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계 교수의 철학 이야기 - 탈레스에서 라캉까지
제6부 현대 철학 이야기
해체의 모험과 포스트모더니즘
미셀 푸코 이후 데리다, 리오타르 등의 철학자들은 근대와 현대의 이성 중심적 합리주의 문화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르몽드>는 그러한 경향을 일컬어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렀다.
우선 포스트모더니즘이 실존주의나 실용주의 또는 마르크스주의 등과 마찬가지로 현대 철학의 한 조류인지의 여부를 물을 필요가 있다. 최근 철학이나 문학 또는 예술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이 거의 유행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은 철학의 한 조류로서 명확하게 규정도 어떤 경향도 지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셀 푸코 이후 데리다, 리오타르 등의 프랑스 철학자들이 근대와 아울러 현대의 이성 중심적 합리주의 문화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프랑스 신문 <르몽드>는 그와 같은 경향의 주장을 일컬어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최근의 프랑스 일부 철학자들과 그들의 주장에 큰 영향을 받은 미국의 일부 철학자들과 그들의 주장에 큰 영향을 받은 미국의 일부 예술 평론가들이 대변하고 있는 탈근대성 이론이라고 넓게 말할 수 있다. 이미 현대라는 시점을 맞이하면서 과거의 형식적, 제한적 세계관 및 인생관을 전도시킨 대표적인 사상가들로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등을 꼽을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특히 니체의 '모든 가치들의 전도'라는 기치를 이어받으면서 전통을 해체하려는 모험을 시도하고 있다. 전통적인 철학의 이성 중심적 합리주의를 해체하고 새로운 대안과 시도를 추구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직접적 시발점을 마련한 사상가는 니체이다. 또 그 중간 다리는 현대인의 소외의 원인을 기술로 보고 존재론적 차원에서 결단하는 주체로서 현존재 인간을 주장한 하이데거이다. 푸고 데리다, 리오타르 등은 정신분석학, 언어학, 문예학 등을 바탕으로 삼고 현실을 구체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전통적 형이상학 및 합리주의가 얼마나 허구적이며 폐쇄적인가를 밝혀 낸다. 이들은 삶의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서 근대성 전반을 비판하고 그것을 해체해 구속당하지 않은 삶과 문화를 정립하고자 한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모더니즘(근대성)을 대변하는 말은 이성과 합리화이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현대성은 바로 근대성의 연장에 불과하다. 자연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거대한 유기체로 보는 자연관도 근대성의 특징이며 진보의 이론도 근대성의 특징이다. 이러한 견해는 니체의 입장과 일치한다. 니체가 보는 근대성은 합리주의와 기독교 도덕의 결합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그것은 허구이자 날조이며, 따라서 퇴폐주의와 허무주의로 나타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성의 부정적 한계를 예리하게 통찰하고 비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인간이 이성을 확고하게 신봉함으로써 삶과 사회의 합리화가 촉진되었지만, 그것은 일방적 독단적인 것으로서 정당성을 찾을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병적인 것이라고까지 본다. 예컨대 푸코는 <광기와 문명>에서 이성의 담론체계가 비이성의 담론체계를 폐쇄하고 억압한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이성의 비이성에 대한 억압을 해체시키려고 한다. 정신병자들을 정신병원에 감금해 끊임없이 감시하며 저주하는 것은 광기를 올바르게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언제나 이성의 냉혹한 응시 대상과 감시 대상으로 남게 한다. 푸코는 정치, 경제, 사회적 제도를 주의깊게 살핌으로써 이성의 비이성에 대한 억압과 지배의 발생을 고찰하고, 그와 같은 병적 상태를 해체하고자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의 인간이 더 이상 이성적 합리성의 주체일 수 없고, 자연 또한 유기적 전체가 아니며, 사회나 역사의 진보 역시 날조된 허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성, 다시 말해서 이성 중심적 합리주의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는다. 그러한 비판을 출발점으로 삼을 때 세기말의 새로운 현실(후기 자본주의라든지 후기 산업사회와 같은)을 해명하고 새로운 시도를 마련하기 위한 실험적 태도가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모더니즘 위기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실험적 태도
(1) 모더니즘의 위기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관료화, 기술적 계산, 과학적 전문화가 점차로 증가하는 것을 일컬어 합리화라고 부르는데, 그가 보기에 이러한 합리화는 돌이킬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다. 사실 오늘날 베버적 의미의 합리화는 극단에 달한 감이 있다. 모든 생산체계의 자동화, 컴퓨터의 지배 등은 우리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오늘날의 경제 및 국가의 체제는 합목적적 행위 방식을 기초로 삼고 있으며, 그것은 합리주의라는 명칭을 가지고 삶 전반에 확산되어 가고 있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등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철학자들도 도구 이성이 이끌어가는 계몽 변증법이 현대사회를 지배해 경직된 형식적 합리주의가 세계를 좌우한다고 보았다. 이들은 베버와 마찬가지로 삶을 염세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실천 이성에 의해서 일차원적 사회의 병폐를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에서 볼 경우 실천 이성 역시 이성 중심적 합리주의의 한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
(2) 포스트모더니즘의 실험적 태도 푸코는 로고스(이성) 중심의 합리주의를 전복시키려고 했다. 이러한 태도를 이어받은 리오타르는 전통과학으로부터 단절해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는 포스트모던의 과학을 예로 들어, 형식적, 독단적, 체계적인 '큰 이야기'를 파괴하고 다양하며 이질적인 '작은 이야기들'을 정립하고자 한다. 리오타르가 말하는 '큰 이야기'는 한마디로 독단적 주장으로서의 허구를 일컬으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이성 및 이성에 대한 신뢰를 가리킨다. '작은 이야기'는 독단적 전제를 배제한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다원적 담론의 체계들이다. 로티는 <철학과 자연의 거울>에서 해석학은 설명이 아니라 세상과의 관계에서 훌륭하게 적응하는 방법으로서의 해석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종래의 인식론 대신 해석학을 인간의 삶의 체험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근대적 사유는 확고한 근거를 바탕으로 삼는 인식론과 아울러 표상이론을 절대적으로 지지한다. 그러나 로티는 확실한 기초를 근거로 삼아야 확실한 인식이 성립한다거나 또는 외부 실재를 표상할 때 비로소 언어가 의미를 갖는다는 근대적 사유가 더 이상 정당성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세계는 다양하고 항상 변화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언어도 세계 관계에서 어떻게 쓰여지느냐 하는 '사용으로서의 의미이론'으로서만 타당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로티의 입장은 신실용주의 또는 후기 분석철학이라고 일컬어지지만, 형식적, 고정적, 일차원적 사고방식을 해체하려고 하는 점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유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 사상의 흐름은 당대의 사회현실을 반영한다. 포스트모더니즘도 예외는 아니다. 복잡다단한 현대사회를 직시하고 그 안에서 전개되는 무수히 많은 문제점들을 해결하고자 할 때,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 중에서 긍정적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푸코: 지식의 고고학과 성의 역사 푸코는 데리다, 리오타르와 함께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대변하는 철학자이다. 푸코의 초기 저술들은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적 현상학의 영향권 안에 머물러 있었지만 푸코는 곧 자신의 독자적 사상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푸코는 개인적 신념과 의도를 떠나서 추론적으로 형성되는 지식의 고고학을 발전시켰다. 지식의 고고학은 지식의 근원을 추적함으로써 인간 중심적 사고를 탈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지식의 고고학은 한 체계로부터 다른 체계로 사상이 전환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푸코는 니체를 모델로 삼아 계보학적 방법을 채택하였다. 그러므로 푸코는 예컨대 마르크스나 프로이트와 같은 결정론적 독단론을 배격한다. 왜냐하면 소위 관념론이나 경험론이라고 하는 전통철학은 포괄적인 설명의 도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해결하는 만능열쇠의 역할을 담당하지만 그러한 역할은 단지 허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푸코가 보기에 사상의 체계들이란 무수하게 많은 작고 상호연관성이 없는 원인들이 모여서 된 우연적 산물들에 지나지 않는다. 푸코에 의하면 지식과 권력은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므로 지식은 근세 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자발적인 지적 구조가 아니고 사회적 조종체계에 종속된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와 동일한 방법으로 분석한다. 푸코의 철저한 사색의 목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윤리적 자아를 이해하는 데 있다.
고고학적 방법 푸코의 고고학적 방법은 바슐라르와 캉길렘의 과학철학, 루셀과 바타이유 및 블랑쇼의 모더니스트 문학 그리고 브로델과 아날 학파의 사료 편찬 등을 종합한 결과이다. <병원의 탄생: 의학적 관점의 고고학>에서 푸코는 정신 질환에 대한 윤리적 비판을 신체적 질환에 대한 윤리적 비판으로 확장시킨다. 그러나 푸코는 곧 현대 의학의 바탕에 깔려 있는 언어학적 및 개념적 구조를 분석하기에 이른다. 푸코의 고고학은 특히 문학적 언어구성에 있어서 개인적 주관을 탈피하고 사상사에 있어서 근본적인 범주와 구조를 찾아내고자 한다. 푸코의 계보학적 탐구는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한다. 푸코에 의하면 인간의 지식 체계는 특정한 권력제도가 채용하는 자발적인 지적 구조가 아니다. 권력은 억압적일 수도 있고 창조적일 수도 있어서 그와 같은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 조종에 지식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성의 역사 푸코의 말기 저술 <성의 역사> 두 권은 각각 <쾌락의 사용>과 <자기의 관심>이라는 부제목을 달고 있다. 푸코는 성의 역사를 계보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근대의 주체 개념의 원천을 해명하려고 한다. 푸코는 우선 성에 관한 담론은 인간 의식의 배후에 있는 심연으로부터 형성된다고 본다. 다음으로 그는 개인의 한계를 넘어서서 인간의 자기 창조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성윤리의 기준은 쾌락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리스인들은 중세 기독교도들처럼 성행위를 악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성행위는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위험하다고 여긴 것은 성 자체가 아니라 지나친 성행위였다. 따라서 푸코는 성에 관해서 인간존재의 미학을 탐구할 경우 우리는 근대의 그릇된 성 관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푸코는 무릇 철학적 주제들은 큰 담론이 아니라 작은 담론에 의해서 논의될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고 본 것이다.
해체주의자 데리다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니체, 마르크스, 후설, 하이데거, 소쉬르, 레비 스트로스, 레비나스, 프로이트, 라캉 등 매우 다양한 사상가들의 핵심 이론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deconstruction)는 바로 차이(difference)를 근거로 삼고 있다. 해체는 전통적인 존재 형이상학의 해체이며 동시에 독단적 사유의 해체이다. 일부 사람들은 데리다의 해체를 일컬어 텍스트 읽기의 한 양식으로 본다. 즉 텍스트를 고정된 틀 안에서 읽지 않고 자유롭게 읽는 양식을 해체라고 한다. 그러나 데리다의 해체는 데리다 자신의 철학함의 방법이며 그것은 전통형이상학을 떠나서 전적으로 다른 것에 접근함으로써 불가능한 것을 체험하는 태도이다. 데리다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것의 체험이란 독단적 형이상학에서는 불가능한 것을 해체의 방법에 의해서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차이와 동일성 데리다에 의하면 전통형이상학은 자기 동일적 직립성을 진리의 가치로 주장한다. 예컨대 전통적 의미에서 실체는 자기-원인을 소유하며 자기 동일적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글보다 말이 존재론적 우월성을 가진다는 전통적 사고에 의해서 동일성만 주장되고 차이는 무시되었다고 주장한다. 차이는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 데리다의 견해이다. 데리다의 차이, 해체 등의 개념은 헤겔 및 하이데거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다. 하이데거는 시간을 존재의 지평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데카르트, 칸트에 이르기까지의 형이상학의 역사를 해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형이상학적 시간은 동일성의 시간이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견해를 따라서 모든 개념은 차이들에 의해서 성립한다고 본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형이상학의 역사의 해체는 존재자들의 존재에 관하여 근원적인 예술적 언명을 밝혀주지만 데리다는 사유의 출발점으로서의 근원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근원이란 실체와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동일성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언어 문제를 논의하면서 전통철학에서는 발언이 글쓰기 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말한다. 발언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서 직접 사유를 표현함에 비해서 글쓰기는 발언의 기호 역할만 담당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음향적 글쓰기는 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데 반해서 비음향적 글쓰기는 덜 지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데리다에 의하면 존재의 형이상학의 바탕을 구축한 것은 논리 중심적, 음향 중심적 사유이므로 그는 그러한 사유를 해체하고자 한다. 데리다는 발언과 글쓰기를 엄밀히 구별할 수 없으며 발언과 글쓰기 모두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차이라고 말한다. 물론 데리다는 존재의 형이상학(동일성의 형이상학)을 해체하기 위해서 차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차이는 모든 종류의 첫째가는 또는 중심되는 용어가 참다운 의미에서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즉 실체와 같은 용어는 발언에 의해서 성립된 동일성을 표현하므로 실체라는 용어는 해체되지 않으면 안 된다. 데리다가 말하는 차이는 해체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며 차이라는 용어는 예컨대 혜라클레이토스의 '만물은 흐른다',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이다' 또는 '한 번 들어간 물에 다시 들어갈 수 없다'는 명제들이 뜻하는 생성 변화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데리다의 차이 개념에 대해서 가다머, 하버마스 등 여러 사람들이 반박했지만 데리다는 그러한 반박을 또 다른 차이로 여겼다. 데리다는 윤리, 정치적인 측면에도 차이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전통적 현실을 해체하고 개방된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작은 담론을 주장하는 리오타르 리오타르는 푸코 및 데리다와 함께 현대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대변하는 철학자이다.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에서 형이상학적 철학을 해체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리오타르가 보기에 현대의 후기 산업 사회와 후기 자본주의 사회 역시 형이상학적 철학의 산물로서 인간을 질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리오타르는 작은 담론(petit discours)에 의해서 큰 담론(grand discours)을 해체함으로써 개방적인 새로운 철학함의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큰 담론의 해체 리오타르는 형이상학적 철학(전체화의 철학)을 해체해야 할 가장 대표적 예를 아우슈비츠에서 찾는다. 근대성은 자유, 해방, 휴머니즘의 보편적 실현을 목적으로 삼는 낙천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근대성의 이러한 경향은 정치, 경제, 과학, 예술 철학에 공통적이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좌절과 실재를 맞이하였다. 리오타르가 보기에 이것은 근대성의 위기이며 형이상학적 철학 내지 독단적, 이론적 미학의 붕괴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근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후기 산업사회에서도 여전히 큰 담론(형이상학적 독단적 철학)이 지배적이다. 큰 담론을 구성하는 것들은 정신의 변증법, 의미의 해석학, 합리적 주체, 노동자의 해방 등이다. 큰 담론의 형태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면 그것들은 합리론, 관념론을 비롯하여 실증주의, 마르크스주의, 구조주의 등 결정론적인 독단적 형이상학의 성격을 지닌 것들이다. 포스트모던의 미래지향적 지식의 조건이라는 관점에서 볼 경우 큰 담론은 현재 상태의 위기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증대시키기까지 하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의 미학(또는 철학)은 작은 담론에 의해서 큰 담론을 해체하고자 한다.
형상과 리비도와 작은 담론 리오타르가 작은 담론에 의해서 큰 담론을 해체하려고 할 때 도대체 작은 담론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리오타르에 의하면 작은 담론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형상인데 형상은 심도에 따라서 세 가지로 구분된다. 그것들은 각각 상의 형상, 형태의 형상 그리고 모체의 형상이다. 우리는 담론의 표현에서 상의 형상을 그리고 담론 내에서 형태의 형상을 발견한다. 그러나 담론 자체의 근거는 환상적 모체 내지 원형의 형상이다. 물론 담론은 언어에 의해서 성립하는데 언어의 논리적 질서는 상의 형상에 해당하고 언어 내의 비-언어의 현존은 형태의 형상이며 그것은 담론 안에 자리잡고 형상들은 논쟁(differend)의 요소들로써 예술은 이 요소들에 의해서 성립한다. 리오타르의 논쟁은 데리다의 차이(difference)에 매우 근접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리오타르에게 있어서는 형상론이 예술뿐만 아니라 정치나 철학의 기본이기도 하다. 형상들은 큰 담론을 해체하는 작은 담론의 기초이자 근거이다. 리오타르의 형상론은 이미 그의 비판적 미학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채용하고 그것을 적용해서 예술의 성립요소들을 분석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리오타르에 의하면 예술은 형상을 원하고 아름다움은 형상적이며, 연결된 것이 아니고 율동적인 것이다. 여기서 연결된 것이란 체계적이며 형식적인 것을 그리고 율동적인 것은 역동적이며 심층적인 것을 의미한다. 리오타르는 "인간의 작품이 모체의 후예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작품은 우선 예술을 그리고 다음으로 인간이 만든 모든 산물을 뜻하며 모체는 읽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원형으로서의 욕망, 곧 리비도를 뜻한다. 리오타르에 의하면 우리는 욕망(리비도)을 작은 담론에 의해서 표현할 수는 있어도 결코 큰 담론에 의해서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정치, 경제, 예술, 사회, 과학, 철학 등에 있어서의 절대론이나 결정론은 큰 담론으로서의 허구이므로 작은 담론에 의해서 해체되지 않으면 안 된다. 리오타르의 철학함의 궁극 목적은 자유와 해방이다. (리오타르에 관한 설명의 대부분은 필자의 저서 <니체와 예술>에서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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