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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36호
2012.12.17 (음11.05)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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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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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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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를 낚으러 가는 노인의 가슴 속엔 언제나 어린 소년이 들어 있다. - J.콜더 조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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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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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주! 말지 말자.
바야흐로 송년회의 시절, 떠도는 숫자가 있다. ‘112’와 ‘119’이다. ‘술은 1종류로, 1차로 끝내며, 2시간 넘지 않게 마신다(밤 9시 전에 마친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술은 아예 마시지 않고 공연이나 영화를 보며 한해를 마무리하는 ‘문화 송년회’를 하는 모임이 꽤 많아졌지만, 맨송맨송한 자리는 왠지 허전하다며 ‘술 권하는 사회’를 좇는 세력은 여전하다. 웬만한 술자리에 빠지지 않는 게 폭탄주이다. 우리나라에서 폭탄주는 1983년 강원도의 군, 검찰, 경찰 등의 지역 기관장 모임에서 처음 만들어 마셨고, 당시 춘천지검장이던 박아무개가 널리 퍼뜨렸다고 한다.(위키백과)
1986년 이맘때 언론 매체에 처음 등장한 폭탄주는 ‘퇴폐풍조’의 하나로 꼽혔고(ㄷ일보), ‘속칭 폭탄주’로 다루어질 만큼 제도권 밖의 표현이었다.(ㅇ통신) ‘맥주가 담긴 잔에 양주를 따른 잔을 넣어서 마시는 술’인 폭탄주는 술 따르는 잔을 거꾸로 하는 ‘수소폭탄주’에 이어 ‘소폭’(소주+맥주)이 대중화된 세상이 되었다. 폭탄주는 술자리의 역할도 분화시켰다. ‘제조사’가 나왔고, ‘대량제조’가 필요한 곳에는 ‘제조창’도 등장한다. 폭탄주 ‘제조법’의 차이는 여럿이지만 대개 ‘마는 방법’에서 비롯한다.
폭탄주를 만드는 일은 화합물인 알코올을 다루는 것이니 ‘조제’(여러 가지를 적절히 조합하여 약을 지음)라 하는 게 ‘제조’(공장에서 큰 규모로 물건을 만듦/ 원료에 인공을 가하여 정교한 제품을 만듦)보다 원뜻에 어울리는 듯하다. ‘(폭탄주를) 말다’는 표현은 내게 여전히 낯설다. 언어 직관이 ‘밥을(국수를) 말다’처럼 ‘건더기를 물이나 국물에 넣는 것’을 ‘말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술에 술을 섞는 행위’는 ‘섞다, 타다, 배합하다’인 것이다. ‘담그다’, ‘빚다’를 쓰는 것도 괜찮겠다. ‘(폭탄주) 한잔 빚어(담가) 드릴까요’ 하면, 자칫 거칠어질 수 있는 술판이 예스럽게 다듬어질지 모르니 말이다. 그 덕에 추억까지 빚어낸다면 금상첨화이고!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우리말바루기] 상봉, 조우, 해후
아끼는 이들이 오랜 이별 뒤에 만나는 장면은 언제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남북 이산 가족이 만나는 기쁨은 그간 몇 차례 있었지만 북한의 도발로 더 이상 기회가 이어지지 못했다. 최근 강경 일변도였던 북한이 다시 대화 국면으로 돌아섰다. 위장 평화 공세일지라도 이산의 아픔을 생각하면 가족 상봉 등에 합의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만남을 뜻하는 단어 중 자주 쓰는데도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지나가기 쉬운 상봉(相逢), 조우(遭遇), 해후(邂逅) 등에 대해 알아보자. 상봉은 ‘서로 만남’이란 뜻을 가지고 있어 셋 중 가장 폭넓게 쓸 수 있는 말이다. “이산 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타향에서 고향 친구를 상봉했다” “그리던 임과 상봉해 회포를 풀 날은 언제일까”처럼 쓸 수 있다.
조우는 ‘우연히 맞닥뜨리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정찰 중 적과 조우해 전투가 벌어졌다”처럼 쓸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10년 만에 반가운 조우를 했다”처럼 쓰는 것은 잘못이다. 이미 ‘내’가 온다는 것을 알고 달려온 것이어서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해후를 쓸 수 있다. ‘해후’는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뜻밖에 다시 만남’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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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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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정호승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빗자루로 쓸어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구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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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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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2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1. 꿈을 이루기 위한 스프
'난 할 수 없어'의 장례식
여교사 도나 선생님이 맡은 초등학교 4학년 교실은 내가 과거에 봐 온 다른 교실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학생들은 여섯 명씩 다섯 줄로 앉아 있었으며, 학생들 맨 앞에는 교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교실 뒷벽엔 학생들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전형적인 초등학교 교실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처음 그 교실에 들어갔을 때 뭔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교실 전체에서 어떤 흥분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도나 선생님은 정년 퇴직이 두 해밖에 남지 않은 미시간 시골 학교의 베테랑 교사였다. 또한 선생님은 내가 만들어 후원하는 전국 교직원 연수 프로그램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의 주목적은 학생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고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도록 교사들에게 새로 운 교육 방법을 일깨우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도나 선생님은 연수 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해서 교사들이 프로그램의 개념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 일을 맡았다. 그리고 내가 맡은 일은 연수에 참가한 교사들의 교실을 직접 방문해 교육 현장에서 그것이 제대로 실천되도록 격려하는 일이었다. 도나 선생님의 교실로 들어간 나는 교실 뒤켠의 빈 의자에 앉아 말없이 수업을 지켜보았다. 학생들 모두 무슨 일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노트를 한 장 찢어서 그 위에다 뭔가 자신의 생각을 적어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옆에 앉아 있는 열한 살짜리 여학생의 책상을 넘겨다 보니'난 할 수 없어'라는 제목의 글로 종이를 메워 가고 있었다. "난 축구공을 멀리까지 찰 수 없어." "난 세 자리 숫자 이상은 나눗셈을 할 수 없어." "난 데비가 날 좋아하도록 만들 수가 없어." 그 여학생은 그런 식으로 벌써 절반을 써내려갔으며, 그만 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학생은 아주 진지하게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난 천천히 책상들 사이를 지나가며 다른 학생들의 종이를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한 줄씩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난 팔굽혀펴기를 열 번 이상 할 수 없어." "난 좌익수 담장 너머로 홈런을 날릴 수 없어." "난 아무리 해도 쿠키를 하나만 먹을 수가 없어." 학생들이 이런 작문을 하고 있는 것에 나는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 교사인 도나 선생님 은 뭘 하고 있나 살펴보기로 했다. 교탁으로 다가갔더니 선생님 역시 부지런히 종이 위에 뭔가를 쓰고 있었다. 난 방해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난 존의 엄마를 교사와의 면담 시간에 참석하도록 만들 수가 없어." "난 아무리 해도 내 딸이 차에 기름을 채워 놓도록 만들 수가 없어." "난 알란이 주먹 대신 말을 사용하도록 할 수가 없어." 도대체 왜 교사와 학생들이 '난 할 수 있어'라는 더 긍정적인 문장 대신 그렇게 부정적인 문 장들에 매달려 있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나는 잠자코 내 자리로 돌아가 관찰을 계속했다. 학생들 은 10분 정도를 더 써내려갔다. 대부분 종이 한 장을 가득 채웠으며, 뒷장까지 쓰기 시작한 학생 도 있었다. 이윽고 도나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말했다. "자, 지금 쓰고 있는 문장을 끝마치고 새로운 건 시작하지 말아요."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종이를 반으로 접어 앞으로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학생들은 한 명씩 앞으로 걸어나가 자신들이 쓴 '난 할 수 없어'목록을 교탁 위에 놓인 빈 신발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학생들이 모두 용지를 제출하자 도나 선생님은 자신의 것도 그 안에 넣었다. 그러고는 상자 뚜 껑을 닫은 다음 그것을 팔에 끼고서 교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학생들이 교사를 따라 복도로 나갔다. 나도 학생들 뒤를 따라갔다. 복도 중간쯤 갔을 때 행렬이 멈췄다. 선생님은 관리실 안으로 들어가더니 삽 하나를 들고 나왔 다. 한 손에는 삽, 다른 한 손에는 신발 상자를 들고 학생들과 함께 운동장 맨 구석으로 걸어갔 다. 거기서 그들은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난 할 수 없어'를 땅 속에 파묻으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땅을 다 파는 데는 30분이 넘게 걸렸다. 학생들 모두가 돌아가며 한 삽씩 팠기 때문이었다. 구멍이 일 미터 깊이 쯤 됐을 때 삽질이 끝났다. 마침내 '난 할 수 없어'의 상자가 구멍 밑바닥에 놓이고 서둘러 흙 에 덮였다. 열한 살에서 열두 살 사이의 서른한 명의 학생 전부가 새로 만든 무덤 주위에 모였다. 이제 각자가 적어도 한 페이지에 걸쳐 쓴 '난 할 수 없어'를 한꺼번에 신발 상자 안에 넣고 1미터 깊 이의 땅 속에 파묻어 버린 것이다. 그들의 담임 교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때 도나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다 같이 손을 잡고 고개를 숙입시다." 학생들이 따라했다. 다들 무덤 주위에 둥근 원을 그리고 서서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고 개를 숙이고서 기다렸다. 선생님이 장례식 때처럼 조문을 읽어 내려갔다.
"친구들이여, 오늘 우리는'난 할 수 없어'를 추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가 지상에서 우리와 함께 있을 때, 그는 모든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에게보다 더 많이 영향을 주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의 이름은 모든 공공 장소에서 자주 입에 올려졌습니다. 학교와 시청에서, 주정부 건물 안에서, 심지어 백악관에서조차 곧잘 그의 이름이 거론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난 할 수 없어'에게 마지막 안식처를 제공했으며, 비석까지 세울 것입니다. 그는 떠나갔지만, 그의 형제자매인 '난 할 수 있어'와 '난 해낼 거야', 그리고 '난 당장 할거야'는 우리 곁에 살아 있습니다. 이들은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아직은 그 친구만큼 강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이들도 언젠가는 세상에 더 큰 발자취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난 할 수 없어'여, 편안히 잠드소서.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가 없는 멋진 인생을 살아가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아멘."
도나 선생님의 장례기도를 들으면서 나는 이 학생들이 평생토록 이 날을 잊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작은 행사는 인생에 대한 대단히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학생들의 무의식 속에 깊이 새겨져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경험이었다. 학생들은 '난 할 수 없어'의 목록을 쓰고, 그것을 땅 속에 파묻은 뒤, 담임 교사의 조사를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교사는 큰 역할을 한 것이다. 하지만 도나 선생님은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장례식을 마친 뒤 선생님은 학생들을 데리고 교실로 돌아갔다. 그들은'난 할 수 없어'가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과자와 팝콘과 과일 주스를 나누며 조촐한 축하 행사를 벌였다. 축하 의식 도중에 선생님은 두꺼운 모조지를 오려 커다란 비석을 만들었다. 비석 맨 위에'난 할 수 없어'라고 쓰고, 그 밑에 '여기 편히 잠들다'라고 썼다. 그리고 맨 아래에다 그날의 날짜를 적었다. 그 해가 끝날 때까지 모조지로 만든 그 비석이 도나 선생님의 교실에 항상 걸려 있었다. 한 학생이 깜박 잊고"전 할 수 없어요."라고 말할 때마다 선생님은 말없이 '여기 편히 잠들다'를 가리켜 보였다. 그러면 그 학생은 '난 할 수 없어'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신이 한 말 을 정정했다.
난 도나 선생님의 학생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결코 잊을 수 없는 교훈 을 배웠다. 여러 해가 지난 지금, 누군가 "난 할 수 없어."하고 말할 때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의 그 장례식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다. 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날 이후로 '난 할 수 없어'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치크 무어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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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과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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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인 유전자 - 리처드 도킨스
제3장 - 불멸의 코일
유전자는 개체의 특성을 정한다
유전자는 어느 정도의 복잡한 상호 의존성을 갖는데도 도대체 왜 '유전자'라는 말을 쓰느냐고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유전자 복합체'와 같은 집합 명사를 쓰지 않을까? 과연 그것은 많은 목적으로 보아 좋은 생각이다. 그러나 또 다른 견해로 보면 이 유전자 복합체란 것이 불연속인 자기 복제자, 즉 유전자로 나뉘었다고 생각하기에는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성이라고 하는 현상 때문이다. 유성 생식에는 유전자를 섞어 붙이는 작용이 있다. 이것은 개개의 몸이 모두 유전자의 단명한 조합을 위한 임시적 매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하나의 개체에 머물고 있는 유전자의 조합은 단명하지만 유전자 자체는 매우 오래 살아 남는 잠재력이 있다. 그것들이 밟는 길은 끊임없이 만나고 떨어지면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 간다. 한 개의 유전자는 몇 세대라도 개체의 몸을 통하여 살아가는 단위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이것이 이 장에서 논하는 중심 과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매우 존경하는 몇 사람의 동료가 완강히 동의를 거절하는 점이기도 하므로 나의 설명은 다소 지겹게 생각될 것이나 용서하기 바란다. 우선 성의 실태를 간단히 설명해야 하겠다.
인간 설계도
나는 인간의 몸을 만들기 위한 설계도가 46권 속에 똑똑히 그려져 있다고 했다. 이 말은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다. 사실은 다소 기묘하다. 46개의 염색체는 23쌍의 염색체로 이루어져 있다. 즉, 모든 세포의 핵 속에 정리되어 있는 것은 23권의 설계도 두 세트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들을 1a 권과 1b 권, 2a 권과 2b 권...23a 권과 23b 권으로 하자. 물론 어떤 원이나 어떤 페이지에 어느 번호를 매기는가는 전혀 임의적이다. 우리는 양친으로부터 각기 한 세트씩의 염색체를 받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양친의 정소와 난소 안에서 조립된 것이다. 예컨대 1a 권, 2a 권, 3a 권...은 부친으로부터 받은 것이고 1b 권, 2b 권, 3b 권...은 모친으로부터 온 것이다. 실제로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지만 논리상으로는 어떤 세포의 46개의 염색체를 현미경으로 보아 부친에서 유래하는 23개와 모친에서 유래하는 23개를 분별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 쌍으로 된 염색체는 서로 물리적으로 붙어서 전생애를 지낼 수도 없고 서로 가까이 지낼 수도 없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짝지어진'것일까? 그것은 부친 기원의 각 권이 모친 기원의 특정한 권과 페이지를 바꿔 넣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짝지어진' 상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가령 13a권의 6페이지와 13b권의 6페이지는 둘 모두 눈의 색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한편에는 '청색'이라고 씌어지고 또 한편에는 '갈색'이라고 씌어 있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두 개의 바꿔치기가 가능한 페이지에 같은 것이 씌어져 있는 경우도 있으나 눈 색깔의 예와 같이 틀릴 수도 있다. 그것들이 모순된 '추천'을 할 때 몸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은 다양하다. 어떤 경우에는 한쪽의 표시가 다른 쪽의 표시를 이긴다.
눈 색깔이 그 예이다. 실제로 갈색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푸른 눈을 만들기 위한 지령이 무시되어 있는 것이다(그러나 푸른 눈을 만드는 지령이 자손에게 전해지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무시되는 유전자를 '열성 유전자'라고 한다. 열성 유전자의 반대는 '우성 유전자'이다. 갈색의 눈을 만드는 유전자는 청색 눈을 만드는 유전자에 대해 우세하다. 대응하는 페이지의 두 개의 사본이 일치하여 푸른 눈을 추천할 경우에만 푸른 눈이 되는 것이다. 더 일반적인 경우 상대하는 유전자가 동일하지 않을 때에 그 결과는 어떤 종류의 타협이 된다. 즉, 몸은 중간 형태의 설계가 되든가 또는 어떤 쪽과도 전혀 다른 것이 되는 것이다. 갈색 눈의 유전자와 푸른 눈의 유전자와 같이 두 개의 유전자가 염색체상의 동일 위치에서 경쟁자일 경우 그것들을 서로의 '대립 유전자'라고 부른다. 우리의 목적을 위하여 대립 유전자라는 말을 경쟁자라는 말과 동의어라고 가정하자. 건축가의 설계도의 권을 루스 리프(loose leaf)식 바인더로 여기고 페이지를 분리 교환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서 생각해 보자. 매 13권에는 6페이지가 있는데 5페이지와 7페이지 사이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는 6페이지가 몇 종류 있다. 어떤 것은 '푸른 눈'을 표시하고 있고 어떤 것은 '갈색 눈'을 나타내고 있다. 또 개체군 전체에는 녹색 등 다른 색을 나타내는 것도 있을지 모른다. 아마도 개체군 전체에 흩어져 있는 13번째 염색체상의 6페이지에 위치하는 대립 유전자는 대여섯 개 정도가 있음에 틀림없다. 어떤 사람이라도 13권의 염색체는 두 개 이상을 갖지 못한다. 따라서 한 사람이 6페이지의 부위에 갖는 대립 유전자는 최대 2개이다. 즉, 푸른 눈의 사람처럼 같은 대립 유전자의 사본을 갖고 있든가, 또는 개체군 전체에 이용되고 있는 대여섯 개 중에서 뽑힌 어떤 것이든 두 개의 대립 유전자를 갖고 있다.
윤전자 풀
물론 개체군 전체로써 이용되는 유전자 풀(pool) 속을 스스로 나가서 유전자를 선택해 낼 수는 없다. 어떤 시점에서도 모든 유전자는 개개의 생존 기계 속에 포함되어 있다. 유전자는 수정시에 우리에게 나누어지는 것으로서 이에 관해서는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개체군의 유전자는 일반적으로 유전자 풀로 생각되는 성격의 것이다. 이 말은 유전학자가 사용하는 학술 용어이다. 유성 생식은 주의 깊게 조직된 방법에 따르기는 하나 유전자를 서로 섞어 붙이기 때문에 유전자 풀이라는 것은 좋은 개념이다. 특히 페이지나 페이지의 뭉치를 루스 리프 바인더로부터 풀었다 바꾸어 넣었다 하는 것 같은 일이 실제로 행하여지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곧 기술하겠다. 앞에서 말한 바대로 한 개의 세포가 두 개로 갈라지는 정상적인 세포 분열에 있어 그 각각의 세포는 46개의 모든 염색체 사본을 전부 받는다. 이 정상적인 세포 분열을 '체세포 분열'이라 한다. 그런데 이외에도 '감수 분열'이라고 하는 다른 형태의 세포 분열이 있다. 이것은 생식 세포, 즉 난자와 정자를 만들 때에만 일어나는 세포 분열이다. 난자와 정자는 염색체를 46개가 아니 23개밖에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의 세포 중에서 유일한 존재이다. 물론 이 수는 46개의 꼭 절반이며, 이것은 수정에 의하여 융합하여 새로운 개체를 만들기에 안성맞춤인 수이다. 감수 분열은 정소와 난소에서만 일어나는 특수한 형태의 세포 분열이다. 거기에서는 두 세트의 46개의 염색체를 갖는 1개 세포가 분열하여 한 세트에 23개의 염색체를 갖는 생식 세포가 되는 것이다(설명에는 인간의 경우의 수를 쓰기로 한다).
정자-23개의 염색체
23개의 염색체를 가진 정자는 정소 내의 46개의 염색체를 갖는 보통의 세포가 감수 분열하여 만들어진다. 한 정자 세포에 어떤 23개의 염색체가 들어갔을까? 매우 중요한 것은, 46개 중에서 무조건 아무거나 23개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13권의 사본이 둘이 있어 17권의 사본이 하나도 없게 되는 상태로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론상은 어떤 개체가 그 정자 하나에, 이를테면 모친 기원의 염색체만을, 즉 1b 권, 2b 권, 3b 권, ...23b 권을 주는 것이 가능하다. 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경우, 자식은 그 유전자의 절반을 친할머니로부터 계승하여 친할아버지로부터는 아무것도 계승하지 않은 셈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와 같은 전체 염색체의 통일된 배분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은 더 복잡하다. 권(염색체)은 루스 리프 바인더라고 생각된다고 한 것을 다시 생각해 보고 싶다. 어떻게 되는가 하면 정자형성 중에서 단일 페이지 또는 여러 페이지가 벗어나 짝이 되는 권의 그것에 맞는 페이지와 교환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정자는 1a 권의 처음 65 페이지와 1b 권의 66 페이지부터 끝까지를 취하여 제 1권을 만드는 수가 있다. 이 정자 세포의 다른 22권도 같은 식으로 만들어진다. 따라서 가령 어떤 개체의 모든 정자 세포가 같은 세트의 46개의 염색체의 작은 조각에서 23개의 염색체를 모았다고 해도 그 정자 세포는 모두 유일한 것이다 난자는 난소 내에서 같은 식으로 만들어지고 역시 어떤 것이든 유일하다.
교차
이 혼합 메커니즘은 어느 정도 잘 알려져 있다. 정자(또는 난자) 형성 중에 각 부친쪽의 일부 염색체는 물리적으로 떨어져서 모친쪽의 염색체에 있는해당되는 부분과 바뀐다(전술한 바대로, 여기서 부친쪽, 모친쪽 이라고 하는 것은 그 정자를 만드는개체의 양친에서 유래하는 염색체라는 것이다). 염색체의 일부를 교환하는 이 과정을 '교차(crossing over)'라고 한다. 이것은 이 책의 논의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하다. 교차라는 것이 행해지는 이상, 당신이 현미경을 가지고 자기의 정자(당신이 여자라면 난자)의 염색체를 본다고 해도 당신의 부친으로부터 온 염색체와 모친으로부터 온 염색체를 구별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이것은 보통의 체네포의 경우와는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한 개의 정자내에 있는 염색체는 어떤 것이든 모친쪽의 유전자와 부친쪽의 유전자의 모자이크로 된 잡종인 것이다.
페이지와 유전자의 비유는 여기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루스 리프 바인더에서는 한 페이지 전체가 삽입되거나 삭제되거나 교환되거나 하지만 한 페이지의 일부분이 삭제되거나 교환되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렇지만 유전자 복합체는 유클레오티드의 문자를 연결한 긴 실이며 페이지에 따로따로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지 않다. 확실히 '단백질 사슬메시지의 종결과 개시'에는 단백질 메시지와 같은 4분자의 알파벳으로 쓰인 특별한 심벌이 있다. 이들 2개의 구두점 사이에는 1개의 단백질을 만들기 위한 암호화된 지령이 있다. 원한다면 단일 유전자란 개시와 종결의 심벌 사이에 1개의 단백질 사슬을 암호로 나타내고 있는 일련의 뉴클레오티드 문자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시스트론(cistron)'이란 말은 이와 같이 정의되는 단위로서 쓰여지고 있고, 일부의 사람들은 유전자라는 말과 시스트론이란 말을 같은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교차는 시스트론간의 간격을 지키지 않는다. 시스트론 사이와 마찬가지로 시스트론 내에서도 쪼개지는 수가 있다. 그것은 마치 설계도가 별개의 페이지에 씌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46권의 두루마리 테이프에 씌어져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시스트론의 길이는 일정치 않다. 어떤 시스트론이 어디에서 끈나고 다음의 시스트론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를 아는 유일한 방법은 테이프상의 심벌을 읽고 '메시지의 새기와 종결'의 테이프상의 심벌을 읽고 '메시지의 개시와 종결'의 심벌을 찾는 것이다. 교차는 상대하는 모친쪽의 테이프와 부친쪽의 테이프를 잡아 들고, 그것들에게 쓰이어진 것과는 무관하게 대응하는 부분을 잘라서 서로 교환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 책의 제목에 쓴 유전자라는 말은 단일 시스트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좀더 미묘한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있다. 나의 정의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하며, 또한 유전자에 대하여 모든 사람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정의는 없다. 가령 있다손 치더라도 신성하여 범하기 어려운 정의라는 것은 없다. 어떤 말을 뚜렷이 의심의 여지없이 정의한 다면 자기의 목적에 맞추어 마음대로 정의할 수 있다. 내가 사용하고 싶어하는 것은 윌리엄스의 정의이다. 그에 의하면 유전자는 자연 선택의 단위로서 역할할 수 있을 만큼 긴 세대에 걸쳐 지속되는 염색체 물질의 일부로 정의된다. 앞 장에서 사용한 말로 표현하면 유전자는 복제 충실도가 뛰어난 자기 복제자라고 할 수 있다. 복제 충실도라는 것은 복제형의 수명을 나타내는 별도의 표현이다. 나는 이것을 단순히 수명이라고 하기로 한다. 이 정의는 어느 정도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유전 단위
어떤 정의에 있어서도 유전자가 염색체의 일부라는 것은 틀림없다. 문제는 어느 정도 크기의 일부인가, 즉 테이프의 어느 정도의 부분인 가라는 것이다. 테이프상의 인접한 암호 문자의 서열을 고려해 보자. 이 암호의 서열을 유전 단위라 부르기로 하자. 그것은 한 시스트론 내의 겨우 10문자의 서열일지도 모르고, 8개의 시스트론의 서열일지도 모른다. 또는 시스트론의 중간쯤에서 시작과 마무리를 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그것은 다른 유전 잔위와 중복되는 수도 있을지 모른다. 작은 단위를 몇 개라도 함유할 수도 있을 것이고, 큰 단위의 일부를 이룰 수도 있겠다. 현재의 논의에는 길이가 어떻든 상관없다. 이것이 우리가 유전 단위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염색체상의 일정한 구간의 일이고, 물리적으로 나머지 염색체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에 착안한다. 유전 단위는 짧으면 짧을수록 몇 세대에 이르기까지도 장생하는 것 같다. 특히 교차에 의하여 쪼개지는 일이 적다고 생각된다. 감수 분열에 의하여 정자나 난자가 만들어질 때마다 한 염색체에 대하여 평균 1회 교차가 일어나 그 교차가 염의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염색체의 길이의 절반의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염색체의 길이의 절반의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염색체의 길이의 절반에 이르는 대단히 큰 유전 단위를 생각하면, 그 단위가 1회의 감수 분에 이르는 대단히 큰 유전 단위를 생각하면, 그 단위가 1회의 감수 분열에서 쪼개지는 확률은 50%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유전 단위가 염색체 길이의 1%밖에 없으면 1회의 감수 분열에서 절단되는 확률이 1%밖에 없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것은 그 단위가 개체의 자손 중에 몇 세대를 걸쳐서라도 살아 남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단일 시스트론은 염색체 길이의 1%보다 휠씬 작은 것 같다. 인접한 몇 개의 시스트론까지도 교차에 의해 해체되기까지 몇 세대에 걸쳐 살아 나가는 것으로 생각된다.
유전자의 평균 수명
유전 단위의 평균 수명은 편의상 세대수로 나타낼 수 있고, 다시금 그것을 연수로 환산할 수가 있다. 만약 하나의 염색체 전체를 유전 단위라고 가정하면 그 생활사는 1세대밖에 이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부친으로부터 이어받은 8a번 염색체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당신이 수태되기 직전에 당신 부친의 정소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세계의 모든 역사를 통하여 그 이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감수분열의 혼합 과정에 의해 생겼다. 즉, 당신의 부친쪽의 조부모로부터 온 염색체 절편이 함께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모두 특정의 정자 내에 배치되어 있고, 유일한 존재였다. 그 정자는 막대한 수에 달하는 아주 작은 배의 대선단 중의 한 척이고 그들 배는 일제히 당신의 모친 속으로 노를 저어 들어갔다. 이 특별한 정자는(당신이 이란성 쌍생아가 아니면) 당신 모친의 난자 중 하나에 도달했으며, 선단 유일의 정자였다. 이것이 당신의 존재 이유이다.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유전 단위, 즉 당신의 8a번 염색체는 나머지 모든 유전 물질과 같이 스스로 복제를 시작했다. 지금 그것은 짝을 갖춘 형태로 당신의 몸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당신이 자식을 만드는 차례가 되면 이 염색체는 당신이 난자(또는 정자)를 만들 때에 파괴된다. 그 일부는 당신의 모친쪽의 8b번 염색체의 일부와 교환될 것이다. 모든 생식 세포에서 새로운 8번 염색체가 만들어진다. 그것은 헌 염색체보다 '좋을'지도 모르고 '나쁠'지도 모르나, 매우 이루어지기 어려운 우연의 일치가 없는 한 전혀 다르고 아주 유일한 것이다. 한 개의 염색체 수명은 한 세대인 것이다.
더욱 작은 유전 단위, 예컨대 당신의 8a번 염색체의 1/100의 길이의 유전 단위 수명은 어떨까? 이 단위도 역시 당신의 부친으로부터 온 것인데 그것은 당신의 부친 속에서 비로소 모아진 것은 아니다. 전술한 추론에 의하면 당신의 부친의 조모로부터 온 것으로 하자. 조모가 자신의 양친의 한 사람으로부터 그 단위를 전부 받아들일 확률도 역시 99%이다. 작은 유전 단위의 선조를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은 그 최초의 창조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느 단계에서 당신의 조상의 한 사람의 정소 또는 난소 내에서 비로소 만들어졌음에 틀림없다. 나는 '만들어진다'라는 말을 어느 정도 특수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거듭 말해 두겠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유전 단위를 구성하고 있는 더 작은 소단위는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유전 단위가 어떤 시점에서 생겨났다고 하는 것은 소단위의 배치(이것에 의하여 단위가 규정된다)가 그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만들어진 시기는 예컨대 당신의 조부모의 세대 정도로 아주 최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극히 작은 단위를 생각하면 그것은 처음에 아주 먼 조상 중 아마도 원숭이와 닮은 유인원에서 조립되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당신 속의 작은 유전 단위는 먼 미래까지 살아나가 먼 자손에게 완전하게 전해질지도 모른다
어떤 개체의 자손은 하나의 계통을 밟는 것이 아니라 분지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의 8a번 염색체의 그 짧은 일부분을 '만들어낸' 것이 당신의 어느 선조이든 그 사람에게는 다분히 당신 외에 많은 다른 자손이 있을 것이다. 당신의 유전 단위의 하나는 당신의 6촌 형제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내게 있을지도 모르고 수상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신이 키우는 개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옛날로 되돌아가 보면 우리는 다 같은 조상에 도달하기 때문에, 또 동일 한 작은 단위가 우연히 독립적으로 몇 번이고 긁어모아지는 수도 있을 것이다. 유전 단위가 작으면 작을수록 그것이 다른 개체에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즉, 사본의 형태로 이 세상에 몇 번이고 나타날 확률이 높다.
돌연변이
전부터 존재하던 소단위가 교차에 의해 모이는 기회는 새 유전 단위가 만들어지는 보통의 방법이다. 또 하나의 방법-그것은 수가 적으나 진화상 매우 중요하다-은 '점 돌연변이(point mutation)'라고 한다. 점 돌연변이는 어떤 책 속의 하나의 문자의 오식에 의한 잘못이다. 그것은 드물지만 유전 단위가 길면 길수록 그 길이의 어디엔가 돌연변이에 의해 변할 가능성이 크다. 또 다른 중요하고도 드문 종류의 과실 또는 돌연변이를 '역위'라고 한다. 염색체의 일부가 양단으로 잘려서 거꾸로 되어 역의 위치에서 다시 붙는 것이다. 앞에서의 비유로 말하면 이 경우 페이지를 다시 세어 볼 필요가 있게 된다. 때로는 염색체의 일부가 단순히 역으로 되어 있을 뿐만이 아니라 염색체의 전혀 다른 부분에 붙은 경우도 있고 아주 다른 염색체에 붙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어떤 권에서 다른 권으로 페이지의 다발을 옮기는 것이 된다. 보통은 유해한 이런 종류의 과오가 중요한 것은 시시때때로 함께 작용하는 유전 물질 조각에 긴밀한 '연관'을 불러일으키는 수가 있다. 양쪽이 존재하는 때만이 유효하게 작용하는 두 개의 시스트론(이것들은 어떤 점에서 서로 돕고 있다)은 아마도 역위에 의하여 서로 가까워질 것이다. 이때에 자연 선택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새로운 '유전 단위'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경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경우 그 유전 단위는 미래의 개체군 내에 퍼질 것이다. 유전자 복합체는 세월이 지나는 사이에 이와 같이 큰 폭으로 재조립되어 '편집된' 것으로 생각된다.
나비의 의태
가장 훌륭한 예의 하나는 '의태'로써 알려진 형상이다. 어떤 종류의 나비는 구역질 나는 맛이 있다. 그것들은 보통 선명하고 눈에 띄는 색깔을 하고 있어서 새들은 그 '경고색'을 기억하여 그것을 피한다. 반면에 맛이 나쁘지 않은 타종의 나비는 쉽게 잡혀 먹힌다. 그래서 이것들은 나쁜 맛의 나비를 흉내낸다. 즉, 나쁜 맛의 나비를 닮은 색깔과 형태(맛은 닮지 않은)를 가지고 태어난다. 박물학자들은 종종 그것들에게 속으며 새들도 역시 속는다. 정말 싫은 맛의 나비를 한 번 맛본 새는 비슷하게 보이는 나비를 모두 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 중에는 의태종도 포함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의태의 유전자는 자연 선택상 유리하게 된다. 이것이 의태가 발달하는 이유이다. '나쁜 맛'의 나비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그것들이 모두 닮은 것은 아니다. 의태종이 그것들을 전부 닮을 수는 없다. 나쁜 맛을 내는 한 특정한 종류에 자신을 맡겨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의태종은 각각 특정한 나쁜 맛을 내는 종으로 흉내낼 수 있는 전문가이다. 그러나 그 중에는 아주 묘한 짓을 하는 의태종이 있다. 그 의태종의 이부 개체는 어떤 하나의 나쁜 맛을 내는 종에 의태하며 다른 개체는 또 다른 나쁜 맛을 내는 종에 의태하고 있다. 중간 상태의 개체나 양쪽에 의태하려고 하는 개체는 즉시 먹혀 버리기가 십상이나 실은 이와 같은 중간형은 안 생긴다. 한 개체가 암놈이거나 수놈이거나 양단간에 하나이어야 함과 같이 한 개체는 어떤 하나의 나쁜 맛을 내는 종에 의태하든지 양자 중에서 택일한다. 어떤 나비는 A종에 의태하는 반면에 그 형제 나비는 B종에 의태한다.
그것은 마치 한 개의 유전자가 A종을 닮거나 B종을 닮거나를 결정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단 한 개의 유전자가 의태의 다종다양한 면 -색깔, 형태, 점 모양, 비행의 리듬까지-의 모든 것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 아마도 한 시스트론의 의미의 유전자로는 그것은 가당치 않다. 그러나 실은 역위와 그 밖의 우연한 재배열에 의하여 유전 물질에 무의식으로 자동적인 '편집'이 행해진 결과 이전에는 마구 흩어져 있던 다수의 유전자가 염색체상의 한 장소에 모여 긴밀한 연관 집단을 이룬 것이다. 이 집단 전체는 한 개의 유전자와 같이 행동하여- 실제로 우리의 정의로는 이것은 단일 유전자이다- 별도의 집단인 '대립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어떤 집단에는 A종으로 의태하는 데 관여하는 시스트론이 함유되어 있다. 각 집단이 교차에 의해 분열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자연계에서는 중간형의 나비는 전혀 볼 수 없으나, 다수의 나비를 실험실에서 사육하면 극히 드물게 나타날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유전자라는 말을 몇 세대까지도 계속되고 많은 사본의 형태로 배분될 정도로 작은 유전 단위라는 의미에서 쓰고 있다. 이것은 전부냐 또는 아니냐라는 엄밀한 정의는 아니고, '큰' 또는 '늙은' 등의 정의와 같이 이를테면 윤곽이 차차 흐려져 가는 정의이다. 염색체의 어떤 길이의 한 부분이 교차에 의해 분열되거나 여러 종류의 돌연변이에 의해 쉽게 변한다면 내가 말하는 의미로써 유전자로 불릴 자격은 없다. 시스트론은 아마도 그러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나 그보다는 더 색체상의 극히 가까이 있는 수가 있어, 이 경우 우리의 목적에 따라 그것은 단일의 장수하는 유전 단위를 구성하고 있다고 한다. 의태하는 나비의 집단은 좋은 예이다. 시스트론은 어떤 몸을 이탈하여 다음의 몸으로 들어갈 때, 즉 차세대로 여행하기 위해 정자나 난자에 실릴 때 이전의 항해에서 서로 이웃하던 자들, 즉 먼 조상의 몸으로부터 긴 방랑의 여행을 같이 해 온 옛 길동무와 한 조각배에 같이 타는 수가 많을 것이다. 같은 염색체상의 서로 이웃한 동지의 시스트론은 단단히 뭉친 길동무를 이루고 있고, 감수 분열 시기가 도래할지라도 한 배에 탑승하므로 손해볼 일은 절대로 없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이 책에는 '이기적인 시스트론'도 '이기적인 염색체'도 아닌 '어느 정도 이기적인 염색체의 큰 도막과 더욱 이기적인 염색체의 작은 도막'이라는 제명을 붙여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이것은 매혹적인 제명은 아니다. 거기서 나는 유전자를 몇 대를 계속할 가능성이 있는 염색체의 작은 도막이라고 정의하고 이 책에 "이기적 유전자"라는 표제를 붙인 것이다.
여기서 1장의 마지막에 남긴 문제로 돌아가자. 1장에서는 자연 선택의 기본 단위라는 대표적인 모든 단위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았다. 또한 사람에 따라 종을 자연 선택의 단위라고 여기는 사람, 종 내의 개체군 또는 집단을 단위로 여기는 사람, 개체를 단위로 여기는 사람도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자연 선택의 기본 단위로서 그리고 이기주의의 기본 단위로써 유전자를 생각하는 편이 좋다고 말했다. 나는 이제 나의 주장이 정당할 수밖에 없게끔 유전자를 '정의'하려 한다.
자연 선택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말하면 자연 선택이란 각 단위의 생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생존하는 것이 있으면 죽는 것도 있는데, 이 선택적인 죽음이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는 좀더 조건이 필요하다. 각 단위는 많은 사본형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단위의 적어도 일부는 진화상으로 의미 있는 기간(사본형으로) 동안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안 된다. 작은 유전 단위는 이들의 특성을 갖추고 있다. 개체, 그룹, 그리고 종에는 그것이 없다. 유전 단위를 실제로 불가분의 독립한 입자로써 다룰 수 있음을 제시한 것은 멘델(Gregor Mendel)의 위대한 업적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이 어느 정도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시스트론까지도 때로는 분할되는 수가 있고, 동일 염색체상의 두 개의 유전자는 둘 다 완전히 독립하여 있지 않다. 내가 행한 것은 불가분의 입자라는 이상에 극도로 가까워지는 단위로서의 유전자를 정의하는 것이다. 유전자는 불가분은 아니나 좀처럼 분할되지 않는다. 확실히 그것은 어떤 개체의 체내에 존재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유전자는 조부모로부터 손자 손녀까지 다른 유전자와 섞이지 않고 그냥 그대로 중간 세대를 통과하여 여행한다. 유전자가 끊임없이 혼합된다면 우리가 현재 이해하고 있는 자연 선택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다윈 시대에 증명된 것이다. 당시는 유전이 혼합 과정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다윈을 대단히 곤란하게 했다. 멘델의 발견은 이미 발표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에 다윈을 도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윈은 그것을 몰랐다. 사람들이 그것을 읽은 것은 다윈과 멘텔이 죽고 난 후 몇 년이 지나서였다. 멘델은 아마도 자신이 발견한 것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다윈에게 편지를 썼을 것이다.
유전자는 불사신이다
유전자의 입자성의 또 하나의 측면은 그것이 노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전자가 100만 년을 살았다고 해서 100년쯤 산 유전자보다 쉽게 죽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기의 목적에 맞추어 자기의 방법으로 다음에서 다음으로 몸을 조절하며, 죽을 운명에 있는 몸이 노쇠하거나 죽음에 이르기 전에 차례를 따라 그들의 몸을 버리며, 세대를 거치면서 몸에서 몸으로 옮겨 간다. 유전자는 불사신이다. 아니 불사신에 가까운 유전 단위로서 정의된다. 세계에 존재하는 개개의 생존 기계인 우리들 인간은 수십 년은 산다고 예측된다. 그런데 세계의 유전자의 예상 수명은 십년 단위가 아닌 1만 년 또는 100만 년 단위로서 재지 않으면 안된다. 유성 생식을 하는 종은 개체가 자연 선택의 중요한 단위로서 자격을 얻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허황된 유전 단위이다. 개체의 그룹은 더한층 큰 단위이다. 하늘의 구름이나 사막의 모래 바람 같은 것이다. 그들은 일시적인 집합 내지는 연합이다. 진화적 시간의 척도로 보면 불안정하다. 개체군은 장기간 계속되나 다른 개체군과 끊임없이 배합되고 있고, 그로 인해 그 자체의 정체성을 잃어 간다. 개체군은 또 내부로부터 진화적 변화를 받는다. 그것은 자연 선택의 단위로 될 수 있을 만큼 독립된 존재는 아니다. 즉, 다른 개체군보다 좋은 것으로 '뽑힐' 정도로 안정하지도 않고 단일하지도 않다.
개체의 몸은 그것이 유지되고 있는 한은 충분히 독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도대체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 각 개체는 유일하다. 그러나 실체의 사본이 한 개씩밖에 없을 때에는 그들 실체간에 선택이 작용하여 진화가 일어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유성 생식은 복제가 아니다. 개체군이 다른 개체군에 의해 오염되듯이 한 개체의 자손은 성적 파트너에 의해 오염된다. 당신의 자식은 당신의 절반밖에 안 되고, 당신은 당신의 아주 작은 부분-몇 개의 유전자-을 가진 다수의 자손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비록 그들이 당신의 성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개체는 안정한 것이 아니다. 정처없이 떠도는 존재이다. 염색체도 또한 트럼프 놀이의 카드장처럼 즉시 혼합되고 즉시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카드 자체는 섞여져도 살아 남는다. 이 카드가 유전자이다. 유전자는 교차에 의해서도 파괴되지 않는다. 그저 파트너를 바꾸어 행진할 따름이다. 물론 그들은 계속 행진한다. 그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그들은 자기 복제자이고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인 것이다. 우리는 목적으로 쓰여진 후 버려진다. 그러나 유전자는 지질학적 시간을 사는 거주자이다. 유전자는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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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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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鼎烹鷄(우정팽계) 牛(소 우) 鼎(솥 정) 烹(삶을 팽) 鷄(닭 계)
후한서(後漢書) 변양전(邊讓傳)의 이야기. 동한(東漢) 말기, 진류(陳留)지방에 재능과 학문을 겸비한 변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조정의 의랑(議郞)인 채옹(蔡邕)은 하진(何進)의 수하에 있던 변양에게 더 높은 관직을 맡기고자 하여, 하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변양은 뛰어난 인물로서 예(禮)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고, 법도(法度)에 맞지 않으면 말하지 않습니다. 옛말에 소 삶는 큰 솥에 닭 한 마리를 삶게 되면 물이 너무 많아 맛이 없어서 먹지 못하게 되고(函牛之鼎以烹鷄 多汗則淡而不可食), 물을 너무 조금 부으면 익지 않아 먹을 수 없게 된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큰 인재를 하찮은 일에 쓴다는 뜻이니, 장군께서는 그로 하여금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진은 채옹의 말을 듣고, 변양을 더 높은 관직에 천거하였다. 牛鼎烹鷄란 큰 인재를 작은 일에 씀을 비유한 말이다. 소와 닭은 한자에서 각각 최고와 최저를 상징하는 동물로 자주 등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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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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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자서전. 시민의 불복종 - 간디 / 함석헌 역
제2편
2. 어떻게 생활을 시작했던가
나의 형님은 내게 큰 기대를 걸었다. 부와 명성과 유명함에 대한 욕망이 그에게 있어서는 큰 것이었다. 그는 속이 넓었고 잘못에 대해 관대했다. 이것이 그의 단순한 성격과 한데 합해서 많은 친구를 그에게로 이끌어 주었는데, 형님은 친구들을 통해서 내가 소송사건 의뢰자를 얻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또 내 사업이 번창할 것이라 추측하고는 그러한 기대 속에 집안살림 경비를 너무 지나칠 정도로 썼다. 그러고는 내 사업의 기반을 닦느라고 백방으로 주선을 했다. 내가 외국에 간 일로 인해 일어난 계급안의 풍파는 아직도 가시지 않고있었다. 그로 이하여 계급은 두파로 나뉘어서, 한 파는 나를 즉시 받아들이려 했고, 다른 한 파는 그냥 나를 내쫓으려고 했다. 그 전자의 호의를 얻기 위해 나의 형은 라지코트에 가기 전에 나를 나시크에 데리고 가서 거룩한 내에서 목욕을 시키고, 라지코트에 도착하자 곧 계급에 만찬을 베풀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싫었다. 그러나 내게 대한 형님의 사랑은 한이 없었고, 내가 그를 공경하는 마음도 또 컸으므로 그의 뜻을 법으로 생각하고 그가 하자는 대로 기계적으로 따랐다. 그리하여 계급에 다시 받아들여지는 데 대한 문제는 사실상 없어졌다.
나는 나를 배척했던 계급에 대해 가입을 청한 일은 한번도 없었다. 또 그 파의 대표자들에 대해 어떤 반감을 가진 일도 없었다. 그들 중 더러는 내게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기도 했지만 나는 조심해서 그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했다. 나는 파문에 대한 계급의 규약은 충실히 존중했다. 거기에 의하면 우리 친척 중 누구도, 나의 장인도, 장모도, 그리고 처형이나 처남도 나를 대접할 수 없고, 나는 그들 집에서 물도 마실 수 없었다. 그들은 그 금지를 몰래 피할 생각이었지만, 공공연히 할 수 없는 일을 몰래 하는 것은 내 천성에 맞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조심해 행동한 결과 나는 계급으로 인해 고통을 받은 일은 없었다. 도리어 나는 나를 아직 파문자로 알아주는 파 전체로부터 애정과 관대를 받았다. 그들은 내가 계급을 위해 언제 무엇을 해줄 것이라는 아무 기대도 하지 않으면서도 내 사업을 도와 주기까지 했다. 이런 모든 좋은 일들은 나의 무저항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내가 만일 계급에 들어갈 운동을 했다면, 내가 만일 계급을 여러 파로 분열시킬 운동을 했다면, 내가 만일 계급 사람들을 선동했더라면 그들은 틀림없이 보복했을 것이고, 그리하여 내가 영국에서 돌아왔을 때 그 풍파를 피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나 자신은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 빠졌을 것이고 계급은 분열되고 말았을 것이다.
내 아내와의 관계는 아직 내가 원하는 바와 같지 못했다. 영국 유학도 내개서 질투심을 뽑아내 주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사소한 일에도 까다로웠고 또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내가 항상 바라던 것은 하나도 실현되지 않았다. 나는 아내가 읽고 쓰는 걸 배워야 하고 내가 그 학습을 도와 주어야 한다고 결정은 했지만, 내 정욕이 방해를 했고, 아내는 내 결점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했다. 한번은 아내를 친정에 보내기까지 했고, 아내가 비참할 대로 비참해진 후에야 돌아오도록 했다. 그 후 나는 이 모든 것이 내 어리석음 때문임을 알았다. 나는 아이들의 교육을 개혁할 안을 세웠다. 형에게도 아이들이 있었고, 내가 영국에 갈 때 집에 두고 갔던 내 아이도 지금 네살이 다 되었다. 이 아이들에게 체조를 가르쳐 주어 신체를 튼튼하게 하고, 또한 내가 몸소 지도를 하자는 것이 나의 원이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형의 찬성도 있어서 나의 노력은 다소 성공이 되었다. 나는 아이들과 같이 어울리는 것을 매우 좋아했고, 지금까지도 그들과 같이 놀고 농담을 하는 버릇이 남아있다. 그때 이래 나는 어린이의 좋은 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음식의 개량 이 필요한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었다. 홍차와 커피는 벌써 집에 들어왔고, 형님은 내가 귀국하는 대로 어느정도 영국풍을 지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으므로, 그 때문에 그 전에는 특별한 때나 쓰려고 준비해 두었던 도자기 같은 등속을 이제는 늘 쓰게 되었다. 나의 개량 에 마지막 손질을 했다. 오트밀을 들여왔고, 홍차와 커피 대신에 코코아를 쓴다 했지만 사실상 홍차와 커피외에 그것 하나를 더 쓴 셈이 됐다. 장화와 단화도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서구의 의복을 첨가함으로써 서구화를 완성시켰다. 비용이 이처럼 늘어만 갔다. 새로운 것이 날마다 늘어갔다. 우리는 문 앞에 흰 코끼리를 매어 두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비용이 어디서 나오느냐? 라지코트에서 개업을 한다는 것은 비웃음이나 듣기 알맞았다. 나는 자격있는 지방 변호사의 지식도 못가지면서 보수는 그 열곱이나 받기를 기대했다. 어느 바보 의뢰인이 내게 사건을 맡기겠는가? 그리고 설사 그런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내가 무지에다가 거만과 거짓까지 더하여, 세상에 대하여 끼친 나의 부채의 짐을 보탤 것 아닌가? 친구들은 나더러 봄베이로 가서 얼마동안 있으면서 고등법원의 경험도 얻고, 인도법 공부도 하고, 그러면서 소송사건도 얻을 수 있는대로 얻어보라고 권했다. 그 제안을 받아들여 나는 그곳으로 갔다.
봄베이에서 나는 나만큼이나 무능한 요리인 한 사람을 두고 살림을 시작했다. 그는 브라만 사람이었는데, 나는 그를 하인으로 여기지 않고 가족으로 대우했다. 그는 물을 끼얹기만 하고 몸을 씻는 일이 없었다. 그의 도티 는 더럽고, 그 성사*1도 마찬가지였으며, 경전에 대하여서는 완전히 소경이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보다 나은 요리사를 두겠는가? 이것봐, 라비샹카르(이것이 그의 이름이다.), 요리 만들줄은 모른다 하더라도 그래도 산드야(Sandhya : 매일 드리는 예배)는 알아야 하지 않아 하고 내가 물으면, 산드야라구요! 주인님, 쟁기가 저희들의 산드야 입니다. 그리고 삽이 저희들의 날마다 하는 예식이고요. 브라만이란 바로 그런 겁니다. 그저 주인님 덕택에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농사밖에 없습니요. 했다. 그래서 나는 라비샹카르의 선생 노릇을 해야 했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요리를 반은 내가 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영국에서 했었던 채식 요리의 경험을 살리기로 했다. 스토브를 하나 마련하고 라비샹카르아 함께 부엌일을 시작했다. 나는 그와 같이 식사하는 것에 상관치 않았고, 라비샹카르 역시 그랬으므로 우리는 재미있게 해나갔다. 다만 한가지 걱정이 있었다. 라비샹카르는 죽자 하고 불결을 고수해서 음식은 늘 깨끗하지 못했다! 그러나 봄베이에 4,5개월 이상 있다는 건 나로서는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자꾸만 늘어나는 지출을 감당할 수입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의 생활 시작의 모습이다. 나는 변호사 직업이 나쁜 것임을 알았다. 그것은 허풍만 떨고 아는 것은 없단 말이다. 나는 내 책임에 죄어드는 압박감을 느꼈다.
*1. 인도 4계급 중 위의 세 계급은 성년기에 이르면 정신적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표로 목에 실을 두르는 의식을 행한다. 그 실은 아기가 태어날 때 맺는 배꼽줄을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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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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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 6장 제우스의 아들과 딸
11. 아프로디테
아프로디테(Aphrodite, Venus)는 그리스의 사랑과 미의 여신으로, 후기 로마인이 이탈리아의 여신 비너스와 동일신으로 융화하여 숭배하였다. 아프로디테의 출생을 둘러싸고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가 우라노스의 딸이라는 설로, 크로노스에게 참패하여 거세된 우라노스의 남근이 바다에 던져지자 거품에 싸인 우라노스의 씨들에서 탄생하였다 한다. 또 하나는 제우스와 디오네의 딸이라는 설이다. 아프로디테가 바다에서 나오자 곧 바람의 신 제퓨로스가 큐테라를 거쳐 동쪽 키포로스 섬 해안으로 데려갔고, 이 곳에서 계절의 여신 호라이가 환대하여 옷을 입히고 치장시켜 영생하는 신족의 거처로 인도하였다. 루키아노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를 처음 데려온 것은 네레우스였다고 한다. 후에 플라톤은 아트로디테를 두 가지 성격을 지닌 여신으로 규정하였는데, 즉 우라노스의 딸인 아프로디테는 천상의 사랑의 여신, 디오네의 딸 아프로디테 판데미아는 일반 서민의 여신으로 구분하였다. 신화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는 철학적 견해다.
아프로디테에 관한 일화는 상당히 많은데, 서로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고 여신의 성격상 개별적으로 색다른 역할들이 추가된 것이다. 아프로디테는 렘노스 섬의 절름발이 신 헤파이스토스와 결혼하였지만 전쟁의 신 아레스와 정을 통하였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태양신 헬리오스가 어느 날 아침 두 연인의 뜨거운 관계를 목격하고 이를 헤파이스토스에게 일러 바쳤다고 한다. 이에 헤파이스토스는 마법의 망을 쳐 둔 후 출타할 일이 있다며 집을 떠났다. 아프로디테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레스를 불러들여 동침하는데 이를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헤파이스토스가 부정을 저지른 두 신을 망으로 씌워 놓고 올림포스의 신들을 불러들이니 모두 이 흥미진진한 모습에 야유를 보내고 재미있어 하였다. 헤파이스토스는 포세이돈의 간절한 요청을 받고서야 망을 걷었고 아프로디테는 창피하여 키프로스로 도망갔다. 아프로디테는 아레스와의 사이에 에로스, 안테로스, 데이모스(공포), 포보스(두려움) 및 하르모니아를 낳았다.
아프로디테의 연애행각은 아레스에 한하지 않았다. 디오뉴소스와 관계하여 프리아푸스를 낳았으며, 헤르메스의 사랑고백을 듣고 하룻밤을 지낸 후 헤르마프로디토스를 낳았다. 또한 색다른 일화도 있다. 파포스 왕 키뉴라에게는 뮤라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자신의 아비를 사랑한 나머지 아비가 만취한 틈을 타 동침하고 대단히 귀여운 아도니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된 아비가 딸을 죽이려 하자 아라비아로 달아나 뮤르나무가 되었다. 그러자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를 페르세포네에게 돌보게 하였는데 페르세포네가 아이를 돌려주려 하지 않았다. 이에 아프로디테는 제우스에게 호소를 하니, 1년을 3계절로 나누어 한 계절은 페르세포네, 또 한 계절은 아프로디테와 지내고 나머지 계절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지내도록 해 주었다. 아도니스는 이 결정에 따라 페르세포네와 한 계절을 지내고는 나머지 두 계절은 아프로디테와 지냈다. 그런데 사냥을 좋아했던 아도니스는 결국 멧돼지에 받혀 죽고 말았고, 비통함을 이기지 못한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를 아네모네 꽃으로 화신시켰다. 일설에 아프로디테가 아도니스를 너무 사랑하는 데 질투를 느낀 아레스가 죽였다고도 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페르세포네가 상처입은 아도니스를 다시 살려내어 반년은 자기와, 나머지 반년은 아프로디테와 지내도록 하였다고 한다. 아프로디테는 이밖에 트로아스(수도는 트로이)의 이다 산에서 안키세스와 사랑을 나누고 두 아들 아이네아스와 류르노스를 두었다.
[아프로디테와 아도니스]
아프로디테는 분노를 폭발시켜 저주를 내리기도 하였다. 그 중 자신의 연인 아레스와 사랑에 빠진 새벽의 여신 에오스를 벌주기 위해 에오스의 연인 오리온에게 격정을 갖도록 사랑의 열기를 불어넣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또한 렘노스 섬 여인들이 사랑의 신인 자신을 숭배하지 않은 데 분노하여 이들에게서 고약한 악취가 나게 함으로써 남편들이 이 여성들을 버리고 트라키아의 노예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러자 맹랑한 렘노스 여인들은 섬에 있는 남성을 모조리 죽이고 여인천하를 만들었고 후에 아르고 호 대원들이 들어오고 나서야 아들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아름답고 친절함의 대명사로 알려진 아프로디테에게는 잘 어울릴 성싶지 않는 다른 이름들도 있다. 예컨대 그녀를 '삶 속의 죽음'의 여신이라고도 하며, 아테네에서는 운명의 여신 모이라이의 가장 맏언니 또는 복수의 여신 에리뉴에스의 자매라고도 한다. 다른 곳에서는 검은 여신이라는 뜻의 멜라이니스 혹은 암흑 속의 여신이라는 뜻의 스크티아라고도 불렀는데, 파우사니아스의 풀이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랑의 교제가 밤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플루타르크는 심지어 무덤의 여신이라는 뜻의 에피튬브리아라고 불렀는데 사랑의 종말이 죽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편 아프로디테 여신의 친절도 여신의 분노나 다를 바 없이 위험하였다. 불화의 여신 아레스는 황금사과를 내놓고 헤라, 아테나 및 아프로디테의 세 여신중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주겠다고 충동질하여 갈등의 씨를 뿌렸다.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시켜 세 여신을 트로아스의 이다 산에 모이게 한 후 양치기로 있는 트로이 왕자 파리스에게 판가름을 내게 하였다. 세 여신은 각기 어마어마한 선물을 약속하며 파리스의 환심을 사고자 했는데, 천하의 아름다운 처녀 헬레나를 주겠다고 약속한 아프로디테가 사과를 넘겨받았다. 이것이 트로이 전쟁의 씨앗이 될 줄이야! 전쟁중 아프로디테는 트로이를 지원하고 특히 파리스를 도와주었다. 메넬라오스와 단둘이 붙어 싸우다 패하게 될 찰나 위기에서 파리스를 구원해 준 것이 바로 아프로디테이며 그 결과 전쟁은 전면전으로 치달았다. 마찬가지로 트로이 쪽의 아이네아스도 돕는데, 디오메네스에게 죽음을 당하는 순간 아이네아스를 구하고 자기 스스로 상처를 입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수호에도 불구하고 트로이 시의 함락과 파리스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다만 트로이 민족의 명맥을 유지시키는 데는 성공하여 아이네아스와 그 부친 및 아들이 불타는 트로이를 탈출하여 신천지에 가서 나라를 세우게 된 것은 모두 아프로디테의 은혜였다. 그러므로 로마인은 아프로디테.비너스를 보호신으로서 각별히 모시게 되었다.
원초적으로 아프로디테는 생식과 풍요의 여신인데 시문에서 성의 본능과 사랑의 위력으로 화신시켜 표현하였다. 결혼 예식도 주관하였는데 이때 키프로스의 아프로디테는 수염을 가진 남성형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결혼은 헤라 여신의 영역이다. 코린트에서는 매음의 보호 여신으로도 숭배하였고, 키프로스의 도시 파포스에 있는 여신의 신전은 찬란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예배날에는 수천 군중이 모여 축제를 벌였다. 또한 우라노스 혹은 아레스와 합동으로 숭배하는 곳도 있고 항해 또는 전쟁의 여신으로 모시는 스파르타, 아르고 및 코린트의 신전 경내에는 무장한 여신상이 서 있다. 로마의 카이사르는 자신의 가문 율리우스의 선조신으로 비너스 여신을 모시기 위하여 장대한 신전을 봉헌하였다. 비너스는 원래 전원 혹은 뜰의 여신인데 아프로디테도 같은 성질의 여신으로 모신다. 신화에서 아프로디테는 아주 드물게 자신의 마법 허리띠를 딴 여신에게 빌려주는데 이 허리띠를 차고 있으면 상대가 마력에 걸려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프로디테 여신이 좋아하는 새로는 비둘기, 백조, 제비 등이 있고 여신이 탄 이륜차는 비둘기 무리가 끌었다. 꽃 중에서는 장미과 도금양(MYrtaceae)꽃을 좋아했고 여신에게는 비둘기를 공양하고 향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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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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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2 - 류시화
구두가 없어도 인도에 갈 수 있다.
대학교 3 학년 때 나는 문리대학 안에 "나다"라는 이름의 연극부를 만들었다. '나다'는 스페인어로 '무'라는 뜻이다. 연극부에서 나는 주로 연출을 맡았고, 무대에 올린 작품은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나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부조리극들이었다. 한번은 연극 공연 중에 어떤 남학생이 무대 뒤로 날 찾아왔다. 그는 히피처럼 장발을 하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대뜸 나더러 학교를 때려치우고 인도에 가지 않겠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우리는 소극장이 있는 학생회관 2층 베란다에서 잠시 얘길 나눴다. "인도엔 왜? 성지 순례라도 떠나고 싶은 거야?" 내가 묻자 초면의 남학생은 간단히 대답했다. "그냥 사라지는 거야. 인도의 뒷골목으로 사라지러 가는 것이지." 그땐 왠지 그 '인도의 뒷골목'이란 말이 내 귀에 크게 울렸다. 그 친구와 헤어져 나는 곧 무대 뒤의 연출석으로 돌아갔고, 학교를 계속 다녀 대학을 졸업했으며, 몇 군데 직장을 다니기도 했다. 도중에 (나다)라는 제목의 카페를 만들어 이상한 고전음악과 인도음악 같은 것에 파묻혀 지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깡마르고 앞니가 벌어진 친구는 정말로 인도의 뒷골목으로 사라져버린 것인지 다신 연락이 없었다. 나 또한 슬슬 인도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그렇지 않은데 세상이 자꾸만 날 비현실적인 인간으로 만들어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올해엔 반드시 인도로 사라지는 거야. 뒷골목으로 말야, 하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러나 난 떠나지 않았다. 자꾸만 미뤘다. 이 지구의 동식물들 중에서 '미루는 것'을 발명한 것은 인간뿐이다. 어떤 나무도, 동물도 미루지 않는다. 인간만이 미룬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 편의 충격적인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했다. 폴란드의 한 유태인 마을에 신앙심이 강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열심히 일했고, 자식을 키웠으며, 가축들을 돌봤다. 그런데 그들 각자에게는 한 가지 공통된 소망이 있었다. 그것은 죽기 전에 성지 순례를 한번 다녀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여 앉으면 입버릇처럼 말했다. "올해는 꼭 성지순례를 다녀와야지. 더 나이 먹기 전에 다녀와야겠어." 그러면서 그들 각자 또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우리 집 소가 새끼를 낳으면 꼭 가야지. 소가 배가 잔뜩 불러갖고 있으니 떠날 수가 있어야지." "난 신고 갈 구두가 없단 말야. 구두만 사면 더 이상 미루지 않고 꼭 가겠어." 또다른 사람은 말했다. "난 성지 순례를 가면서 그냥 갈 순 없어. 멋진 노래를 부르면서 가야지. 그런데 내 기타가 줄이 끊어졌단 말야. 기타줄만 갈면 떠나야지." 그렇게 이유를 대면서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성지순례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독일군이 마을에 쳐들어왔다. 마을의 유태인들은 모두 집단 수용소로 끌려가야만 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을 사람들은 발가벗기운 채 가스실로 향하며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 집 소가 계속 새끼를 낳았는데도 난 성지 순례를 떠나지 않았어. 그때 충분히 갈 수 있었는데 가지 않았어." "난 구두가 없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지. 고무신을 신고서도 갈 수 있었는데 말야." 음악가는 말했다. "난 기타 핑계를 댔지. 기타줄이 없으면 성지 순례가 불가능한 것처럼 말했어. 그냥 노래만 부르면서 갈 수도 있었거든." 그들은 다들 입을 모아 말했다. "그때 갔어야 하는 건데! 이미 때는 늦었어!" 그들의 말처럼 이미 때는 늦었다.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가스실 문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리고는 영화가 끝이 났다. 관객들이 다 나간 뒤에도 나는 한참을 혼자서 앉아 있었다. 영화관을 나온 뒤 난 곧바로 집으로 전화를 걸었고, 1주일 뒤 밤 열두 시에 인도 뭄바이 공항에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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