로 이용 못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실제로 자기의 새끼 수를 최대화하기 위해 그들은 산아 제한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 우리들이 산아 제한에 결부시키고 있는 이유와는 아주 정반대의 목표이다.
개끼 수 조절 새끼를 키우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우선 알을 만들기 위해 어미 새는 대량의 먹이와 에너지를 투자해야만 한다. 아마 배우자의 도움도 필요할 것이다. 어미 새는 알을 품고 알을 보호하기 위해 집을 만드는 데도 많은 노력을 한다. 다시 어버이 새는 수주간에 걸쳐 인내로서 알 품기를 계속한다. 그리고 새끼가 부화하면 어버이 새들은 자기를 혹사하여 거의 쉬는 일도 없이 새끼의 먹이를 나르고 있다. 이미 소개했거니와 박새의 경우 한 마리의 어미 새는 낮 동안 30초마다 평균 1회의 비율로 먹이를 둥지로 나른다. 우리 인간과 같은 포유류의 경우 사정은 틀리다고는 하나, 특히 어미에게 있어 번식이 큰 일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만약 어미가 먹이와 양육을 위한 노력 등과 같은 한정된 자원을 새끼들에게 너무 많이 분산시키면 어미가 키울 수 있는 새끼의 수는 어미 새가 적당한 목표로 출발한 경우에 비해 적어지고 말 것이다. 어미 새는 애낳기와 애키우기 사이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한 마리의 어미 새 또는 한 쌍의 작이 구할 수 있는 먹이와 자원의 총량이 그들이 키울 수 있는 새끼 수를 결정하는 제한 요인이 된다. 랙의 이론에 의하면 자연 선택은 이들 한정된 자원들로부터 최대의 유리함을 유도하도록 산란시의 한 둥지의 알 수(또는 한배의 새끼 수)를 조정한다.
합리적 출산 새끼를 과다 출산하는 개체가 불리하게 되는 이유는 개체군 전체가 그 때문에 절멸해 버리기 때문이 아닌 단적으로 그들의 새끼 중에 살아 남는 수가 적기 때문이다. 과잉 산란에 관한 유전자군은 이것들을 지닌 새끼들이 거의 성숙할 수 없으므로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문명인 사이에는 가족 구성원의 크기가 개개의 부모가 조달할 수 있는 한정된 자원들에 의해서는 이미 제한받지 않는다는 현상이 생기고 있다. 어떤 부부가 자기들이 양육 가능한 이상의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누가, 즉 그 개체군 중 해당 부부 이외의 부분이 개입하여 과잉분의 아이들을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한다. 물질적 자원을 전혀 못 가지는 부부가 다수의 아이를 여성의 생리적 한계에 이르도록 낳아 기르려고 해도 실제로 이것을 저지하는 수단은 없다. 그러므로 복지 국가라는 것은 극히 부자연적인 실체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키울 수 있는 수 이상의 아이를 가진 부모는 손자를 많이 가질 수 없고, 따라서 그들의 유전자가 장래의 세대에게 이어지는 일은 없다. 자연계에는 복지 국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출생률에 대해 이타적인 자제를 할 필요는 없다. 자제를 모르고 방종을 가져오는 모든 유전자는 즉시 벌을 받는다. 그 유전자를 보유한 아이들은 굶주리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과도한 인원을 거느린 가족의 애들이 굶어 죽어도 그냥 두던 옛날의 이기적이 s방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래서 우리들은 가족을 경제적인 자급 자족 단위로 하는 것을 폐지하고 그 대신에 국가를 경제 단위로 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 대한 생활 보장의 특권은 결코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
피임 피임은 종종 '부자연스럽다'고 비난된다. 그렇다. 극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곤란한 무제는 복지 국가에서도 매한가지라는 점이다. 우리들의 대부분은 복지 국가를 극히 바람직한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부자연스러운 복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또한 부자연스러운 산아 제한을 실행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 상태에 있는 것보다 더 비참한 결과에 이를 것이다. 복지 국가란 지금까지 동물계에 나타난 이타적 시스템 중 아마도 가장 위대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어떠한 이타적 시스템도 본래 불안정한 것이다. 그것은 이용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이기적이 개체에 남용당할 여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키울 수 있는 이상의 아이를 가지고 잇는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무지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그들이 의식적으로 악용을 꾀한다고 비난할 이유는 못 된다. 다만 나는 그들이 다수의 아이를 만들도록 의도적으로 선동하고 있는 지도자나 강력한 조직에 대해서는 그 혐의를 풀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세력전과 번식 허가증 야생 동물의 이야기로 되돌아가기로 하자. 한 둥지의 알 수에 관한 랙의 논리는 윈-에드워즈가 인용하는 기타 모든 사례, 예컨대 세력권 행동, 순위제 등에 일반화시킬 수 있다. 예를 들면 윈-에드워즈와 그의 동료들이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는 홍뇌조를 택하기로 하자. 이 새는 식물을 먹이는데, 습원을 분할하여 소유자가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보다 다량의 먹이를 포함하는 세력권을 만든다. 번식기 초기에 그들은 세력권을 두고 싸우는데 패자는 자기의 패배를 인정하는지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력권을 갖지 못하는 낙오자가 되며, 그 계절이 끝날 즈음에는 대체로 아사해 버린다. 번식할 수 있는 놈은 세력권 소유자일 뿐이다. 그런데 세력권을 갖지 못한 새들도 생리적으로는 번식이 가능하다는 것이 다음의 사실에서 밝혀져 있다. 세력권 소유자가 죽으면 낙오자 중의 한 마리가 즉시 그 후계자 자리에 앉아서 번식을 시작한다. 이 극단적인 세력권 행동에 관한 윈-에드워즈의 해석은 이미 알다시피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낙고자들은 번식을 위한 허가증 또는 티켓을 놓치게 된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번식 행위를 보류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좀 귀찮은 일로 보인다. 낙오자들은 왜 사력을 다하여 한사코 세력권 소유자를 내쫓으려고 하지 않을까. 비록 지쳐서 쓰러질지라도 그들이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조금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잃는 것이 엄연히 있는 것이 아닌지. 위에서 보았듯이 만일 세력권 소유자가 사망하는 일이 있으면 낙오자에게 그 세력권을 입수하여 번식할 시회가 돌아온다. 만일 낙오자가 이 방법으로 세력권을 입수하여 번식할 기회가 돌아온다. 만일 낙오자가 이 방법으로 세력권의 후계자로 정착할 가능성을 기다리는 편이 투쟁에 의해 세력권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보다 크다면 비록 적은 에너지라도 무익한 싸움으로 허비하기보다는 세력권 소유자 중에서 누군가가 죽기를 기대하며 대기하는 편이 이지적 개체로서 그에게는 유리하다. 윈-에드워즈의 입장에서 보면 집단의 번영을 꾀함에 있어서 낙오자들의 역할은 대역자와 같이 무대 옆에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집단의 번식을 위해 전시 무대 위에서 세력권 소유자 중 누군가가 쓰러지면 즉시 그 놈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분명해진 것처럼 낙오자가 나타내는 행동은 순수하게 이기적인 개체로서 그들의 입장에서 보아도 가장 좋은 전략일지도 모른다. 제 4장에서 말한 대로 우리는 동물을 도박사로 볼 수가 있다. 때때로 도박사로서 가장 좋은 방책은 공격 작전이 아닌 관망이 작전일지도 모를 일이다.
같은 식으로 동물이 비번식자의 지위를 언뜻 보아서 수동적으로 '감수'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많은 다른 예도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에 의해 더 용이하게 설명할 수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설명의 기본형은 같다. 즉, 그 동물의 가장 좋은 결정은 일단 자제하고 장래의 더 좋은 기회에 희망을 거는 것이다. 하렘의 소유자들에게 새치기를 꾀하지도 않는 낙오된 바다표범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좋은 기회가 닥쳐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비록 호기는 오지 않고 결국 그가 자손을 못보고 죽을망정 이 도박은 이길지도 모를 도박이었다. 그 한 마리에 관해서는 결과적으로 이 도박이 패배할 것을 알았다고 해도 역시 그것은 이길 수도 있는 도박이었다. 또 개체수의 급증으로 번식의 중심 지역에서 수백만의 큰 그룹을 이루고 쏟아져오는 나그네쥐들도 그들이 지나쳐 온 그 지역의 개체군 밀도를 감소시키기 위해서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더 밀도가 낮은 생활 장소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이기적 존재인 그들 모두가 그러고 있는 것이다. 특정한 장소를 계속 고집하면 그들은 새로운 생활 장소를 발견 못하고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가 나야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도 다음의 가능성을 변명하는 것은 아니다. 즉, 원래의 지역에 잔류하는 것은 더 좋지 못한 도박이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개체군 과밀-출생률 감소 초래 개체군의 과밀이 때로는 출생률의 감소를 초래케 된다는 것은 많은 자료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사실이 윈-에드워즈의 이론뿐만 아니라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과도 합치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옥외의 울타리 안에 먹이를 충분히 공급하고 생쥐를 자유로이 번식시키는 실험이 행해진 적이 있다. 이 개체군은 어느 수까지는 증가했는데 그 후에는 평형 상태가 되었다. 개체수가 평형 상태로 된 것은 과밀 결과 암놈의 번식 능력이 감퇴되었기 때문임을 알았다. 새끼 수가 줄어든 것이다. 이와 비슷한 효과는 이외에도 종종 보고되고 있다. 이 같은 종의 효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은 '스트레스'라고 할 때가 많다. 더욱이 원인에 그런 이름을 붙여 보는 것만으로는 설명을 어떻게 연관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개체군의 과밀화에 따라 출생률을 감소시킨다는 성질을 가진 암놈에게 자연 선택이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도대체 왜 그럴까!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출산 원-에드워즈의 답은 분명하다. 암놈이 개체군 밀도를 측정해 출생률을 조정하는 성질을 가진 덕택에 먹이의 과밀 이용을 일으키지 않고 사는 집단이 그룹 선택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기 실험의 경우 먹이가 결코 부족하지 않았는데 생쥐가 이 조건을 이해한다고 상정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들은 야생 생활에 적응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그리고 야외 조건하에서라면 과밀은 앞으로 최래될 기근을 나타내 주는 지표가 될 것이다.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의 견해는 어떠한가? 거의 같은 의견인데, 단 하나의 결정적인 의견의 차이가 있다. 동물은 그들 자신의 이기적인 입장에서 보아 최적 수의 새끼를 갖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 랙의 견해를 상기해야 한다. 그들이 낳은 새끼의 수가 적거나 또는 과다하든지 하면 그들이 최종적으로 키워 낼 수 있는 새끼의 수는 만일 그들이 꼭 맞는 수의 개씨를 낳아서 키울 때의 그 수보다 적어지고 말 것이다. 이 '꼭 맞는 수'라고 하는 것도 개체군의 과밀한 해에는 개체군이 희박한 해에 비해 보다 작은 수가 될 것이다. 과밀이 기근의 전조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는 본래부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만약 암놈이 기근을 예측하는 확실한 증거에 접할 경우 스스로 자기의 출생률을 감소시키는 것은 명백히 암놈의 이기적 이익에 걸맞은 것이다. 이 경고적인 징후에 이 방법으로 반응하지 않는 경쟁자들은 가령 그 암놈보다 많은 새끼를 낳았다고 해도 최종적으로 키워 낼 수 있는 새끼수는 그 암놈보다 적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최종적으로 윈-에드워즈와 거의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단 우리들은 그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진화론적 추리를 거쳐 거기에 도달한다.
밀도 조사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은 '현시 행동'의 문제도 쉽게 처리한다. 독자는 윈-에드줘즈의 다음과 같은 가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즉, 동물들은 모든 개체가 개체군의 밀도 조사를 쉽게 실행하여, 이에 따라서 자신의 출생률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큰 그룹을 이루고 일제히 과시를 한다고 한다. 실제로 현시적인 집합이 있다고 하는 직접적 증거는 없으나, 가령 그런 종의 증거가 있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은 당혹할 것인가? 걱정할 것은 못 된다. 찌르레기는 매우 많은 수가 한데서 잠을 잔다. 지금 가령 단지 겨울 동안의 과밀 상태가 봄에 산란 능력을 감퇴시킨다는 것뿐만이 아니고 또한 서로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이 산란 능력 감퇴의 직접적 원인이 됨을 알았다고 상정해 보자. 이 점을 증명하려면 찌르레기의 요란한 잠자리 음과 조용한 잠자리 음을 테이프에 녹음해 놓고 각각의 음을 들려준 찌르레기를 상호 비교하는 실험을 통해 전자의 음에 내놓았던 개체 쪽이 산란수가 적음을 제시하면 좋을 것이다. 정의에 따르면 이로 인해 찌르레기의 울음소리는 현시적인 과시의 하나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은 생쥐의 예를 든 것과 거의 같은 방법으로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동물은 미래를 예측한다. 유전자 풀 속에서 양육 능력 이상으로 가족을 확대시키는 유전자는 자동적으로 불리하게 되어 그 수가 감소한다는 가정하에서 논의를 시작하자. 따라서 허실없이 산란하려는 개체에게 주어진 일은 이기적인 개체로서 어미의 입장에서 본 한 둥지의 최적 알 수가 다가오는 번식기에 있어도 도대체 몇 개로 되느냐를 예측하는 것이다. 예측이라는 말은 제4장에서 말한 것 같은 특수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독자는 그것을 상기했으면 한다. 암놈은 대관절 어떻게 해서 한 둥지의 최적 할 수를 예측하는 것일까? 어떤 변수가 어미의 예측에 영향을 줄까? 우선 대부분의 종은 해마다 변화하지 않는 고정적인 예측을 세우고 있는 것 같다. 예컨대 북양가마우지의 한 둥지의 최적 알 수는 평균 한 개로 정해져 있다. 물론 고기가 특히 풍부한 해에는 일시적으로 두 개로 증가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북양가마우지에게 어떤 특정한 해가 어류가 많은 해로 되는지의 여부를 사전에 아는 방법이 없다고 하면 북양가마우지의 암놈들이 두 개의 산란으로 해서 가지고 있는 자원을 낭비하고 마는 위험을 취하는 것을 예상할 수 없다. 알 두 개를 낳게 되면 평균적인 해의 조건에서 그들의 번식 성적은 손해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찌르레기를 포함하여 상기와 다른 조건하에 있는 종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종에 있어는 봄에 특정한 먹이 자원의 생산이 양호하게 될는지 어떤지를 겨울 동안에 예측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가능할지도 모른다. 농촌 사람들 사이에는 예컨대 호랑가시나무 열매의 많고 적음이 봄날씨를 예측하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 등등 미래의 단서가 되는 많은 속담들이 있다. 어떤 특정한 늙은 아낙네의 이야기가 정확한지의 여부는 덮어놓고라도 논리적으로 존재 가능한 여지는 있다. 그렇다면 이름난 점쟁이가 자기의 이익이 되도록 한 둥지의 알 수를 해마다 조정하는 것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것이다. 호랑가시나무 열매가 과연 신뢰할 수 있는 예측 수단인지는 몰라도 생쥐의 경우와 같이 개체군 밀도가 좋은 예측 수단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많이 있다고 생각된다. 새끼를 낳고 먹이를 줘야 하는 봄에 같은 종의 경쟁자들과 먹이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찌르레기 암놈은 원칙적으로 알 수가 있다. 만약 겨울에 암놈이 같은 종 개체의 지역 밀도를 어떤 방법으로 추정할 수 있다면 이것은 봄이 되어 새끼를 위해 먹이를 확보하는 것이 얼마나 곤란할지를 예측하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겨울철에 개체 밀도가 현저히 높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산란수를 조금 감소시킨다는 것이 암놈의 이기적 견지에 맞는 신중한 대응책이 된다. 즉, 자기의 한 둥지의 최적 알 수에 대한 암놈의 추정치는 감소하게 된다.
Beau Geste 효과 개체가 실제로 자기 손에 의해 개체군의 밀도 추정을 근거로 하여 한둥지의 알 수를 감소시킨다는 성질을 나타내게 되면 즉시 다음과 같은 사태가 일어난다. 즉, 실제의 밀도가 어떻든 경쟁자에 대해서는 개체군이 굉장히 큰 것처럼 꾸미는 것이 개개의 이기적 개체에게는 유리하게 도는 것이다. 예컨대 찌르레기의 예에서, 가령 겨울 잠자리의 소란정도가 개체군의 크기를 추정하는 수단으로 되어 있다면 개개의 개체는 있는 힘을 다하여 소리를 크게 지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동물은 마치 동시에 몇 개의 개체가 거기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일이 있지나 않은가 하는 견해는 크렙스(J..R. Krebs)가 별도의 문제를 다루었을 때에 시사했던 것이다. 그는 프랑스 외인 부대의 일단이 이와 같은 전술을 쓰는 장면이 나오는 소설을 참조해 거기에 'Beau Geste 효과'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다. 찌르레기의 경우 이 행위의 목적은 주위 동료들이 그것에 속아서 그들의 한 둥지의 알 수를 진짜 최적치 이하로 감소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찌르레기의 그것처럼 이 목적을 잘 달성한다고 하면 그것은 당신의 이기적인 이익에 합당한다. 당신은 당신과 같은 유전자를 지니지 않은 개체를 감소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상의 고찰에서 나의 결론을 말하면 현시행동이라는 윈-에드워즈의 착상은 실제로 우수한 고찰 방법일지 모른다. 아마도 그의 이 견해는 그가 그것에 준 진화론적 설명이 오용된 점을 제외하면 시종 옳았을지도 모른다. 또 상기의 고찰에서 더 일반적인 결론을 끌어낸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그룹 선택 이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떠한 증거가 나타났다고 해도 랙의 가설은 그것을 유전자의 이기성에 의해 설명해 보이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장의 결론은 개개의 어미 동물이 가족 계획을 실행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출생률의 최적화인 것이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살아 남는 자기 새끼의 수를 최대화하려고 힘쓰고 있고, 이것을 위해서는 새끼의 수가 과다든 과소든 상관이 없다. 개체에게 과도한 수의 새끼를 가지도록 하는 유전자는 유전자 풀 속에 거처할 수 없다. 그런 종류의 유전자를 체내에 가진 새끼들은 성체가 될 때까지 살아 남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가족 크기의 양적인 고찰은 이상으로 매듭짓기로 하자. 다음에 다룰 것은 가족 내부의 이해 충돌 문제이다. 모친으로서 자기의 아이를 모두 공평히 대하는 것이 이익일까 손해일까. 자칫하면 모친은 특정한 아이를 편애하는 것은 아닌지. 가족과는 단일 협력 집단으로서 통일되어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가족에게까지도 이기주의나 속임수가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인지. 같은 가족 내의 전 구성원은 동일한 최적치의 달성을 향해 노력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간에는 무엇을 최적치로 할 것인가를 가지고 '의견의 불일치'가 있는 것일까. 다음 장에서는 이들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 보자. 배우자간에 이해 충돌이 있나 없으나 하는 문제도 이와 관련된 것인데, 그것에 관해서는 제9장으로 미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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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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舟中敵國(주중적국) 舟(배 주) 中(가운데 중) 敵(원수 적) 國(나라 국)
사기(史記) 손자오기(孫子吳起)열전의 이야기. 전국(戰國)시대, 위(魏)나라 장군인 오기(吳起)는 문후가 죽자 그의 아들인 무후(武侯)를 계속 섬기게 되었다. 어느 날, 무후가 서하(西河)에 배를 타고 가다 중간쯤에 이르자 뒤를 돌아보며 오기에게 이 산과 강의 험난한 조망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이것이야말로 우리 위나라의 보배로다. 라고 했다. 그러자 오기는 이처럼 대답하였다. 국가의 보배가 되는 것은 임금의 덕일뿐, 지형의 험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옛날 삼묘씨의 나라는 동정호(洞庭湖)의 왼쪽을 끼고 팽려호(彭 湖)를 오른쪽으로 끼고 있었으나, 임금이 덕의(德義)를 닦지 않아기 때문에 우왕(禹王)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임금의 덕에 있지 지형의 험난 함에 있는 것은 아니옵니다. 우리 임금께서 덕을 닦지 않으시면 이 배 안의 사람들도 모두 적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舟中之人盡爲敵國也).
舟中敵國이란 친했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이탈함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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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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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자서전. 시민의 불복종 - 간디 / 함석헌 역
제2편
12. 인도인과의 접촉을 찾음
그리스도교 교인들과의 접촉을 더 쓰기 전에 같은 시기에 있었던 다른 경험들을 말하여야 하겠다. 셰드 테브 하지 칸 무하마드는 다다 압둘라가 나탈에서 누리고 있는 지위를 프리토리아에서 누리고 있었다. 어떤 공중 운동도 그가 없이는 이끌어 나갈 수 없었다. 나는 첫주부터 그를 가까이하게 되었는데, 그에게 나는 프리토리아의 모든 인도인과 접촉해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거기에 사는 인도인들의 상태를 조사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내 일을 좀 도와달라고 했더니, 그는 쾌히 승낙을 해주었다. 나의 첫단계는 프리토리아에 있는 전 인도인의 모임을 열고, 그들에게 트란스발 안의 자기네의 상황이 어떤 것인가 하는 청사진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이 모임은 셰드 하지 무하마드 하지 주삽의 집에서 열렸는데 나는 그에게로 가는 소개장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는 주로 메만 장사꾼들이 출석했고 힌두교인도 간혹 있었다. 프리토리아에 살고 있는 힌두 교인의 수는 물론 매우 적었다. 이 모임에서 내가 행한 연설은 아마 내 일생이 첫번째 연설이라 해야 할 것이다. 내 연설이 주제는 사업에 있어서 진실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 관하여서였는데, 나는 거기에 대한 준비를 상당히 해가지고 갔다. 나는 언제나 장사꾼들이 장사에서는 진실을 지킬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그때도 그렇게는 생각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오늘날도 장사하는 친구 중에는 진실은 사업과는 같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의 말은 이렇다. 사업은 어디까지나 실제적인 일이고 진실은 종교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것을 종교와 같이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대로 한다면 순수한 진실은 사업에서는 문제삼을 게 못된다는 것이고 그것은 사업에 방해가 안되는 한에서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 연설을 통해서 그러한 견해를 강력히 반대했고, 사업인의 의무감을 불러일으켰다. 거기는 이중의 의미가 있었다. 외국에 와 있는 사람은 진실을 지켜야 하는 책임이 더욱 크다. 왜냐하면 몇 사람의 인도인의 행동이 수백만 동포의 생동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인도인의 습관이 주위에 있는 영국인과 비교할 때에 비위생적이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그 점에서 그들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또 힌두 교도니, 일슬람 교도니, 파르시 교도니, 그리스도 교인이니, 구자라트인이니, 마드라스인이니, 펀자브인, 신드인, 카치인, 수르트인 하는 따위의 차별을 철폐할 것을 강조했다. 결론으로 나는 거류 인도인이 당하는 고난에 관해 관계당국에 교섭하기 위하여 협의회를 조직할 것을 제의했고, 그것을 위하여는 내 시간과 노력을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제공하겠다고 했다.
나는 내가 청중에게 상당한 감명을 준 것을 알았다. 내 말에 뒤이어 토론이 열렸다. 어떤 이는 내게 사실을 제공해 주겠다고 했다. 나는 용기를 얻었다. 청중 가운데 영어를 아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 거기 살려면 영어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여가가 있는 사람은 영어를 배우라고 조언을 해주었고, 나이든 후에도 외국어는 배울 수 있다고, 실제로 그렇게 한 사람들의 예를 들어 말해 주기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영어 학습반이 조직된다면 내가 그것을 맡을 수 있으며 그렇지 않고 개인적으로 배우겠다면 가르쳐 줄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반은 결성되지 않았으나, 세 젊은이가 자기네 집에 와서 가르쳐 준다면 형편에 따라 배울 용의가 있다고 했다. 그 중 둘은 이슬람 교도였는데 한 사람은 이발사요, 한 사람은 사무원이었고, 또 한 사람은 힌두 교인이었는데 조그만 가게를 보는 사람이었다. 나는 모두 다 그 능력에 따라 가르쳐 주기로 했다. 내 교수 능력에 대해서는 별 걱정이 없었고, 학생이 싫증이 나면 났지 내가 나는 법은 없었다. 어떤 때는 내가 갔는데도 그들이 일에 잡혀 있는 때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못참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셋 다 영어를 착실히 배울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8개월을 하는 동안 상당한 진보를 했다. 둘은 보통 장부를 기입하고 상업상의 편지를 쓸 만큼은 되었다. 이발사의 욕심은 오는 손님을 대할 수 있는 정도 이상은 생각지 않았다. 그 공부를 한 결과로 두 사람은 상당한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실력을 얻었다.
나는 그 집회의 결과를 만족하게 생각했다. 내 기억으로는 그러한 모임을 매주, 또는 매월 한 번 갖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것은 비교적 정기적이라고 하리만큼 소집됐고, 거기서는 자유로운 의사 교환이 있었다. 그 결과 나는 이제 프리토리아에 내가 모르는 인도인이란 없게 되었고, 그 사정을 내가 소상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는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나는 또 프리토리아의 영국 주재관 제이콥스 드 웨트 씨와도 알게 되었다. 그는 인도인들을 동정해 주었으나 별 영향력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가능한 한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승낙을 했고 언제나 내가 원하기만 하면 나를 초대해 주었다. 나는 그 다음 철도당국과 교섭을 시작하여, 그들을 보고 지금 인도인들이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함으로써 당하고 있는 고통은, 그들의 법규 밑에서조차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거기에 대하여 나는 이러한 내용의 회답을 받았다. 즉, 적당한 복장을 갖춘 인도인에게는 1,2등 차표를 팔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개선책은 아니었다. 그 적당한 복장 을 결정하는 것은 역자의 의견에 달렸기 때문이다.
영국 주재관은 내게 인도인 문제를 다룬 신문들을 보여 주었다. 테브 셰드도 같은 신문들을 주었다. 나는 그 신문들을 읽고 오렌지 자유국*1에서 인도인들이 얼마나 잔혹하게 내몰려졌는지를 알았다. 한마디로 하면, 나는 프리토리아에 머무름으로 인하여서 트란스발과 오렌지 자유국 안에 있는 인도인들의 사회적, 경제적, 또는 정치적 상황을 깊이 연구 할 수가 있었다. 나는 이 연구가 미래에 있어서 나에게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공헌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왜냐하면 만일 그 소송사건이 연말 전에 해결이 된다면 연말 전에라도 귀국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그렇지 않았다.
*1. 남아프리카 연방의 한 주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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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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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10장 영웅의 등장
2. 아크리시오스 및 프로이토스
아크리시오스 및 프로이토스(Acrisius & Proetus)는 아르고스 왕 아바스와 왕비 아글라이아(만티네우스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다. 이들은 어미 태속을 떠나기 전부터 태격태격하였다고 한다. 왕이 죽자 아르골리스는 양분되어, 아크리시오스는 아르고스 위쪽을, 프로이토스는 티륜스를 통치하였는데 경계가 분명치 않아 걸핏하면 분쟁을 일으켰다. 일설에는 조카 다나에를 겁탈한-그녀 자신은 제우스라고 하지만-프로이토스는 쫓겨났다고 한다. 아크리시오스는 라케다이몬(스파르타)의 공주 에우퓨디케와 결혼해서 다나에라는 딸을 얻었다. 아들을 갖고자 신탁에 문의하니, 딸이 회임하여 거기에서 태어날 손자가 아크리시오스의 죽음을 가져올 것이라는 답이 나왔다. 몹시 당황한 아크리시오스는 청동탑 지하에 다나에를 연금시켜 철저히 감시하고 회임을 방지하였다. 그런데 보람없이 황금 소나기로 변신한 제우스가 천장 틈으로 침입, 다나에를 포옹하고 임신을 시켰다. 일설에는 프로이토스가 범인이라고도 하나 일반적으로 제우스와 사랑을 나눈 것이라고 되어 있다. 어쨌든 다나에는 아들을 낳았고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손자가 생긴 것을 안 아크리시오스는 대경질색, 그녀와 어린 손자 페르세우스를 나무 궤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러나 모자가 들어 있는 궤는 다행히 포리포스 해안에서 어부 딕튜스의 구조로 살아났다.
페르세우스는 커서 매우 드드러진 활약을 벌이며 명성을 크게 날리게 되고(페르세우스 항목 참조), 아크리시오스는 이 유명한 손자와의 만남을 꺼려 먼 테살리아 지방 라리사로 갔다. 마침 페르세우스도 이 지방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한참 운동경기가 열리고 있어 그도 자기 솜씨를 보이고자 원반경기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그가 경기 도중에 던진 원반이 세차게 불어닥친 돌풍에 그만 관중석의 한 노인의 머리를 맞혀 버렸다. 이 노인이 바로 페르세우스의 외조부인 아크리시오스로, 불행한 신탁이 결국 맞아떨어진 것이다. 페르세우스는 도시 교외에서 외조부를 장사지내고 아르고스로 떠났다. 한편 프로이토스는 펠로폰네소스를 떠나 소아시아 리시아의 왕 이오바테스 왕실로 피신하고 이 곳에서 공주 안테이아-시인들은 스테노보이아라 부른다-와 결혼하였다. 장인의 지원을 받아 다시 아르골리스에 와서 티륜스의 왕으로 복귀하였다. 이 곳에는 프로이토스를 위해 큐클로페스가 쌓았다는 거석 석벽이 남아 있다. 남편을 따라 티륜스에 온 왕비 스테노보이아는 왕실을 방문한 벨레로폰에게 연정을 품었다가 거절당하자 남편에게 반대로 참소, 풍파를 일으키기도 하였다(벨레로폰 항목 참조). 그녀는 슬하에 세 딸 프로스티데스와 아들 메가펜테스를 두었고 아들은 아비가 죽자 왕권을 계승하여 티륜스를 통치하였다. 세 딸은 과년하였을 때 헤라 여신을 경시 혹은 디오뉴소스제를 반대했다가 실성하여 자신들이 암송아지라는 망상에 빠져 온 펠로폰네소스를 헤매며 광란을 피웠는데 이를 멜람포스가 고쳐주었다.
3. 페르세우스
페르세우스(Perseus)는 제우스와 아르고스 왕 아크리시오스의 무남독녀 다나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어느 때 아크리시오스는 신전에서 기원을 올리는데, 앞으로 태어날 외손자에게 살해될 운명이라는 신탁을 받았다. 대경실색한 그는 딸을 지하 청동탑에 가두어 버렸다. 그런데 아름다운 다나에에게 마음이 끌린 제우스가 황금비로 변신하여 천장의 들창을 통해 들어가 관계를 하였다. 다나에는 아들 페르세우스를 낳고 비밀리에 키우던 중 아기 우는 소리로 발각당하고 말았다. 아크리시오스는 이들 모자를 나무 궤에 넣어 바다에 내버렸으나 다행히 외딴 섬 세리포스의 어부 딕튜스에게 발견되어 구조되었다. 그런데 이 섬을 지배하고 있던 딕튜스의 형 폴류덱테스가 다나에의 소문을 듣고 탐을 내었다. 이에 일단 그는 다나에를 보호하는 아들 페르세우스를 제거하고자, 만찬 때 선물을 바치게 하는 풍습을 들어 페르세우스에게 괴물 여자 메두사의 목을 가져다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 천만 위험한 원정에 나서게 된 페르세우스는 헤르메스와 아테나가 마련해 준 갑옷과 장비를 걸치고 그들의 조언에 따라 우선 그라이아이 세 자매를 찾아갔다. 이들 자매는 에뉴오, 페프레도, 디노라고 하는 노파들로 눈 하나를 셋이서 돌려가며 사용하고 치아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페르세우스는 눈과 치아를 가로채서 고르곤이 있는 곳을 자백받았다. 고르곤은 스테노, 에우류알레, 메두사라 하는 세 괴물 자매이다. 목은 용의 비늘로 덮여 있고 힘은 수퇘지처럼 셌으며 손은 청동으로 되었고 황금날개가 있어 날 수 있었다. 특히 메두사는 두 자매와는 달리 불사신이 아니었지만 대신 그 안광에 닿는 인간은 모두 돌로 변화시키는 괴력을 지닌 눈을 갖고 있었다. 페르세우스는 헤르메스가 빌려준 하데스의 헬멧을 쓰고 몸을 감춘 후 아테나가 준 방패로 메두사의 안광을 가리면서 다가가 메두사의 목을 잘라 등에 멘 포대에 넣었다. 이 때 메두사의 피에서 천마 페가소스가 솟아나왔다. 다른 두 괴물 자매가 공격해 왔으나 헬멧 때문에 보이지 않는데다 헤르메스의 날개달린 신을 신었기 때문에 재빨리 그곳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
귀로에 오른 페르세우스는 도중에 이집트 땅에서 바다 괴물에게 희생공양되려는 공주 안드로메다를 구하여 그녀의 부모인 케페우스 왕과 카시오페이아 왕비로부터 결혼 허락을 받고 데리고 돌아왔다. 섬에 도착하니 딕튜스 부인은 세상을 떠났고 자신의 어머니는 폭군 폴류덱테스의 재혼 강요를 거부하느라 신전에 피신중이었다. 페르세우스는 폭군을 찾아가 메두사의 안광으로 그 일당을 석화시키고 딕튜스를 왕으로 앉힌 후 이 섬을 떠났다. 딕튜스와 석별하고 난 후 아르고스로 향하던 페르세우스 일행은 도중에 라리사 왕국에서 벌어진 선왕의 장례 기념 운동경기에 참석하였다. 경기에 참가한 페르세우스는 원반경기에서 원반을 잘못 던져 관중석에 있던 한 사람을 맞혀 죽게 하였다. 이 사람이 바로 외조부인 아크리시오스였으니 옛 신탁이 현실화된 것이다. 메두사의 머리는 아테나에게 선사되고 그 후 제우스의 방패에 부착되었다. 페르세우스는 안드로메다와 행복한 삶을 보냈으며 그 사이 태어난 아들 엘렉트류온은 헤라클레스의 조부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여생을 마친 페르세우스는 아내와 장인.장모와 더불어 별자리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다. 맏아들 페르세스는 케페우스와 카시오페이아에게 맡겨 키웠는데 성장하여 큰 부족국가를 통치하였다. 페르시아는 그 이름을 붙인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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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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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2 - 류시화
빈 배
작은 배를 타고 그를 만나러 가곤 했다. 그는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에 지붕이 있는 배 한 척을 띄워놓고 그 위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모우니 사두, 곧 침묵의 성자였다. 여행자들이 갖다주는 음식으로 생활하면서 그는 그렇게 30년이 넘도록 침묵 수행중이었다. 배를 노 저어 그의 배로 가면 일렁이는 물결 위에 긴 머리를 한 그가 앉아 있었다. 그는 말없이 내 눈을 바라보았다. 고요한 시선이 내 영혼 구석구석 파고들어서 어떤 때는 똑바로 그를 쳐다보고 앉아 있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그렇게 연인처럼 몇 시간이나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어떤 사람의 눈을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보고 앉아 있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앉아 있으면 마치 큰 산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유유히 흘러가는 긴 강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두 영혼의 만남엔 말이 필요없음을 그는 가르쳐주었다. 침묵은 신과 대화하는 유일한 언어임을 그는 가르쳐주었다. 우리가 그렇게 앉아 있는 사이에도 강둑에선 아수라장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체 태우는 연기, 물을 공중에 흩뿌리며 요가 목욕을 하는 사람, 뭘 사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 집단으로 몰려와 강물에 뛰어드는 순례자들,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관광객들.
모우니 사두가 탄 배는 그 모든 소음을 초월해 있었다. 그의 눈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이 나기도 하고, 춤을 추고 싶기도 하고, 나 자신이 물거품이 되어 아득히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인도에 와서 여러 명상법을 배우러 돌아다녔지만 그의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명상에 빠져드는 것을 경험했다. 인도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누군가를 만나면 오래도록 그 사람의 눈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침묵하는 모우니 사두에게서 전염된 것이다. 이듬해 나는 다시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을 찾아갔다. 모우니 사두가 아직도 묵언 수행 중인 채로 배 위에서 살고 있었다. 서늘한 눈빛도 여전한 채로, 나는 또다시 그의 눈을 바라보며 몇 시간씩 앉아 있곤 했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 네팔을 거쳐 다시 바라나시로 갔을 때는 사두는 떠나고 없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강 위에 빈 배만이 떠 있었다. 나는 그 빈 배로 가서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호텔로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그 모우니 사두는 사실은 어디로도 가지 않았다. 그는 내 안에 그대로 살아 있다. 지금도 나는 명상을 하려고 눈을 감으면 지붕이 달린 작은 거룻배 위에서 그 모우니 사두와 함께 마주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 하루 일을 마치면 나는 그의 배를 타고서 그와 함께 저 먼 세계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곤 한다. 그의 배는 산과 지붕들을 넘기도 하고, 우주 공간을 날아 외계로도 넘나든다. 신나지 않은가! 나는 그와 함께 내 안과 밖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많은 스승들이 내게 있었다. 그러나 말 한마디 없이 가장 중요한 것, '침묵'을 가르쳐준 스승은 그 모우니 사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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