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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1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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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 귀뚜라미 소리... -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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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가정의 난로가가 가장 좋은 학교. / 아놀드 H. 글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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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과학/예술/교육 |
- 조화유의 미국영어 - 일반인을 위한 경제생활 영어
2. Cash or charge?
우리나라에서도 요즈음은 credit card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미국 유학을 떠나던 1973년만 해도 크레디트 카드란 말을 들어보지 못했었다. 서울에 볼일 보러 가서 묵었던 K호텔에서도 내가 가지고 간 미국의 크레디토 카드 VISA와 MASTER CARD가 통용되어 참 편리했었다. 이제는 서울 갈 때 거추장스럽게 cash(현금)를 들고 가지 않기로 했다. 정말이지 미국과 한국이 같은 생활권으로 축소된 느낌이다. 미국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고 돈을 내려고 cashier에게 가면 틀림없이 Cash or charge?라고 묻는다. 물론 "현금으로 내시겠습니까, 아니면 크레디트 카드를 사용하시겠습니까?"는 말이다. 이럴 때 현금 지불이면 Cash. 라고 말하고, 크레디트 카드면 Charge. 라고 대답하면 된다. 만일 수표를 써 주려 한다면 Check. 라고 대답하면 된다. check도 현금이나 마찬가지이므로 Cash. 라고 대답하고 수표를 써 줘도 된다. gas station, 즉 주유소 같은 데서는 자기네 석유 회사에서 발행한 크레디트 카드만 취급하고 다른 크레디트 카드는 받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주유소에 가솔린을 사러 들어갈 때는 자기가 가진 크레디트 카드의 그림이 붙어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 만일 그림이 붙어 있지 않으면 가솔린을 넣기 전에 Do you take credit cards? 또는 credit cards honored here?라고 물어봐야 한다. 둘다 "크레디트 카드도 받습니까?"라는 뜻이다. 큰 백화점이나 상점에서는 대개 크레디트 카드를 받으니까 물어볼 필요가 없지만 소규모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는 미리 물어보는 것이 나중에 낭패를 당하지 않는 방법이다. McDonald's나 Kentucky Fried Chicken 같은 이른바 fast food(속성 음식) 가게에 가서 먹을 것을 주문하면 반드시 Here or to go?라고 묻는다. 이것은 "여기서 먹을 거냐 아니면 싸가지고 갈 것이야?" 고 묻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럴 때는 Here. 또는 To go. 중 하나를 말해야 한다. 음식을 손님에게 싸주는 식당은 carry-out restaurant 또는 take-out restaurant라고 한다.
A: May I help you? B: I'd like a hamburger, a regular French fires and a regular coke. A: Here or to go? B: To go. A: 무얼 드릴까요? B: 햄버거와 작은 양의 감자튀김과 코카콜라를 각각 하나씩 주세요. A: 여기서 드실 겁니까? 가지고 가실 겁니까? B: 가지고 갈 겁니다.
* 코카콜라 등의 그릇 크기는 가장 작은 것이 regular이고 중간치는 medium, 큰 것은 large 라고 한다.
Saleslady: Cash or charge? Customer: (Handing over a VISA card) Charge. Saleslady: Can I see your driver's license? Customer: Sure. 판매원: 현금입니까, 크레디트 카드 입니까? 손님: (VISA 카드를 내주며) 크레디트 카드입니다. 판매원: 운전 면허 좀 볼까요? 손님: 그러세요.
* credit card가 본인의 것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운전 면허증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데가 많다. 운전 면허증도 다른 주의 것은 안 되고 바로 그 주의 것만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Saleslady: Cash or charge? Customer: Check. Saleslady: I need two ID's-your driver's license and a major credit card, please. Customer: Here you are. 판매원: 현금입니까? 크레디트 카드입니까? 손님: 수표입니다. 판매원: 증명 2개가 필요합니다-운전 면허증과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크레디트 카드 하나만 보여 주십시오. 손님: 여기 있습니다.
* major credit card는 VISA나 MASTERCARD, DINERS CLUB, AMERICAN EXPRESS 등 전국적,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크레디트 카드를 말한다. ID's는 identifications의 약자이다.
* Laughing is the best rest - 웃음은 가장 좋은 유식이다 Winston Churchill was well known for his sense of humor. He once had this exchange with Lady Astor who got mad at the Prime Minister for criticizing her far-fetched luxury. Lady Astor: If you were my husband, I'd put poison in your coffee. Churchill: If I were your husband, I'd drink it!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그의 유머로 유명했다. 그는 어느날 애스터 경 부인이 지나치게 사치스럽다고 비난했는데 이에 화가 난 그 귀족 부인과 다음과 같은 설전을 교환했다. 부인: 당신이 내 남편이라면 나는 당신 커피에 독약을 타겠소. 처칠: 내가 당신 남편이라면 그것을 마시겠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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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의학 |
- 음식 토정비결 - 전영순,하정화
<곡류>
1.쌀
우리 민족의 생명원 쌀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특유의 맛 때문에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 민족의 주식으로 고락을 같이 해왔다. 쌀의 원산지는 인도 동북부 아삼(Assam)지방에서 중국 윈난(운남)지방에 걸친 넓고 긴 평야지대로 추정된다. 이 지대에서 출발하여 아시아 각 지 에 방사선 모양으로 쌀이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 한 갈래가 양쯔강 하류로 뻗어나가 다시 북으로 전파되고 황하 유역으로 퍼졌으며 또다시 동쪽으로 전래되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일반적으로 우리 쌀의 모양은 뭉특하거나 타원형이다. 그리고 품종에 따라서는 젖색깔(백복)이 난다. 반면에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재배되는 남방형 쌀은 긴 직사각형 모양으로 각을 이루고 씨눈 제거 부위가 뾰족하다. 또한 밥을 지어놓았을 때 끈기가 부족하고 비타민 함유량이 우리 쌀에 비해 떨어진다. 외국쌀 중에서 북방형은 필요 이상으로 투명하고 윤기가 있으며 모양이 둥글다. 대체로 쌀알은 굵은 편이며 밥맛이 좋지 않다. 우리나라는 고대 삼한시대부터 쌀을 식량으로 이용해왔으나 실제 벼농사를 지은 것은 백제 초기라고 한다. 1977년에 경기도 여주군 흔암리에서 발굴된 탄화미와 그 뒤 평양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탄화미 등은 우리나라 쌀 재배의 역사를 추적할 수 있는 귀중한 고대 곡물자료이다. 이후 쌀 농사는 우리나라 남부 지방을 비롯한 전국으로 보급되면서 기후와 지세, 그리고 수자원이 풍부한 영남과 호남 지방에서 활발하게 재배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쌀 이용이 절정에 달하여 떡, 술, 엿, 과자 등 쌀을 원료로 한 다양한 식품들이 개발되었다.
벼의 종류는 세계적으로 약 3천 여 종에 이른다. 그러나 널리 재배되는 품종은 이중에서 10~20여 종 정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0여종의 쌀이 재배되고 있다. 또한 쌀은 세계 생산량의 90%를 아시아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대부분 아시아에서 소비된다.이처럼 쌀은 아시아 여러 민족의 생명을 지탱해 왔으며 간장, 된장, 술, 감주, 식초 등의 발효식품과 떡, 과자 등의 가공식품으로 이용되어 왔으니 우리들 생활에 가장 밀접한 식품이다. 쌀은 도정하는 정도에 따라서 백미와 현미로 구분할 수 있는데 백미에 비해서 현미가 훨씬 높은 영양가를 지녔다. 일본에서 나온 연구 결과에 의하면 백미를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이 잡곡을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보다 수명이 짧다고 한다. 또한 백미를 편식하면 결핵이나 각기병에 걸리기 쉽다는 내용도 발표된 바 있다. 반면에 현미는 흑색식품의 대표격으로 생명력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씨눈을 가지고 있다. 이 씨눈에는 비타민 종류를 비롯한 갖가지 영양분이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으며 씨눈 자체도 신비로운 효능을 발휘한다. 뿐만 아니라 꾸준히 현미식을 하면 혈액이 맑아지고 혈관 및 심장 계통의 기능이 강화되는 등 여러가지 효능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효능에도 불구하고 현미식은 널리 보급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현미가 소화흡수율이 낮고 밥맛이 떨어지며 밥을 지어놓았을 때 빛깔이 누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과다한 농약 사용으로 과피, 종피 등이 농약에 오염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70년대 다수확 품종의 도입으로 우리나라의 쌀 생산량은 급격히 증가했고 마침내 재고량까지 누적되기에 이르렀다. 때문에 한때는 쌀을 오래도록 보관하는 문제에 연구가 집중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쌀의 특성을 살린 쌀가공 식품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를테면 캔 숭늉, 쌀 요구르트, 쌀칩, 쌀빵, 현미 음료 등의 시제품을 식품개발연구원이 이미 선보인 바 있다. 아쉬운 것은 이러한 기술을 전수 개발하여 상품화할 업체가 많지 않은 실정이다. 우리나라의 쌀 생산량은 해마다 큰 폭으로 감소하고 있다. 농림수산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 88년, 4천 2백만 섬을 넘어섰던 쌀 생산량이 지난 91년에는 3천 8백만 섬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3년 사이에 무려 10% 정도나 줄어든 것이다. 이처럼 쌀 생산량이 크게 줄어든 까닭은 농지의 용도 변경으로 논 면적이 절대적으로 줄어들고 있는데다 논으로 남아있는 곳에서조차 수지가 맞지 않기 때문에 농민들이 쌀농사를 기피하여 과일이나 채소를 대신 재배하거나 아예 땅을 놀리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쌀이 직접 수입되지는 않지만 여러 형태로 간접수입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테면 지난 몇 년간 과자나 찹쌀가루 혼합물 등의 가공식품 형태로 수천 톤에 달하는 쌀제품이 우회수입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아마도 머지 않아서 우리 밥상에는 외국산 수입쌀이 오르게 될 것이다.
성분 쌀의 성분은 전분 약 70%, 단백질 약 10%, 지방 3%, 미네랄 약1.3% 및 각종 비타민류 등이 함유되어 비교적 영양가 높은 식품이라 할 수 있다. 백미는 쌀알의 배유부분에 해당된다. 이것의 주성분은 녹말(당질)이며 다른 성분은 주로 배아에 집중되어 있다. 쌀의 배아)에는 영양학적으로 중요한 여러가지 요소가 함유되어 있다. 특히 비타민E, 비타민B1, 미네랄, 단백질, 지방 및 효소류가 많이 들어있다. 그러나 도정하는 과정에서 영양분이 많이 손실된다. 따라서 쌀의 성분은 도정하는 정도에 따라서 다를 수 밖에 없다. 현미의 주성분은 녹말(76~78%)이고 단백질(7.2%), 지질(2.5%)과 소량의 비타민B1, B2를 포함한다. 백미는 현미보다 더 많은 당질을 포함하고 있지만 다른 성분은 쌀겨로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쌀의 약효에 대해서 밝혀진 바는 다음과 같다.
* 쌀은 허약한 몸을 회복시켜주고 기력을 되찾게 해준다. 즉, 자양강장 작용을 한다. * 정신을 안정시키는 작용이다. 신경의 흥분을 가라앉혀 준다. * 위나 그밖의 내장을 강화시키는 작용이다. 그 결과 전신의 신진대사도 활발해지므로 몸도 따뜻해지고 얼굴색이나 피부색도 좋아진다. * 피로와 스트레스가 쌓여 일어나는 '쇠약성 설사'를 멈춰주는 작용이다.즉, 심신의 쇠약을 회복시켜주어서 설사를 개선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쌀로 지은 밥은 여러가지 유익한 성분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요즘에는 전통적인 밥 위주의 식사가 줄어들고 있어 식물섬유의 섭취가 부족하게 된다. 이것이 성인병 유발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고 최근들어 대장암이 급증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비만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이 흔히들 밥이 살이 찌는 원인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근거없는 속설에 불과하다. 오히려 밥은 비만을 방지해주는 음식이다. 식사를 하고 나면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이것을 '체열생산반응'이라고 하는데 이 반응이 강할수록 먹은 음식은 에너지화되어 체외로 빠져 나갈 뿐 살로 되지 않는다. 즉, 체온의 에너지가 발산되어 불필요한 부분을 열로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미국 워싱톤 대학 비만연구소의 실험에 따르면 밥과 같은 전분이 많은 식사법은 고지방식에 비해 살이 찌지 않는다. 다이어트를 하려는 사람은 밥을 굶을 필요가 전혀 없다. 오히려 밥으로 기초식사를 하면서 다른 음식을 주의해야 한다. 이를테면 밥을 먹지 않은 여성들이 감자, 빵 등을 식사 대용으로 먹는 경우가 많은데 이중에서 가장 살이 찌지 않는 것이 밥이고, 감자가 그 반대이다. 어쨌든 밥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의 식단을 보존하는 것이 모든 면에서 가장 훌륭한 식생활 문화를 지켜나가는 길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에 여러가지 잡곡을 혼식하고 콩류를 가공한 식품을 곁들여서 먹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영양섭취가 가능할 것이다.
쓰임새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쌀은 전체 생산량의 95% 이상이 주식으로 활용되고 있다. 여러 종류의 곡식들 중에서 쌀이 마침내 아시아 주민들의 주식이 된 이유는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아시아 민족도 다른 곡식과 같이 분식으로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밥으로 지어먹는 입식으로 변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입식으로 할 때의 쌀밥 맛은 좀처럼 싫증이 나지 않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밖에도 쌀은 술, 과자, 떡 등의 원료로 사용되며 쌀겨는 사료 및 미강유(기름)의 원료로 사용된다. 쌀을 이용한 훌륭한 식품 가운데 미싯가루는 찹쌀, 멥쌀, 보리쌀 등을 씻어서 증기로 찐 다음 뜨거운 바람으로 건조하여 약간 볶거나 분말 그대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만든 미싯가루는 일종의 즉석 수프이고 전시 비상식품과 구호식품으로도 훌륭하게 쓰인다. 시중에서 쌀은 보통 비닐 봉지에 들어있는 채로 판매되고 있는데, 이는 구입 즉시 다른 용기에 옮겨서 보관해야 한다. 이 때 방습성 밀폐용기가 가장 좋다. 요즘에 들어서는 쌀벌레를 막아주거나 습기를 방지해주는 저장용기들이 많이 개발되고 있다. 또한 쌀을 보존할 때는 보존 장소에도 신경써야 한다. 통풍이 잘 되며 건조한 곳, 그다지 습도가 많지 않은 곳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쌀은 시간이 지날수록 맛이 떨어지므로 보통 1개월간 소비할 분량을 한번에 구입하는 것이 좋다.
이것이 토종 주식으로서 쌀은 곡식 중의 으뜸이고, 쌀 중에서도 으뜸은 찹쌀이다. 맵쌀은 현재 우리의 주식이지만 약성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찹쌀은 상당히 뛰어난 약성을 가지고 있다. 이 찹쌀에 속하면서 우리의 토종이라 할 만한 쌀에는 대궐찰이 있다. 약성이 뛰어나 임금님 상에 올랐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궐찰은 다시, 붉은빛을 띤 적동미와 푸른 빛깔의 청량미로 나뉘는데, 적동미를 자홍미라고도 한다. 이 쌀은 옛날에 산간지방에서 재배했으나 요즘은 거의 멸종되어 버렸다. 다만, 지금도 재래종 벼를 재배하다 보면 여러 품종 중에서 중간분자가 결합하여 간간이 파릇파릇한 싹이 자라나는 경우가 있다. 일반벼를 심어놓고 자세히 보면 유난히 크고 튼튼하며 병충해에도 끄떡없는 포기가 군데 군데 섞여 있는 경우가 있다. 농민들은 이것을 잡종이라 하여 마구 뽑아버리는데 알고보면 이것이 대궐찰이다. 이런 포기를 따로 채집하여 재배한다면 약성 높은 토종쌀을 얻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대궐찰은 벼의 끝에 까끄러기가 많고 알갱이가 작아 소출은 떨어진다. 적동미나 청량미나 모두 약성은 비슷하지만 적동미는 위장, 비장, 대장 등에 좋고 청량미는 고혈압, 당뇨, 중풍에 좋다. 이것을 약으로 쓸 때는 죽을 쑤어 먹거나 불에 볶아 가루를 내어 미싯가루처럼 물에 풀어서 마시고, 떡을 만들어 먹어도 된다. 또한 누룩을 이용하여 술에 담가 먹어도 된다. 뽕나무껍질을 같은 양으로 배합하여 마시면 이질, 설사, 부인병 등에 효과가 있다.
이밖에 토종으로 칠만한 쌀에 산두벼가 있다. 말 그대로 산꼭대기에 심는 쌀이다. 논이 없는 산간지대에서 화전민들이 재배한 것으로 보이는 산두벼는 떡을 만들어 먹게 되면 위장병에 특효약이다. 또한 죽을 끓여먹어도 된다. 물론 오랫동안 섭취해야 약효가 있다. 이러한 토종쌀들은 대체로 산간지방에서 재배되던 것인데 그 때문에 무논에서 자란 것보다 강한 생명력을 지녔으며 토양의 성분을 많이 흡수하기 때문이다. 역시 흙과 생명체는 하나의 유기체인 셈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토종쌀의 종자를 보전하고 일반에게 보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지금은 쌀 시장이 전면적으로 개방될 위기에 처해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알게 모르게 많은 외국쌀이 들어오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현재 우리나라에서 널리 재배되는 품종이라도 정확히 찾아내어 토종을 지키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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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대각국사 의천의 중국 유학
‘신법당’의 호의 한편 의천의 중국 유학은 송의 양대 정파인 ‘신법당’과 ‘구법당’사이에 하나의 정쟁거리가 되었다. 신법당은 피폐한 농촌사회와 고갈된 국가재정을 일신하고자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대외적으로도 적극적인 정책을 내새웠다. 다만 송의 군사력만으로는 요를 상대하기 벅찼기 때문에, 고려와 연합하여 요를 견제하려는 외교노선을 표방하였다. 이러한 신법당의 정책은 고려와의 통상에서 막대한 이익을 챙기게 될 송상 - 그들 중 대부분이 복건성과 절강성 출신임- 들로부터 당연히 환영을 받았다. 송상들은 의천을 동향 출신의 정원과 연결시켰고, 그렇게 해서 의천의 중국유학이 성사되었던 것이다. 의천이 중국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가장 반긴 정치세력은 당연히 신법당이었으며, 그들은 ‘승려 의천’보다 ‘왕자 의천’에 무게를 두었다. 신법당에는 남방출신이 많았는데, 핵심인물인 여혜경은 정원과 동향이었다. 그는 나중에 항주지사로 부임하여 혜인원에 정원의 비석을 세워 주었다. 의천이 항주에 머무를 때 정원을 후원하였던 포종맹도 신법당 소속이었다. 그는 구법당의 영수 사마광의 인사 정책을 비판하다가 좌천당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의천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항주지사로 부임하여 왔던 것이다. 또한 당파는 불분명하지만, 의천을 시종 안내하였던 양걸이란 관리도 나중에 절강 지방의 관리가 되어 화엄종을 후원하였다. 그런데 신법당의 고려 우대정책 때문에 고려 사절이 지나가는 연도의 지방민과 수령이 경제적인 고충을 겪게 되었다. 대외정책보다 내정의 안정을 우선하는 구법당이 이를 가만둘 리 없었다. 특히 구법당의 맹장 가운데 한 사람인 소동파는 때로는 지방관으로 때로는 유배자로서 각지를 전전하며 신법당에 비판적인 지방여론을 익히 체감하고 있었다.
의천이 밀항하기 직전인 1085년 3월 신법당의 후원자였던 신종이 죽고 철종이 새로 즉위하였는데, 그는 아홉 살 소년이었기에 할머니인 태황태후가 섭정하게 되었다. 그녀는 신법당을 몹시 싫어하여 신법당의 개혁책을 차례로 폐지시킨 반면, 구법당 그 중에서도 소동파를 신임하여 유배 중이던 그를 사면 복권시켰다. 소동파가 지방 관리를 거쳐 중앙 관직에 복귀한 것은 의천이 항주에 내려가 있던 1085년 12월 중순이었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잘못 씹은 음식물을 뱉아내듯이 신법당의 제반 시책을 연일 공격하여 남아 있던 몇몇 개혁마저 폐지시켜 버렸다. 그리고 1089년에는 자원하여 항주태수가 되었다. 3년 전에 귀국한 의천은 이 해 11월 제자 수개를 항주로 보내어 그 전해에 입적한 정원의 제사를 받들게 하는 동시에, 따로 황제와 태황태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뜻에서 금탑 2기를 바치도록 하였다. 소동파는 정원을 돈밖에 모르는 용렬한 승려로 매도하는 한편, 수개 일행에 대해서는 제사만 허락하고 금탑은 돌려 보낼 것을 중앙정부에 건의하였으며, 수개 일행을 태우고 온 송나라 상인 서진을 직권으로 구속시켜 버렸다. 이 부렵 소동파는 송과 고려의 문물교류를 통제하자는 건의를 수 차례나 올렸으며, 1090년 마침내 그의 건의가 채택되어 두 나라 사이의 교역은 물론 의천과 송 불교계의 교류가 일시 중단되기도 하였다. 소동파가 고려와의 통상을 반대한 이유의 하나는 송의 서적이 해외로 반출된다는 것이었다. 소동파는 우국충정에서 한 말이었겠지만, 이는 오해와 기우에 불과하였다. 중국은 당나라 말기 이래로 계속되는 전란과 두 차례의 대대적인 불교탄압으로 수많은 불교서적이 유실되었다. 그런 화엄학이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에 고스란히 남아 있던 많은 서적이 송으로 역수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1145년 이들 화엄종 전적이 송의 대장경에 정식으로 편입되었다.
교종에 공감, 선종에 반감 성인은 자기 몸을 굽혀서 남의 장점 취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고 한다. 의천 또한 하나의 지식, 작은 행실이라도 배울 점이 있으면 두루 찾아보았고, 그럴 때마다 반드시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그는 14개월의 짧은 기간에 각 종파의 고승 50여 명과 교류할 수 있었는데, 귀국 보고서에서는 단지 화엄. 유식. 천태. 율학의 종지를 받아왔다고만 하였다. 이들은 모두 교학불교였다. 의천은 왜 선종을 언급하지 않은 것일까? 물로 그는 선종 승려를 만났으며, 그 중에는 당대 최고의 선승도 있었다. 1085년 7월 하순 의천은 변경 상국사에서 운문종의 종본을 만났다. 종본은 왕실로부터 두터운 존경을 받던 선의 거장이었다. 그 자리에서 <화엄경>을 소재로 선문답이 오갔는데, 종본으로부터 들은 말은, “그대는 아직 <화엄경>을 깨닫지 못하였다.”는 한마디였다. <화엄경>이야말로 수십 번도 더 읽어 보았을 의천이 아니던가. 그러나 스스로도 고백하였듯이 여태껏 참선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선의 문외한이었다. 문외한과 거장의 첫대면은 이렇게 끝났다. 의천은 항주로 내려가는 도중 경치 좋기로 이름난 금산사(강소성 진강)에서 운문종의 요원을 만났다. 그는 유학자 집안 출신으로 계율보다 시와 술을 더 좋아하였으며, 소동파와의 재기발랄한 일화로 훗날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의천은 우연히도 소동파가 다녀간 직후에 금산사에 이르렀다. 두 사람의 만남은 대화 내용보다 첫인사 장면이 동행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의천이 요원에게 스승의 예를 갖추자, 요원은 앉은 채 절을 받아서 안내하던 양걸을 당혹서럽게 하였다. 요원의 눈에 의천은 왕자가 아니라 단지 불교를 구하고자 온 타국의 승려일 뿐이었다. 송대 지식인 사회에 팽배한 배타적 중화주의가 요원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일까.
1086년 여름 의천은 귀국선을 타기 직전 명주성(절강성 영파) 동쪽에 있는 아육왕사를 찾아가서 회련을 만나 그로부터 설법을 들었다. 회련은 은퇴한 노승에 불과하였지만, 그야말로 운문종을 왕실에 전파한 일등공신이었다. 의천은 이들 운문종 승려 외에 다른 유파의 선승도 만났으나, 끝내 선종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선 자체는 모든 불교도들의 보편적인 수행법이지만, 그것을 독립된 종파로 발전시킨 것은 중국 불교도의 창안이었다. 선종에 따르자면, ‘나’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인데, 나를 알기 위해 반드시 경전을 읽거나 불상에 절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기왕의 교종은 경전의 자구 해석에만 골몰한다거나, 아니면 미신에 가까울 정도로 불상을 숭배함으로써, 정작 찾고자 하는 ‘나’를 놓치고 있었다. 경전과 불상을 빼놓고 과연 불교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마는, 선종이 그랬던 것이다. 언제부턴가 선승들 사이에서는 부처 어록인 경전보다 선사어록이 더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인도 이래의 전통 불교를 자처해온 교종으로서는 이러한 선종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교종의 눈에 선종은 단연 이단이었다. 그런데 중국사회가 당나라 말기 이후 혼란기를 거치면서 숱한 경전이 불타고 불상이 파괴되었으며, 인도로부터 새로운 경전의 전래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따라서 인도적인 전통에 기반한 교종이 급격히 위축된 반면, 중국적 전통을 강화한 선종이 급속도로 득세하였다. 송대 선종은 수많은 유파로 갈라지며 성행하였으며, 항주는 그 중심지였다. 특히 정교한 언어와 고매한 담론을 자랑하는 운문종은 의천이 중국에 갔을 무렵 이미 왕실까지 파고들 정도로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의천은 철저한 교종승려였다. 그가 중국에 간 목적은 침체된 고려의 교종을 진흥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송 불교계는 선종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의천이 내심 ‘중국에 인물이 없다’라고 탄식할 만도 하였다. 그러나 송 불교계에도 선종의 득세와 교종의 침체 현상을 우려하는 승려들이 있었다. 자연 의천은 이들과 만나 서로의 입장을 재확인하게 된다. 1085년 섣달 그믐께 의천은 서호 동쪽에 자리잡은 영지사로 원조를 찾아갔다. 원조는 영지사 생활 30년 동안 늘 베옷에 지팡이 차림으로 탁발 행각을 하였다는 계율종의 고승이었다. 그는 계율뿐 아니라 천태사상과 정토사상에도 조예가 깊어서, 의천은 그로부터 계율과 정토에 관해 특강을 들었으며, 그의 저술을 가져와 간행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원조는 선종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책을 간행하려다, 선승들이 소송을 제기하는 바람에 판을 허무는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나중에 원조는 그 책을 의천에게 보내주어 지금껏 합천 해인사에 전해지고 있는데, 따로 보낸 편지에서, “나를 알아주는 자 오직 우리 스님(의천)뿐이십니다”라고 하였다.
의천이 선종을 얼마나 비판했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가 있다. 한번은 선종에 비판적인 송나라 승려의 글을 입수해서는 말미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서 간행한 적이 있었다. 덧붙인 글에서 요나라 임금이 대장경을 편찬하면서 선종의 대표 전적인 <육조단경>과 <보림전>이 거짓되었다는 이유로 불태워 버린 사건을 언급하면서 “요망을 잘 제거하였다”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의천의 글을 구해 읽은 송나라 화엄종 승려가 기쁨에 넘치는 편지를 보낸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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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1. 문화와 문명
아랍문화
아랍문화를 이른바 사라센 문화라고 한다. 사라센(sarasen)이란 말은 그리스어로 아랍인을 지칭하는 말인데, 처음에는 시리아 근처의 아랍인을 가리키던 말이었으며, 중세 이후에는 무슬림을 총칭하는 말이 되었다. 아랍·이슬람 제국이 중 근동에 번영하는 기간에, 일반적으로 사라센 문화는 아랍인이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에서 가져온 기성품도 아니고, 정복을 완수한 후 개종한 여러 인종, 즉 아랍족, 페르시아족, 이집트족, 시리아족 등의 순수한 무슬림의 문화만도 아니였다. 그것은 수많은 기독교도, 유대교도 및 배화교도 등도 이 문화를 창조하는 데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랍문화는 아랍어로 표현이 되었고, 이슬람의 인생관과 세계관으로 장식되었다. 이 문화의 알맹이는 곧 언어와 신앙의 두 가지였다. 이 둘은 아랍인이 그들의 영역 내에서 발전시킨 새롭고 창조적인 문화의 요소들이다. 아랍인이 만든 진정한 기적은 군사적인 정복보다 오히려 정복된 지역을 아랍화하거나 이슬람화한 데 있다. 11세기까지 아랍어는 페르시아에서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언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세 페르시아어, 콥트어(Coptic), 아랍어, 그리스어 및 라틴어 등과 같은 절대적인 문화언어의 위치를 흔들어 놓고 문화를 대표로 하는 수단으로 발전한 것이다. 아랍어가 널리 보급됨에 따라, 정복자로서의 아랍인과 아랍화된 피정복자의 구별은 점차 그 중요성이 시들어지고, 아랍어로 말하고 이슬람을 믿는 자는 모두 하나의 공동체, 즉 움마(Umma)에 속하는 동료로 느꼈다. 그리하여 아랍이라는 단어 자체가 본래의 유목민의 뜻으로 통용되기도 하였다. 예언자 무함마드를 시발점으로 아라비아 반도에서 생성하여 중근동지역으로 발전한 이슬람은, 단순한 믿음과 의식체계 이상이다. 또한, 그것은 국가, 사회, 법률, 사상 및 예술의 체계이기도 하다. 즉, 종교가 모든 것을 집결시키는 핵으로 작용하는 하나의 문화이다. 예언자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함에 따라, 이슬람은 곧 신에 대한 절대순종은 물로, 구체적으로는 메디나와 예언자의 종주권을, 후에는 제국과 칼리파에 대한 종주권을 뜻하였다.
이슬람은 초기에는 아랍인의 신앙이었으나, 후에는 제국의 일등국민의 신앙과 동일시되었다. 이슬람의 율법을 샤리아(Shariah)라고 하며, 이것은 쿠란(Quran)과 무함마드이 전승(Hadith)에서 법학자들이 발전시킨 율법인 것이다. 샤리아는 사회 공동체의 표준이 되는 법전일 뿐만 아니라, 인간과 공동체가 다같이 추구해야 하는 이상이며, 또 행위의 표본이 되었다. 법은 신의 계시를 통해서만 나올 수 있으므로, 이슬람은 인간 누구에게도 이 법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습법, 민법 및 통치자의 의지 등은 법학자들이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한정된 범위 내에서 인정한다. 신이 주었다는 샤리아는 믿음과 의식뿐만이 아니고, 헌법과 국제법 등의 공법과 협법과 민법 등의 사법에서 인간생활의 모든 면을 통괄한다. 그렇지만 샤리아의 이상은 헌법적인 측면에서 그 특색이 더욱 분명하다. 아랍인이 지상에 가져온 언어와 신앙도 초창기부터 외부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었다. 이슬람 이전의 시나 쿠란 속에도 외래어가 들어 있었으며, 특히 정복의 시기 동안에 많은 외래어가 들어왔다. 행정용어는 페르시아어와 그리스어에서, 신학과 종교용어는 히브리어와 시리얀어에서, 그리고 과학과 철학용어는 아랍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슬람 사회는 맹아기부터 그 자체 내에 기원이 다른 여러 요소, 즉 기독교, 유대교, 배화교의 예언서를 비롯하여 이들 종교의 법통, 말세론 및 신비주의적 사상, 그리고 페르시아의 사산조와 비잔틴 제국의 행정적인 관례 등 다양한 요소를 결합하여 발전·승화시켜 나갔다. 아마도 중요한 요소는 헬레니즘의 영향이다. 특히 과학, 철학, 예술 등과 건축양식, 그리고 어느 정도 문학 부문에서의 영향은 매우 컸다. 또, 문화의 영향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아랍문화는 그리스 문화의 유산을 이어받는 그리스 정교세계, 로마 카톨릭 세계와 더불어 그리스 문화의 계승자로 묘사되기도 한다. 아랍문화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기원이 다른 다양한 요소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아랍문화는 여러 문화를 단순히 기계적으로 병합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다양한 요소를 독창적인 새로운 세계관의 용광로에 집어 넣어 융화시켜 아랍적인 형태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무슬림이 그리스의 문화적 유산을 받아들였기 때문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학문이 대두하였고, 이슬람의 사상과 경쟁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쟁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이 두 학문에 종사하는 무슬림들은 다양하고 풍요한 문화를 창조하게 되었으며, 이 문화의 열매는 세계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종교에 의하여 규범화된 아랍사회는 이슬람의 제원리에 어긋나는 가치체계를 거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합치된다고 생각되는 원리만을 받아들여 경험과 관찰을 통하여 다듬어 갔다. 아랍문화의 본질을 분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시간상으로 보면 현재와는 천 년 이상의 간격이 있으며, 지리적으로 보아도 한극 문화권에 속하는 우리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지역이고, 또 문화적 교류도 거의 없는 지역이어서 그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다. 그리고 당시에 나온 문헌도 소수 특권층으로부터 나왔고,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여러 인종으로 형성된 일반 평민의 소리는 거의 들을 수조차 없기 때문에 그 상황의 올바른 이해는 더욱 힘들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아랍 문화의 전형적인 면만을 살펴볼 수 밖에 없다. 풍요로운 페르시아 문화를 융합시켜 오늘의 아랍문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무슬림은 우위의표시로서 비무슬림에게 일정한 사호적 및 법적인 차등책을 실시하였으며, 또 그들이 신분을 잊어버린 듯이 보이면 유효 적절한 수단으로 그들의 신분을 일깨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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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어둠을 밝혀 준 목소리
열네 살, 중학교에 막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첫 시험이 있기 하루 전날이었다. 밤에 친구집에서 함께 공부를 하기로 한 나는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섰다. 주위는 임 컴컴한 어둠이 내려 앉고 있었다. 걱정이 되신 어머니께서 배웅을 나오셨다. 친구집이 있는 동네 어귀 모퉁이에는 밤이면 귀신이 나타난다는 무서운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하나도 안 무서우니 그만 가 보세요."
나는 몇 번이나 어머니께 집으로 돌아가시라고 말했지만 어머니는 조금만 더 가자며 자꾸만 따라오셨다. 한 고개를 넘자 친구네 집 불빛이 멀리서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이제 혼자 갈 수 있으니 그만 돌아가시라고 간곡하게 말씀드렸다. 그제서야 어머니는 알았다며 나의 등을 살짝 떠미셧다. 어둠과 적막은 나의 발걸음을 빠르게 했다. 고갯길을 내려 산밑 좁은 길에 들어섰을 때 내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훈아!" "예?"하고 대답하니 어머니가 다시 말씀하셨다. "어서 가거라."
잠시 뒤 개울을 건너려는데 뒤쪽에서 어머니가 내 이름을 부르셨다. 큰소리로 "예"하고 대답하니 어머니는 또 "그래, 어서 가"하셨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언덕길을 내려갈 쯤에도 모퉁이를 돌아설 쯤에도..... 내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친구네 동네 앞에 다다랐을 때 다시 어머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목이 터져라 큰소리로 "예!"하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 고갯마루 어둠 속에 계셨으리라. 내 이름을 끝까지 불러 주신 어머니의 목소리로 나는 무사히 친구 집에 도착하였다. 그날 밤, 친구와 엎드려 공부를 하는데 그 먼길을 홀로 가실 어머니의 뒷모습이 아른거려 공책 위로 눈물이 자꾸만 떨어졌다. 어머니는 이미 칠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어서 가거라"하시던 그 목소리는 지금도 나를 지켜주고 있다.
조태훈 님/광주시 북구 운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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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1. 철학 이전 이야기: 철학의 탄생(기원전9~7세기)
그때 세계에서는 BC 1000--600년경: 중국에서 시경'원형 성립 BC 850년경: 그리스, 호메로스 활동 BC 700--500년경: 고조선, 철기문화 시작. 8조 금법 시행
1930년대의 일이다. 내가 평양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의 사회적 풍토를 회상해본다. 그 당시 평양에는 생각있는 교양인들은 기독교 신앙을 많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기독교가 두 가지 책임을 감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민족정신이며, 다른 하나는 교육을 받아야 된다는 교육적 열성이었다. 나도 그런 풍토 속에서 자랐다. 그뒤 얼마 동안 우리는 한국문학에 접촉하는 기회도 가졌다. 이광수를 비롯한 많은 작가의 작품들이 우리의 정신적 각성과 성장을 일깨워주었다. 학교에서는 초보단계이기는 했으나 화학, 물리학 공부를 했고, 화학실험실에서 배우는 것들이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고도 얼마의 세월이 지난 뒤부터야 철학에 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글로 씌어진 한치진씨의 '철학개론'이 그 즈음에야 나왔던 것이다. 책방에 가보면 종교책이 많았고 문학책이 적은 부분을 차지했는가 하면, 우리말로 된 철학책은 거의 보이지 않았을 정도이다. 어려서 내가 체험한 이런 과정을 서양철학을 공부하게 되면서도 느끼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서양철학은 그리스를 둘러싼 지중해 연안에서 발생된다. 그리고 상당한 세월이 지난 뒤에 아테네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철학운동이 전개된다. 그런데 그 초창기의 현상을 보면 철학이 먼저 탄생된 것은 아니었다. 일찍부터 보급되어 있었던 것은 종교문화다. 오르피즘 종교가 그 중심을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이집트와 중동지방에서 흘러들어온 종교가 그 당시 사람들의 정신계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생활에 필요하고 현실에서 요청되는 단편적인 생활과학이 발달되어왔다. 세계어디서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연과 더불어 생존하기 위해서는 물과 농토를 다스려야 했고, 기후와 계절을 살피는 기상학적 지식이나 초보적인 천문학이 필요했다. 그런 것들을 위해서는 기하학 같은 초보적인 과학이 필수조건이었다. 그 뒤에 탄생하는 것이 철학이 된다는 과정은 상식처럼 되어있었다. 그리스도 같은 과정을 밟았던 것 같다. 오르피즘 종교의 신앙을 이어받은 예술가들이 나타나 문학적 작품들을 쓰게 된다. 그러므로 그 표현에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연극의 형태를 취하기도 하고 시민들의 시적 작품이 등장하기는 해도, 그 내용은 대부분이 인간의 삶과 문제에 관한 신화적 형식과 성격을 밟게 되었다. 이렇게 나타난 처음 대표적인 작품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Ilias)와 오디세이아(Odysseia)라는 서사시다. 그것이 기원전 9세기의 작품이었으며, BC 7세기에 이르러 완성되었다는 것을 보면, 이것은 한 개인의 이름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내용이 오랜 뒤 완성을 보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종교시인 또는 신앙적 시인이 그 시대의 종교관과 사상을 대신했던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그것이 그리스 인들의 신앙을 이어받음과 동시에 또 그들의 사상을 만들어주었다고 볼 수도 있다.
호메로스의 글들이 일반화된 뒤에 헤시오도스(Hesiodos)의 '신통기'라는 책이 나온다. BC 7세기 때의 일이다. 이 책은 종교적 신화와 철학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수없이 많이 나오는 신화의 주인공들인 신의 계보와 조직을 배후에서 정리하며, 거기에 나타난 정신과 사상을 통해 어떤 공통된 세계관을 얻어보려고 한 노력의 산물이다. 또 신화의 주인공들은 인간에 비해 만능성을 갖고 있으나, 거기에 윤리성을 부여하여 신화를 윤리, 도덕적인 방향으로 유도해나간다. 신화의 주인공인 신들에게는 윤리성이 없었다. 선악관념이 없는 무구함이 그 특성이다. 그것이 윤리성을 갖춘다는 것은 에덴동산이 선악과가 나타나는 것 같은 새로운 발전일 수가 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의 종교사상이 철학으로 발전할 충분한 여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이 대중화되며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상형성의 길잡이가 되기 위해서는 철학보다 문학이 그 적절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문학은 일반성을 가지면서도 이론적 체계를 갖추기 이전의 대중문화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 인들이 특출한 소질의 소유자가 아니었더라면 철학은 좀더 늦게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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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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