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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34호
2012.12.11 (음10.28)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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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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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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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는 눈으로"란 옛 법을 따르면 우리는 모두 장님이 되고 말 것이다. - 마틴 루터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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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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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바루기] 수뢰
전직 경찰청장이 건설현장 식당 ‘함바집’ 운영권을 놓고 관련 업자에게서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뇌물을 받은 사람들을 단속하고 처벌해야 할 자리에 있는 공직자가 거꾸로 뇌물을 받았으니 참으로 할 말을 잊게 된다.
뇌물을 받는 것을 한자어로 ‘수뢰’라고 한다. 그런데 사전을 찾아보면 이 ‘수뢰’의 한자 표기에 조금 의아한 점이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인터넷판)과 금성판 국어대사전의 ‘수뢰’ 항목에 가보면 둘 다 한자가 ‘受賂’로 나온다. 1988년판 이희승 국어대사전을 보면 ‘수뢰’의 한자가 ‘收賂’로 돼 있다. ‘받을 受’와 ‘거둘 收’에서 차이를 보인다.
한편 법률 분야에서 쓰이는 ‘수뢰죄’를 보면 한자가 ‘收賂罪’로 나와 있다. 이 ‘수뢰죄’는 공무원 또는 중재인이 직무와 관련해 뇌물을 받거나 요구하거나 또는 받기로 약속한 때에 성립하는 범죄를 뜻한다.
동일한 행위임이 분명한데 뇌물을 받는 행위에는 ‘受賂’로, 죄목(罪目)에는 ‘收賂罪’로 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주는 뇌물을 받는[受] 것과 뇌물을 요구하거나 적극적으로 거두는[收] 것을 구별하기 위함이다. 형법상 뇌물을 받은 죄는 ‘收賂’에 해당하는 죄를 가리킨다.
[우리말바루기] 자잘못을 가리다
싸우거나 다퉈서 분쟁이 일어났을 때 종종 쓰이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자잘못’이다. “이번 사고의 자잘못을 철저히 따져 보자” “친구가 잘못한 건지, 제가 잘못한 건지 자잘못을 가려 주세요” “그 어느 쪽의 자잘못을 가리고 탓할 안목이 내겐 없다” 등등.이렇게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잘하고 잘못한 것을 가려 달라는 의미로 “자잘못을 따지다” 또는 “자잘못을 가리다”는 형태로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잘함과 잘못함’의 의미로 이처럼 쓰이는 ‘자잘못’은 바르지 못한 표현으로 ‘잘잘못’이라 해야 한다. “누가 잘하고 잘못했는지 잘잘못을 확실히 하자” “정책의 잘잘못을 짚어 줄 참모가 필요하다” “지금은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다”와 같이 쓸 수 있다.
‘잘잘못’보다 ‘자잘못’이 발음이 편리하기 때문에 많이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잘잘못’이 ‘잘(함)+잘못’의 구조로 ‘잘함’과 ‘잘못함’의 결합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바른 표현이 ‘잘잘못’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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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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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분노를 위하여 - 이재무
나는 내가 시인인 것이 자랑스럽다 바닥에 떨어진 새의 시체와도 같이 나의 심장은 싸늘히 식어버렸다 나는 이제 분노할 줄을 모른다 지난날 내 생을 다스려온 그 아름다운 분노는 부지런히 죄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내 생을 떠나버렸다 나는 이제 울지 않고도 크게 세상을 말할 줄 알게 되었다 더러운 추문과 스캔들에 두 눈 반짝이는 나는, 시집을 다섯 권이나 낸 시인이다 거듭 실패하는 동안 제법 독자들의 취향이나 입맛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분노는 내 생을 불편케 할 뿐이다 매향리가 미군에 폭격을 당해도 나는 화가 나지 않는다 나는 북한 어린이가 굶어죽어도 눈물은커녕 비웃음만 나온다 동남아시아 가난한 나라 밀입국한 나이 어린 노동자들이 산재당해 오 년치 칠 년치 임금 고스란히 병원비로 날려버려도 그것은 그들 개인의 불운일 뿐 나는 이제 가슴이 벌집인 양 숭숭 뚫리지도 매 맞은 개구리 뒷다리마냥 벌벌 떨리지도 않는다 나 이제 살 만하다 그러니 청승을 강요하지 말라 나는 이제 길바닥 아무렇게나 놓인 돌이 되어버렸다 누군가 내 몸을 토막 난 막대기로 잘못 알고 함부로 걷어차도 인내에 익숙한 나는 아마 견성한 도인처럼 허허허, 웃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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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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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2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1. 꿈을 이루기 위한 스프
믿음의 마술 난 아직 축구나 야구를 시작할 만큼 나이를 먹진 못했다. 난 아직 아홉 살도 안 됐다. 엄마는 내가 야구를 시작한다 해도 다리 수술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그다지 빨리 달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난 엄마에게 말했다. 난 그렇게 빨리 달릴 필요가 없다고. 내가 일단 야구를 시작하면 언제나 담장 밖으로 홈런을 날릴 테니까 말이다. 그런 다음에 난 천천히 뛰어가면 되는 것이다. 에드워드 J. 맥그라트 2세
<인생을 보는 특별한 시각>에서 인용
릭 리틀의 추구
새벽 다섯시. 릭 리틀은 졸음 운전을 하다가 3미터 높이의 강둑에 부딪친 뒤 길가에 서 있는 가로수와 정면 충돌했다. 이 사고로 부러진 척추를 치료하느라 릭은 여섯 달이라는 긴 시간을 병 원 침대에서 보내야만 했다. 이 기간 동안 릭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어느 때보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난 13년 동안 받아 온 학교 교육이 채워 주지 못한 것이 그의 삶에는 있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2주일 뒤, 릭이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의식 을 잃을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릭은 또다시 절감했다.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인간 관계의 문제나 감정적인 문제들에 대해 형식적인 학교 교육이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 후 여러 달에 걸쳐서 릭 리틀은 한 가지 구상을 했다. 학생들에게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법 과 인간 관계의 기술,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 등을 가르치는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이 그것이었다. 릭은 이 프로그램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 찾아다니다가 국립 교육원에서 실시한 설문 조사를 접하게 되었다. 서른 살의 성인 남녀 1천 명에게 학교 교육이 과연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 주었는가를 묻는 질문에 80퍼센트 이상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 1천 명에게, '그렇다면 학교가 무엇을 가르쳐 주기를 희망하는냐고 묻자 가장 으뜸 가는 대답이 인간 관계의 기술에 대한 것이었다.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과 잘 지내는 법, 좋은 직장을 찾아 그곳에 오래 머무르는 법,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해결하는 법, 좋은 부모가 되는 법, 자녀늘 정상적으로 키우는 법, 경제적인 문제를 관리하는 법, 그리고 삶의 의미를 배워 나가는 법 등이 사람들이 배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릭은 이런 내용들을 가르치는 새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한 의지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그는 다니던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고등학교 학생들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미국 전역 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프로그램에 넣을 내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120개 고등학교의 학 생 2천 명에게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1. 자신이 현재 안고 있는 문제나 앞으로 부딪치게 될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교육 프로그램을 고등학교 과정에서 만든다면, 나 자신은 어떤 내용의 프로그램을 만들 것인가? 2. 학교나 가정에서 자신이 훌륭하게 처리하길 원하는 인생 문제 10가지를 적어 보라.
부유한 집안의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에서나 도심지의 빈민가 학교에서나, 또는 시골 학생 이거나 도시 학생이거나 대답은 놀라울 정도로 똑같았다. 외로움, 그리고 자기 자신이 싫다는 대 답이 인생 문제의 우선적인 항목이었다. 또한 학생들은 서른 살의 성인 남녀가 대답한 것과 똑같 이 삶의 기술들을 배우기를 원하고 있었다. 릭 리틀은 이 조사를 하는 두 달 동안 차 안에서 잠을 잤으며, 전부 합쳐 60달러로 생활했다. 대부분의 식사는 크래커와 땅콩 버터로 때웠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날도 많았다. 릭은 무일푼에 다 후원자도 없었지만,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데 온 정열을 쏟았다. 릭의 다음 단계는 인생 상담과 심리 치료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미국 전역의 유명한 교육자와 카운셀러들의 명단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릭은 명단에 적힌 사람들을 한 사람씩 찾아가서 그들의 자문과 지원을 요청했다. 전문가들은 릭의 새로운 접근 방식, 즉 무엇을 배우고 싶어 하는가를 학생들에게 직접 물어 보는 방식에 대해선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구체적인 도움을 주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들이 릭에게 하는 말은 격려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자넨 너무 어려. 대학으로 돌아가게. 먼저 학위를 따야지. 그 다음에 대학원에 진학해서 이 연구를 계속하게나." 하지만 릭은 포기하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릭은 이미 자동차와 옷가지들을 전부 팔아 버린 뒤였고, 친구들한테 진 빚이 3만 2천 달러나 되었다. 그때 누군가 릭에게 사회 재단을 찾아 가서 후원금을 요청해 보라고 제안했다. 맨 처음에 찾아간 사회재단은 실망만 안겨 줄 뿐이었다. 재단 사무실로 들어가 릭은 겁이 나서 문자 그대로 온몸이 덜덜 떨렸다. 재단의 부회장이란 사람은 덩치가 크고 냉정하기 짝이 없는 얼 굴 표정을 한 남자였다. 릭이 30분이 넘도록 열의를 다해서 어머니의 자살 시도 사건과 2천 명의 학생들에 대한 설문 조사, 그리고 고등학생들을 위한 새로운 내용의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계획을 설명하는 동안 그 남자는 말 한마디 없이 듣고만 있었다. 릭의 얘기가 끝나자 부회장은 한 묶음의 서류뭉치를 릭 앞에 던지면서 말했다. "이보게 친구, 난 이곳에서 20년이 넘도록 일해 왔네. 그 동안 우리 재단은 여기에 적힌 교육 프로그램들을 전부 후원했지. 그런데 결과는 모두 실패였어. 자네의 계획도 실패로 끝날 거야. 이 유가 뭐냐구? 그거야 분명하지. 자넨 스무 살밖에 안 됐고, 아무런 경험도 돈도 없으며, 대학 졸업장조차 없어.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다구!" 재단 사무실을 나서면서 릭은 그 남자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 다.
릭은 먼저 어느 재단이 십대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몇 달에 걸쳐서 후원금 신청서를 작성했다. 그것은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이른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그 일에 매달려야 했다. 각 재단의 관심 방향과 요구 사항에 맞춰 별도의 후원금 신청서들을 작성하느라 꼬박 일 년이 걸렸다. 릭은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신청서들을 각 재단으로 발송했다. 그것들은 곧바로 되돌아왔다. 모두가 거절당한 것이다. 릭이 보내는 모든 신청서가 거부를 당했다. 155번째의 신청서마저 거부당하자 그나마 릭을 지원하던 힘들이 무너져 내렸다. 릭의 부모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으며, 교육학자이면 서 그 동안 직장을 떠나 릭의 신청서 작성을 도왔던 켄 그린도 말했다. "릭, 난 이제 돈이 한푼도 안 남았네, 내겐 돌봐야 할 아내와 아이들이 있어. 아제 마지막 한 번의 신청서에 더 기대를 걸어 보겠네. 만일 그것마저 실패한다면 톨레도의 교사 생활로 돌아가 겠어." 릭에게는 마지막 한 번의 기회만이 남았다. 절망 속에서도 아직 확신을 버리지 않은 릭 리틀은 몇 명의 비서관들을 설득해 켈로그 재단의 회장 루스 모우비 박사와 점심 약속을 얻어 내는 데 성공했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중간에 모우비 박사와 릭은 우연히 아이스크림 가게를 지나치게 되었다. 모우비 회장이 물었다. "하나 먹겠나?" 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릭은 떨리고 당황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아이스크림콘을 짓 누르고 말았다. 콘이 부서지고 초코렛 아이스크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릭은 흘러내린 아이스크림을 닦아 내려고 몰래 애를 썼지만 모우비 박사가 금방 눈치채고 말았다. 모우비 박사는 웃음을 터뜨리고는 아이스크림 파는 사람한테로 다시 가서 냅킨 여러장을 갖다 주었다. 젊은 친구는 홍당무가 된 얼굴로 차에 올라탔다. 스스로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이스크림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친구가 어떻게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보조금을 신청할 수 있단 말인가.
그로부터 2주일 뒤 모우비 회장이 릭에게 전화를 걸었다. "릭, 자네는 우리에게 5만 5천 달러의 후원금을 신청했네. 미안하지만 우리 위원회의 투표 결과 그 신청을 거부되었네." 릭은 눈물이 쏟아지기 직전이었다. 하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두 해 동안이나 정열을 바쳤는 데 이제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모우비 회장이 말했다. "우리 위원회에서는 그 액수로는 자네의 프로그램을 실행하기에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지. 그래서 자네에게 13만 달러의 후원금을 주기로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았네." 그 말을 듣는 순간 릭은 기쁨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더듬거리는라 감사하다는 말조차 제대 로 할 수 없었다. 그 이후 릭 리틀은 자신의 꿈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1억 달러의 기금을 모집했다. 그가 만든 '삶의 기술 프로그램(The Quest Skills Program)'은 현재 32개 나라와 미국 50개 주의 3만여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해마다 3백만 명의 아이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삶의 중요한 기술들 을 배우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열아홉 살의 한 젊은이가 '그건 불가능해!'라는 주위의 지적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뤄진 것이다.
1989년에 '삶의 기술'프로그램의 믿어지지 않는 성공에 힘입어 릭 리틀은 자신의 꿈을 더 넓 혔다. 그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큰 규모의 후원금인 6천5백만 달러를 모집해 '세계 청소년 협회(The International Youth Foundation)'를 설립했다. 이 협회의 목적은 전세계의 성공적인 청소년 프로그램들을 서로 연결하고 확대시켜 나가기 위한 것이었다. 릭 리틀의 인생은 소중한 영감에 바쳐진 정열의 산 증언이며, 더불어 자신의 꿈을 이룰 때까지 끝없이 추구해 간 인행의 표본이다.
페기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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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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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계 교수의 철학 이야기 - 탈레스에서 라캉까지
제6부 현대 철학 이야기
들뢰즈 : 생동하는 이미지
들뢰즈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처럼 전통형이상학의 철학을 해체하려고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선험적인 제1원리를 고집하지도 않는다. 들뢰즈는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 흄,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베르그송 등의 사상을 철학사적 맥락에서 연구하였고 그들의 사상을 종합하여 생동하는 철학함의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들뢰즈의 철학은 철학사적 고찰을 바탕으로 성립하지만 그의 철학사는 서양철학사 전체를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선별적으로 철학자들을 골라서 그들의 사상만 탐구한다. 그 결과 들뢰즈는 전통형이상학과 포스트모더니즘 양자를 모두 연결할 수 있는 중도적 철학을 구성한다.
들뢰즈의 철학은 단순히 정지되어 있는 형식논리를 떠나서 차이와 우연을 부가시키며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주장하는 기표와 기의의 기호가 아니라 사건 내지 사태로서의 대상을 탐구한다. 또한 들뢰즈의 철학은 지속의 철학이므로 힘의 내용과 표현형식을 이분법으로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힘의 내용과 표현형식은 분리 불가능하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시간과 강도와 지속은 모두 뿌리줄기(rhizome) 이다. 뿌리줄기는 객관이나 주관을 고정시키는 단위가 아니고 항상 생성 변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들뢰즈가 그의 동료인 정신분석학자 가타리와 함께 말하는 뿌리줄기는 구조적이거나 발생적인 관계가 아니라 다른 뿌리줄기와 연결될 수 있으므로 뿌리줄기의 어떤 점은 수시로 소멸하고 동시에 생성된다.
이미지-운동과 이미지-시간 들뢰즈는 부분들을 고려하지 않는, 다시 말해서 부분들을 초월하여 전체를 주장하는 철학을 벗어나서 연속적인 운동의 관계를 주장한다. 전통형이상학의 철학은 독단적 원리를 강조했음에 비해서 들뢰즈는 생성 변화하는 관계(뿌리줄기들의 관계)를 제시한다. 특히 들뢰즈는 <이미지-시간>과 <이미지-운동> 두 저술을 통해서 물질과 기억(정신)의 특징 및 관계를 밝힌다. 들뢰즈가 이미지를 논의하는 것을 보면 그가 베르그송의 생명의 약진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들뢰즈는 물질과 기억 역시 분리 불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미지-시간(기억-지속)의 관계 또는 확장에 의해서 이미지-운동(물질)이 산출되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은 물질이나 공간은 단지 실용적 지성의 산물이고 물질과 공간도 궁극적으로는 생명의 약진인 지속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전통을 이어 받으면서 물질은 뿌리줄기(rhizome)들로서의 지속의 관계 내지 확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예컨대 우리는 영화를 감상하면서 생생한 역동적 감동에 젖는다. 영화필름은 수많은 조각으로 연결된 공간적 물질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우리가 영화를 감동적으로 감상하는 이유는 물질적 영화필름의 근거가 바로 이미지-시간(기억-지속)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창조는 개념의 창조이다 들뢰즈는 정신분석학자이며 정치활동가인 가타리와 세 권의 저술을 공저하였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두 권은 각각 <앙티-외디푸스>, <백 개의 고원>의 부제목을 가지고 있으며 전자는 현대사회의 허무주의적 성격을 분석하고 있고 후자는 무수한 뿌리줄기(rhizome)들, 곧 개방된 전체의 실현을 의도하고 있다. 소쉬르는 기호에 있어서 청각상(signifiant)과 개념(signifie)을 구분하지만 들뢰즈는 어떤 사건에 의해서 내용과 형식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내용과 형식을 절대적으로 구분하면, 개방된 전체가 드러날 수 있다. 들뢰즈는 가타리와 함께 철학의 과제는 과학의 과제와 다르다고 말한다. 과학은 진리와 창조의 외적 국면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추구하는 데 비해서 철학은 개방된 전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곧 기억-지속을 제시하기 위하여 개념을 창조한다. 과학은 사건의 상태와 물체의 혼합을 추구하지만 철학은 지속적 사건의 내재적 변화로부터 개념들을 창조한다. 세계의 근원인 뿌리줄기를 지속적이고 창조적으로 보는 들뢰즈에게 있어서 철학의 과제가 개념을 창조하는 데 있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개념은 기존의 정지된 형식적 단어가 아니고 베르그송이 언급한 개방 도덕이나 동적 종교에 대응한다. 들뢰즈는 뿌리줄기들이 구성하는 부정적 국면과 긍정적 국면 양자를 모두 보면서도 개방된 전체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는 후기 산업사회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암울한 모습을 응시하면서도 창조적 기억-지속의 가능성을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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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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爭先恐後(쟁선공후) 爭(다툴 쟁) 先(먼저 선) 恐(두려워할 공) 後(뒤 후)
한비자(韓非子) 유로(喩老)편의 이야기. 춘추시기, 진(晋)나라에는 왕자기(王子期)라는 유명한 마부가 있었다. 조(趙)나라의 대부 양주(襄主)는 왕자기에게서 말 부리는 기술을 배우고, 그와 마차 달리기 시합을 했다. 그러나 양주는 세 번이나 말을 바꾸었지만 모두 지고 말았다. 몹시 불만스런 표정의 양주에게 왕자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을 제어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의 몸과 수레가 일치되어야 하고, 또 부리는 사람과 말의 마음이 일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부께서는 저를 앞지르고자 초조해 하고, 또 앞서 달릴 때에는 제가 뒤쫓아오지나 않을까 하여 걱정하셨습니다(君後則欲逮臣, 先則恐捷于臣). 대부께서는 앞서든지 뒤서든지간에 내내 저에게 마음을 쓰고 계시니, 어떻게 잘 달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대부께서 저에게 뒤처진 까닭입니다.
爭先恐後란 격렬한 경쟁의 모습을 뜻한다. 영어에서도 The Devil takes the hindmost(악마는 꼴찌를 잡아간다) 라고 했다. 모든 경쟁에서 앞자리만을 다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특히 고3 학생들의 입시 경쟁은 치열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하다. 증가하는 학생 자살도 사실 爭先恐後의 결과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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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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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자서전. 시민의 불복종 - 간디 / 함석헌 역
제1편
25. 나의 무력
면허 얻기는 쉬웠으나, 법정에서 실지 일을 하기는 어려웠다. 법률을 읽기는했으나 법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배우지 못했다. 흥미를 가지고 법률금언집 은 읽었으나, 그것을 내 직업에 어떻게 적용할지는 몰랐다. '네 소유물을 쓰되 남의 소유물을 해치지 않도록 쓰라'가 그중의 하나였는데, 나는이것을 나의 변호 의뢰자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활용할지를 알 도리가 없었다. 나는 이 금언에 관한 지도적 관례를 모조리 읽어 봤다. 그러나 그것은 이 금언을법 활용에 있어서 어떻게 적용할 것이냐 하는 데서는 내게 확신을 조금도 주지못했다. 그뿐 아니라 나는 인도법에 관하여는 전연 배운 것이 없었다. 또한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법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는 터럭만큼도 아는 것이 없었다. 소송장 쓰는 것조차도 배우지 못해서 앞이 캄캄했다. 나는 페로제샤 메타 경은 법정에서 사자같이 호통을 친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그것을 어떻게 영국에서 배웠을까 하고 나는 의심했다. 그러한 법률적 재능을 얻는 것은 나로서는 생각조차도 못했고, 도대체 이 직업으로 밥을 먹을 수 있을까가 걱정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법률을 공부하고 있는 동안 나는 이런 의심과 걱정으로 가슴이 찢어졌다. 이런 어려움을 나는 몇몇 친구에게 털어 놓았다. 그중 한 사람은 나에게 다다바이 나오로지에게 조언을 구해볼 것을 제언했다.
그런데 내가 영국으로 갈 때에 그에게 줄 소개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이미 앞에서 한 바 있다. 나는 그것을 너무 늦게야 사용했다. 나는 그런 위대한 분을 만나자고 해서 수고를 끼칠 만한 권리가 내게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언제나 그가 연설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나는 참석하곤 했다. 그래서 강당 한구석에서 듣고는 그를 보고 들은 것만으로 흐뭇이 여기고 와버리곤 했다. 학생들과 가까이 접촉하기 위하여 그는 모임을 만들었다. 나는 그 모임에 참석하였는데, 다다바이가 학생들을 염려해 주고 학생들이 그를 존경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그러던 중에 나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그 소개장을 내놓았더니, 그는 말하기를 언제나 원하는 대로 찾아와서 내 말을 들으시오. 했다. 그러나 나는 그 호의를 한번도 이용하지 않았다. 나는 생각하기를 아주 긴한 일 없이 그를 수고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어려움을 다다바이에게 털어 놓으라고 친구가 말했을 때에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또 내게 프레더릭 핀커트씨를 만나라고 권했던 것이 바로 같은 그 친구였던지 그렇지 않고 다른 친구였던지 지금은 잊어버렸다. 그는 보수당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인도 학생에 대한 애정은 순수하고 무사한 것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그의 조언을 구했고 나도 만나게 해달라고 청했더니 승낙해 주었다. 나는 그 만남을 잊을 수 없다. 그는 나를 친구처럼 반겨주었다. 그는 나의 비관을 웃어 버렸다. 그대는 그래 모든 사람이 다 페로제샤 메타 같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가? 페로제샤나 바드루딘 같은 사람은 드문 법이네. 보통의 변호사가 되는 것은 각별한 재주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야. 보통으로 정직하고 부지런하면 살아가는 데는 문제 없네. 모든 사건이 다 복잡한 것은 아니니까. 그것은 그렇고, 자네의 일반 독서 범위나 말해보게. 내가 나의 얼마 안되는 독서의 밑천을 알려드렸을 때 그는 좀 실망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고, 곧 얼굴에 쾌활한 미소를 띠면서, 내가 자네의 걱정을 알겠네. 자네는 일반 독서가 부족해. 자네는 세계를 몰라. 그것은 변호사에게 꼭 필요한 것이네. 자네는 인도 역사조차도 읽지 못했단 말이야. 변호사는 인간성을 알아야 해요.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 성격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해. 그리고 인도 사람이라면 인도 역사를 알아야지. 이것은 법률을 직업으로 삼는 데 직접 관계는 없지만 그 지식은 꼭 가져야 해. 내가 보니 자네는 케이와 말레슨이 쓴 1857년의 폭동에 관한 역사도 읽지 않았어. 즉시 그것을 읽고, 그리고 인간성을 이해하기 위해 책 둘만 더 읽으시오. 그것은 인상학에 관한 레베이터와 멜페니크의 책들이오. 나는 이 존경할 만한 친구에 대해 한없이 감사했다. 그의 앞에서는 모든 두려움이 다 사라진 듯했는데 그를 떠나자 나는 또다시 걱정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얼굴로 그 사람을 안다 는 문제가, 집으로 오며 그 두 책 생각을 하는 동안, 나를 떠나지 않고 괴롭혔다. 다음날 나는 레베이터의 책을 샀다. 멜페니크의 것은 그 상점에서 살 수가 없었다. 레베이터의 책을 읽었는데 스넬의 평등 보다도 더 어려워서 별로 흥미가 없었다. 셰익스피어의 인상학을 공부했으나 런던의 거리를 내왕하는 셰익스피어들을 찾아내는 묘방은 얻지 못했다.
레베이터의 책은 내 지식을 더해 주지 못했다. 핀커트 씨의 조언은 직접으로 별로 도움이 되진 못했으나 그의 친절은 크게 힘이 됐다. 미소를 띠는 확 트인 그의 얼굴은 내 기억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해준, 페로제샤의 재능이나 기억력이나, 능력이 변호사로서 성공하는 데 절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정직과 근면이면 충분하다는 조언을 나는 믿는다. 그리고 나중의 두가지는 나도 얼마쯤 자신이 있으므로 좀 안심이 됐다. 케이와 말레슨의 책은 영국에서는 읽지 못했으나, 기회만 있으면 그 책부터 꼭 읽자고 마음 먹고 있었으므로 남아프리카에서 읽게 되었다. 이와 같이 실망 속에 조그만 희망의 누룩을 넣어 가지고 나는 기선 아삼 호로 봄베이에 상륙했다. 항구 안에 파도가 심했기 때문에 나는 조그만 증기선으로 부두에 와 닿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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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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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 6장 제우스의 아들과 딸
9. 아테나
그리스의 아테나(Athena, Minerva)여신을 로마인은 이탈리아의 수공예 여신 미네르바와 동일시한다. 아테나는 제우스와 메티스의 딸인데 메티스가 임신하여 분만일이 다가오자 제우스는 그녀를 삼켜 버렸다.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말이 아들을 낳으면 신권을 찬탈할 것이고, 딸을 낳으면 외손자가 생겨 제우스를 천상에서 추방할 것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제우스는 심한 두통을 느끼고 헤파이스토스에게 도끼를 가져와 머리에 일격을 가하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거기서 창과 방패 등으로 완전 무장한 낭자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그녀는 함성을 질러 천지를 뒤흔들었다. 이 낭자가 바로 아테나로, 리비아의 트리토니스 호반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트리토게네이아라는 별칭이 붙여졌다. 어린 아테나는 트리톤이 길렀으며 트리톤의 딸 팔라스와 사이좋게 지냈으나 전쟁놀이를 하다 팔라스를 죽게 하였다. 이에 아테나는 팔라스를 신상으로 조각하여 신통력을 지니게 하였는데 이 신상이 트로이 시의 방어신인 팔라디움이다. 또한 그녀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에 계승하여 팔라스 아테나라고 하였다. 거인족과 신족 간의 격전에서 팔라스 아테나는 거인족의 괴물 팔라스(트리톤의 딸과 동명이인)와 엔켈라도스를 처치하였다. 처치한 팔라스의 가죽을 벗겨 자신의 가슴받이로 하고 엔켈라도스는 멀리 시칠리아까지 추격하여 에트나 화산으로 덮쳐 묻어 버렸다. '일리아드'에서는 아카이아(그리스) 쪽에 서서 싸우고 있는데, 이다 산의 미의 경연에서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내린 판가름에 한을 품고 트로이에 적개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중에 여신은 디오메데스, 오듀세우스, 아킬레스 및 메넬라오스를 비호하였다. 마찬가지로 헤라클레스도 비호하였는데 특히 어려운 노역을 하게 되자 그를 무장시켰고 또 놋쇠징을 주어 스튬팔로스 호수의 새떼인 스튬팔리데스를 놀라게 해 활로 쏘아 떨어뜨리기 쉽게 해 주었다. 이 때문에 헤라클레스는 노역을 마친 후 에우류스테우스에게서 헤스페리데스의 황금사과를 돌려받아 아테나에게 주었으며 거인족과의 싸움에서는 아테나를 도왔다.
아테나는 인간 중에서는 오듀세우스를 가장 아꼈다. 오듀세우스의 이타카 귀향을 도와주기 위해 표류중에 어려 모양의 인간으로 변장하여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파이아키아 왕의 딸 나우시카에게는 꿈을 통해 왕궁의 빨래를 나귀에 싣고 궁녀들과 바닷가로 향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녀로 하여금 여기에서 난파당한 오듀세우스를 만나 구조케 하고 자비심을 발휘케 하여 귀중한 배 한 척을 내 주어 고향으로 떠날 수 있게 하였다. 오듀세우스가 오규기아 섬에서 난파당하였을 때는 요정 칼륨소로부터 후대를 받고 함께 산다면 불사신으로 화신하게 해 주겠다는 제의를 받아 7년간이나 체류하였으나 아테나가 제우스에게 오듀세우스를 고향으로 보내는 것이 본인의 의사이며 도리라고 하여 결국 놓아주게 만들었다. 당시 오듀세우스는 칼륨소와의 사이에 나우시투스와 나우시누스라는 아들을 두었다고도 전한다.
아테나는 그리스 세계에서 자신에 대산 숭배가 지배적이었던 도시 아테네를 매우 아꼈다. 이성, 입법, 예술, 문예를 꽃피게 한 아테나 여신은 음악의 신으로도 추앙받았으나 실질적으로 시문과 음악보다는 철학에 더 긴밀한 연계성을 갖고 있었다. 또한 기능공의 여신으로 직물, 자수 수공예를 발달시켰으며 그에 대한 자부심 또한 컸다. 그래서 직물자수에 능한 아라크네라는 한 낭자가 우쭐하여 아테나도 자신을 따를 수 없다고 한 말에 그녀와 경연을 벌인 끝에 억지로 이기고 그녀를 거미로 화신시켜 버린 일도 있었다. 아테나의 천성을 전투정신에 연결시켜 4필의 말이 이끄는 전차, 2륜 전차를 발명하였다고 하기도 하며 거대한 아르고 호의 건립도 지휘한 것으로도 추앙하였다. 한편 아테나의 천성을 평화의 기량으로 추앙하여 아티카에 올리브 나무 재배와 올리브유를 발견한 여신으로도 숭배하였다. 즉 아티카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포세이돈과 갈등이 생겼을 때 두 신 중 아티카에 최고의 선물을 한 신에게 그 권한을 부여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에 포세이돈은 삼지창으로 땅을 찔러 아크로폴리스에 소금물 샘이 솟아오르게 하고 아테나는 이 언덕에 올리브 나무를 자라게 하였다. 올림포스 주신은 올리브 나무가 더 귀중하다고 판정을 내렸고 이후 아티카는 아테나의 관할권으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아테네의 아크로 폴리스 언덕에 서 있는 장엄하고 우아한 파르테논은 바로 이 아테나 여신에 봉헌된 신전이다.
[그리스 고고학 박물관 : 방패(아에기스[이지스]Aegis)를 든 아테나 여신상]
이 밖에도 여러 지역에서 아테나 여신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떠 받들어졌다. 아테네에서 멀리 떨어진 스파르타, 메가라, 아르고스 및 그 외 나라 성체에서 여신의 신전을 봉현하였다. 트로이에서도 옛 팔라디움 성상을 모시고 숭배하였으며 팔라디움이 있는 한 트로이 시는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졌다. 그래서 디오메데스와 오듀세우스가 야밤에 트로이 시에 잠입하여 이 성상을 몰래 들고 나와 도시 수호의 상징을 없앴던 것이다. 역사시대에 와서는 로마의 베스타 사원에 모신 팔라디움이 바로 그 성체이며 로마시 수호의 상징이 되었다. 한편 아테나는 처녀성을 자부하고 순결을 지키는 신으로 되어 있는데 일설에는 아들이 있다고 한다. 즉 어느 날 아테나가 갑옷을 부탁하기 위하여 헤파이스토스 대장간에 들렀는데 때마침 아프로디테에게 배신당한 헤파이스토스가 아테나를 보고 첫눈에 반하여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였다. 이에 기겁한 아테나는 그를 피해 도망쳤으나 결국 헤파이스토스에게 붙잡혀 포옹을 당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 이상을 허용하지 않았으나 헤파이스토스의 열정의 흔적인 정액이 아테나의 다리에 묻게 되었다. 불쾌히 여긴 그녀는 털헝겊으로 이를 닦아 땅에 내던졌다. 이것이 대지의 여신 가이아에게 수정되는 바람에 에릭토니오스가 태어났는데 이는 털(erion)과 땅(chthon)의 합성어다. 아이를 받은 아테나는 그를 자기 아들로 삼기로 마음먹고 다른 신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길렀다. 아이를 불사신으로 만들고자 바구니에 넣어 뱀에게 감시하게 하고, 아테네 왕의 공주 아글라우로스에게 극비로 양육할 것을 위탁하였다. 그런데 공주의 자매들이 호기심이 발동하여 바구니를 열어보았다가 아기와 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실성, 아크로폴리스에서 몸을 던졌다고 한다. 에릭토니오스는 신성한 경내로 옮겨져 후에 아테네의 왕이 되었다.
아테나의 상징은 창, 헬멧 및 양가죽 방패이며 제우스와 같이 사용하였다. 그리고 페르세우스가 여신에게 선사한 고르곤족 메두사의 머리를 방패에 달았다. 비록 잘린 머리지만 메두사의 눈은 이를 쳐다보는 모든 인간을 돌로 화신시키는 괴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식물은 올리브 나무고 새는 부엉이다. 아테나가 '부엉이 눈을 한'이라는 뜻의 별칭 글란코피스로 불리는 것이나, '쓸데없는 짓을 하다'나 '사족을 붙이다'는 뜻의 영어속담 'Bring owls to Athens'가 생긴 것은 모두 이 부엉이와 연관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아테나는 크지만 조용한 자세로 부드럽고 기품을 풍기는 여신으로 전해진다. 시문에서는 맑고 아름다운 눈의 여신이라 하고 심리학에서는 지혜와 진실의 여신으로서 정신적 투쟁을 상징한다.
니케
니케(Nike)는 승리의 뜻을 의인화한 여신신으로 로마인은 빅토리아라 하며 날개가 있고 빠른 속도로 난다. 헤시오도스에 의하면 티탄족인 팔라스와 스튝스의 딸이며 그녀에게는 젤로스, 크라토스 및 비아라는 자매가 있다고 한다. 올림포스 신들 편에 서서 티탄족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제우스의 찬양을 받은 니케는 경기에서는 승리의 여신이며, 그리스가 페리시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급격히 각광을 받아 군대의 여신으로 아테나 여신과 대응하는 여신이 되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는 니케 신전(아테나 니케 신전이라고도 한다)이 있으며 그 외 그리스 각지에 신전이 있다. 로마에는 팔리티네 언덕에 여신의 신전이 있다. 올림피아 출토 여신상과 사모트로라케 여신상이 유명하다.
팔라스 팔라스(Pallas)는 티탄족의 한 명으로 크레이오스와 에우류비아(폰토스의 딸)의 아들이며 아스트라이오스와 페르세스와 형제간이다. 스튝스를 아내로 맞이 하여 네케, 젤로스, 크라토스 및 비아라는 네 딸을 두었다.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팔라스는 기간테스와 올림포스 신족 간의 전재에서 아테네에게 살해당한 거인이다. 아테나는 이 거인의 껍질을 벗겨 갑옷으로 만들고 그 날개를 발에 부착하였다. 일설에는 아테나 여신의 아비였는데 딸을 범하려다 죽임을 당하였다 한다. 또 같은 이름을 가진 것으로 어려서 아테나 여신과 함께 자란 트리톤의 딸이 있는데, 아테나와 전쟁놀이를 하다 잘못하여 죽게 되었다. 그녀의 죽음을 비통해한 아테나는 그녀의 목상을 파서 갑옷을 입히고 신상으로 하였다. 이 신상을 팔라디움이라 하며 이것을 소유하는 도시를 수호해 주는 영험을 지니고 있었다. 그 후 아테나는 자신의 이름을 팔라스 아테나라고 부르게 되었다.
팔라스와 켄타우로스 (1480년경) -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1445-1510)
[미술 평론가 이구열 님의 평]
도끼 모양의 기다란 창을 손에 가진 지혜와 전쟁의 여신 팔라스가 화살집을 둘러메고 오른손에 활을 쥐고 있는 폭력과 무지를 상징하는 반인 반마 (半人半馬)인 켄타우로스의 머리털을 부드럽게 거머잡고 있는 광경이다. 팔라스는 뭔가 생각에 잠긴 우아한 표정을 짓고 있고, 그녀의 옷에는 메디치 가문이 사용한 다이아몬드 문양이 들어 있으며 감람나무 가지가 얽혀 있다. 반면, 켄타우로스는 슬픈 표정에다 겁을 집어먹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 그림은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디 피에르 프란체스코를 위해 그려진 것으로 말해지고 있고, 19세기 중엽에 피티궁에 들어갔다가 1922년 이래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왔다. 제작 연도는 로렌초가 나폴리 왕으로 하여금 피렌체 시민에게 적대하지 않도록 설득에 성공한 뒤,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귀국한 1480년 설과 메디치 가문이 더욱 확고한 정치적 기 반을 굳히는 1486년 설이 있다. 그러나 작품 양식으로 미루어, 이 화가가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를 그린 뒤에 로마에서 피렌체로 돌아간 직후인 1482~83년 무렵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한편, 이 작품은 앞에서 언급한 메디치 가문의 정치적 숭리의 상징설 외에 이성(理性 : 팔라스)이 본능(本能 : 켄타우로스)을 제어한다는 도덕적 내면이 상징되어 있다는 해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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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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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2 - 류시화
오렌지 세 알
처음에 나는 대참사가 일어난 줄만 알았다. 지진과 화재와 폭우가 그 도시를 무참히 유린한 것만 같았다. 호텔들은 무너지고, 불에 타거나, 홍수에 떠내려가고 없었다. 구월도 어느덧 중순에 접어들 무렵, 나는 인도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유산으로 일컬어지는 타지마할을 보기 위해 기차를 타고 북인도 아그라 시에 도착했다. 자정이 넘는 시각이었지만 기차역은 관광객과 쿨리(짐꾼), 여행자들, 손님을 끌기 위해 고함치는 릭샤꾼들과 호텔 호객꾼들로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저녁 나절에 도착하기로 된 기차가 다섯 시간이나 연착하는 바람에 밤늦게 도착한 것이다. 나 같은 여행자로선 무엇보다 숙소를 정하는 일이 급했다. 내가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백 명이 넘는 릭샤꾼과 호텔 호객꾼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싸구려 여인숙으로 데려가서는 턱없이 비싼 방값을 요구하는 게 그들이었다. 이미 인도 여행을 몇 차례나 다닌 나였기에 이제는 어떤 사기꾼에게도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인간이 만든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꼽히는 타지마할 때문에 아그라에는 전세계 여행자들의 발길이 1년 내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인도에서 호객꾼들의 등쌀이 가장 심한 곳도 바로 아그라이다. 호객꾼들은 이제 수법이 다양해져서, 멋진 옷에 선글라스를 끼고 거리에서 우연히 아는 체를 한다. 그리고는 학생이나 은행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외국의 여러 나라에 대해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마침내 그들이 기꺼이 초대하는 '우리 집'에 따라가 보면 그곳은 영락없이 기념품 가게이다. 그들은 으레껏 그곳이 자신의 삼촌이나 형님이 운영하는 곳이라고 소개를 한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나는 이미 그런 얕은 수작쯤은 파악하고 있었다. 어느덧 인도여행에 도가 텄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바였기에 나는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호객꾼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주의 깊은 시선으로 적당한 인물을 찾았다. 나로선 내 명령에 따라 충실히 내가 원하는 호텔로 데려다줄 어리숙한 릭샤 운전사가 필요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푼 줍쇼!"를 외치는 걸인들까지 떼어놓고 무사히 역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곳에 마침내 내가 찾던 인물이 눈에 띄었다. 아직 나이가 어리고, 자신감이 결여돼 있고, 왠지 서툴러 보이는 릭샤꾼이었다. 그는 감히 고참들을 따라 플랫품까지 들어가지도 못하고 역 건물 밖에서 혼자 서성대고 있었다. 그러니 자기한테 차례가 올 리도 없었다. 바로 내가 바라던 그런 친구가 아닌가! 나는 손을 번쩍 들고서 잔뜩 권위 있는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이다르 아이예(이리 오게)! 컴 히어!" 그는 대번에 총알처럼 달려왔다. 함박 웃음을 짓는 그에게 나는 자선을 베풀듯 배낭을 건넸다. 그는 꿈벅 죽는 시늉을 하며 배낭을 릭샤에 실었다. 나는 그에게 대뜸 이름부터 물었다. 식민지 시절의 영국 신사처럼 미리부터 제압을 하고 들어가자는 속셈이었다. 릭샤꾼은 연신 굽신거리며 자신의 이름이 '인드라'라고 했다. 인드라는 가장 높은 하늘에 산다는 최고의 신이 아닌가. 그렇게 해서 인도 최고의 신의 이름을 가진 릭샤 운전사와 함께 아그라의 밤 여행이 시작되었다. 릭샤는 부릉거리며 아그라 역을 등지고 타즈 간지 구역으로 향했다. 타즈 간지는 타지마할과도 가깝고, 배낭 여행자들을 위한 값싼 여인숙과 게스트 하우스들이 많은 동네다.
인드라는 영어도 서툴고 운전도 서툴었다. 그런 서툰 점이 나는 맘에 들었다. 인드라는 타즈 간지의 어느 호텔로 가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미 안내 책자에 줄을 그어 놓은 대로, 가장 값싸고 깨끗한 샨티 로찌 여인숙으로 가자고 말했다. 그러자 인드라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샨티 로찌 여인숙은 보름 전쯤에 무너져버렸다는 것이었다. 부실공사 때문에 어느날 갑자기 붕괴해버렸고, 많은 인명 피해까지 났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의아해 하자, 인드라는 이곳은 인도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인도의 건물들이 오죽하겠냐는 것이었다. 그것도 그럴 법한 일이었다. 나는 여행 도중에 인도인들이 개미떼처럼 모여서 건물을 짓는 것을 여러 차례 구경한 적이 있었다. 도구라고는 세숫대야 같은 걸로 자갈과 모래를 져 나르는데, 건축 과정이 어찌나 허술한지 도무지 건물이 설 것 같지 않았다. 내가 가고자 하는 여인숙이 보름 전쯤 붕괴해버렸다는 소식을 들으니 다시금 이곳이 인도라는 사실이 실감났다. 나는 가이드 북을 펴낸 출판사에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두 번째 후보로 점찍어 둔 싯달타 호텔을 떠올렸다. 싯달타 호텔로 가자는 나의 말에 인드라는 아까보다 더 크게 놀랐다. 그곳 역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싯달타 호텔은 한 달 전쯤에 화재가 나서 전소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세계 최고의 여행 가이드 책자에서 가장 좋은 싸구려 숙박시설이라고 소개한 두 여인숙이 건물 붕괴와 화재로 한꺼번에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릭샤 운전사 인드라는 인도의 숙박시설에 화재 경보 장치나 소화기 시설이 제대로 돼 있겠느냐며 나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릭샤는 안개와 어둠에 가려진 아그라 시내를 붕붕거리며 달려갔다.
나는 마지막 후보로 선정해 둔 타지케마 호텔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곳은 인도 정부가 운영하는 호텔이었다. 시설은 우수하지 않지만 이른 아침에 타지마할을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아열대의 새벽 공기 속에서 세계 최고의 건축물인 타지마할을 바라본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일이었다. 더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주저없이 인드라에게 타지케마 호텔로 갈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인드라는 달리는 릭샤에서 떨어질 것처럼 펄쩍 놀라며 그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또다시 불길한 말을 듣게 될까봐 걱정이 된 나는 조심스럽게 이유를 물었다. 인드라는 차마 말하기가 미안하다는 듯이 머뭇거리다가, 타지케마 호텔은 지난 여름의 우기 때 홍수가 나서 떠내려가 버렸다고 말했다. 나는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인도의 장마는 유명하지 않느냐는 인드라의 설명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하기야 바라나시의 역사적인 건축물들도 장마비에 떠내려가는 판이니, 이해가 안 가는 일도 아니었다. 마치 도시 전체에 대참사가 일어난 것만 같았다. 무너지고, 불타고, 떠내려가다니! 이런 도시에 여행을 온 나 자신이 한심했다. 타지마할은 안전한지 그것조차 의심이 갔다. 하지만 어쨌든 난 여행자 신세였다. 어디선가 하룻밤 잠을 청해야만 했다. 이런 위험한 곳에서 노숙을 시도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침울해진 내 마음을 인드라가 서툰 영어로 위로했다. 낯선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며, 다시 말하지만 이곳은 인도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마침내 인드라는 자기가 아는 호텔이 한 군데 있는데, 타지마할도 잘 보이고 방마다 목욕탕까지 딸린 곳이니까 그곳으로 안내하겠다고 말했다. 그곳은 자기의 삼촌이 운영하는 호텔이라서 잘하면 값도 깎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삼촌이 운영한다는 말에 얼핏 의심이 갔지만, 이미 늦은 밤시간이라서 릭샤 왈라를 붙들고 왈가왈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인드라는 한껏 속력을 내어 밤안개 속을 내달렸다. 마침내 나는 릭샤 왈라가 소개한 누추한 여인숙에 도착했다. 콧수염을 기른 주인 남자는 미소로 날 맞았으며, 인드라가 거들어준 덕분에 숙박비도 약간 깎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주인 남자가 인드라의 삼촌인 것 같지는 않았다. 생긴 모습이 영 딴판이었다. 나는 서둘러 짐을 풀고 곧바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내가 자고 있는 여인숙이 강물에 둥둥 떠내려가는 장면에 기겁을 하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빛이 눈부셔서 더 이상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나는 세수를 하고 나서 배낭에 든 오렌지 세 알을 꺼내 들고 밖으로 나왔다. 아침을 먹기 전에 먼저 타지마할을 구경하고 싶었다. 걸어서 1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다니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타지마할은 예상했던 것보다 멀었다. 1분 거리에 있다는 말은 순전히 거짓말이었다. 길을 물어가며 한 시간도 넘게 걸었을 때에야 비로소 타지마할이 가까웠음을 알 수 있었다. 우유 넣은 차와 바나나를 파는 노점상들이 군데군데 늘어서 있고, 비디오 카메라를 든 단체 관광객들이 거리 풍경을 열심히 촬영하고 있었다. 타지마할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거리에 선 채로 호주머니에서 오렌지를 꺼냈다. 인도의 오렌지는 볼품은 없지만 맛이 있다. 한가로이 서서 오렌지 껍질을 벗기고 있는데, 문득 내 시야에 호텔 싯달타의 간판이 들어왔다. 어젯밤 내가 가고자 했던 바로 그 호텔이 아닌가! 릭샤 운전사 인드라는 분명히 싯달타 호텔이 화재로 홀랑 타버렸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멍한 기분으로 싯달타 호텔을 열심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화가 나서 들고 있던 오렌지를 길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자 지나가던 소가 얼른 그것을 집어삼켰다. 싯달타 호텔에서 서양인 남녀 여행자가 똑같은 선그라스를 끼고서 즐겁게 걸어나왔다. 순진한 릭샤 왈라에게 당한 것이다. 심사숙고해서 어리숙해 보이는 친구를 골랐는데, 멋지게 나를 속여넘긴 것이다. 대단한 친구다. 멀쩡하게 잘 있는 호텔을 한 달 전에 불타버렸다고 거짓말을 하다니! 나는 근처에 있는 샨티 로찌 호텔도 확인했다. 폭삭 무너지기는커녕 어떤 곳보다 많은 여행자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나는 더 기분이 나빠져서 또다시 오렌지 하나를 땅바닥에 집어던졌다. 홍수에 떠내려갔다는, 인도 정부가 운영하는 타지케마 호텔도 타지마할 오른편에 멀쩡하게 서 있었으며, 역시 전망으로 따지자면 최고의 위치였다. 몇 푼 커미션을 벌기 위해 엉터리 거짓말을 해대고 나를 다른 호텔로 데려갔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이면 백일하에 드러날 거짓말을 하다니!
그날 아침 나절을 나는 타지마할을 구경하는 것도 집어치우고 인드라를 찾아내 요절을 낼 생각으로 사방팔방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마침내 내가 알게 된 사실은 아그라에만 '인드라'라는 이름을 가진 릭샤꾼이 쉰 명이 넘는다는 것이었다. 인드라를 찾아내는 것도 불가능했지만, 결국 내 꾀에 내가 넘어간 셈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정오가 지날 무렵, 나는 인드라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서 마지막 남은 오렌지 한 알을 까 먹으며 타지마할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타지마할은 파리의 에펠탑처럼 인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그 아름다움과 신비는 기대한 것 이상이었다. 인도를 점령한 모굴 제국의 황제 샤 자한은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다. 그의 아내 뭄 타즈는 열네 명의 아이를 낳았으며, 마지막 열 다섯 번째 아이를 낳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샤 자한은 죽은 아내를 추억하기 위해 타지마할이라는 이 역사적인 무덤을 만들었다. 무덤이기 이전에 타지마할은 예술의 완성품이다. 그것을 짓기 위해 인도 전역과 중앙아시아로부터 2 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고, 프랑스 보르도의 건축가 오스틴과 이탈리아 베니스의 건축가 베로네오가 건물의 장식을 담당했다. 주요 건축은 이란의 시라즈 출신의 이사 칸이 맡았다. 건축은 1631 년에 시작되어 1653 년에 완성되었다.
어쨌든 타지마할을 구경하게 돼서 나는 행복했다. 마침 보름날이 다가왔으므로, 밤에 다시 와서 구경하기로 했다. 흰 대리석의 타지마할은 보름달 아래서 볼 때 그 미학이 완성된다고 하지 않는가. 밤에 보면 허공에 떠 있는 신비의 궁전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60 년 전에 인도인들은 이토록 아름다운 건축물을 세웠다. 나는 미처 그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릭샤 운전사에게 순진하게 속아넘어간 것이다. 세계적인 건축물 타지마할을 세운 이 나라의 건축가들이 아무 이유 없이 폭삭 주저앉거나 홍수에 간단히 떠내려갈 건물을 지을 리 없었다. 서너 번 인도 여행을 한 걸 갖고 마치 인도를 정복하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만만하던 내게 인드라는 큰 교훈을 심어주었다. 인생 역시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자신이 모든 걸 아는 것처럼 잘난 체하는가. 아루나찰라 산의 성자로 일컬어지는 라마나 마하리쉬는 (마하리쉬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은 자만심에 차 있는 사람과 가장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사람들은 신을 필요로 하지만, 자만심에 찬 사람은 신 없이도 자신이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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