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932호
2012.12.5 (음10.22) / 발송인: |
|
nowmaster@nate.com |
※ 한자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
|
|
|
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
|
자녀들에게 독립해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부모들의 가장 중요한 과업. - 프랑크 클라크
|
|
|
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
|
[우리말바루기] 썰매를 지치다
연일 한파가 맹위를 떨치며 몸을 움츠리게 만들지만 아이들은 오히려 꽁꽁 언 빙판을 신나게 즐기고 있다. “동네 작은 개천에 만들어진 썰매장에서 얼음을 제치며 놀았다” “빙판을 제치던 왕년의 실력이 죽지 않았다” 등에서와 같이 얼음 위에서 놀 때 ‘제치다’는 낱말을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표현으로 ‘지치다’를 사용해야 한다. ‘제치다’와 ‘지치다’는 발음과 표기가 비슷해 헷갈리기 쉽다. ‘제치다’가 여러 의미를 지니고 다양한 표현에 쓰이는 것과 달리 ‘지치다’는 ‘얼음 위를 미끄러져 달리다’는 의미 하나만을 지니기 때문에 사용 빈도가 낮아 이런 단어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제치다’는 “박지성 선수가 골키퍼를 제치고 골을 넣었다”에서와 같이 ‘거치적거리지 않게 처리하다’, “어떻게 나를 제쳐 두고 놀러 갈 수 있니?”에서처럼 ‘일정한 대상이나 범위에서 빼다’는 의미로 쓰인다. “박태환 선수가 선두를 제치고 맨 앞으로 나왔다”에서와 같이 ‘경쟁 상대보다 우위에 서다’, “그런 일이라면 만사 제쳐 두고 가겠다”에서처럼 ‘일을 미루다’ 등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일반적인 ‘썰매 타기’를 의미할 땐 ‘썰매 지치기’라고 해야 한다.
[우리말바루기] 달디달다, 다디달다
“하루라도 달디단 음식을 안 먹으면 집중할 수 없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단것을 먹어야 해소되며, 예전과 비슷하게 단 음식을 먹는데도 불만족스럽다!” 이런 증세를 호소한다면 건강에 해로운 단맛 중독증에 빠져 있을 확률이 높다. 이 자가진단법에 나온 항목 중 ‘달디단’이란 표현은 매우 달다는 의미로 흔히 쓰인다. “불안하면 달디단 아이스크림이나 케이크 같은 게 막 당겨요”처럼 사용하지만 ‘다디단’으로 고쳐야 어법에 맞다. ‘달디달다’에서 ㄹ이 탈락한 ‘다디달다’를 표준어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가늘고 작다는 뜻의 ‘자디잘다’도 마찬가지다. 어간의 끝 받침 ㄹ은 ‘ㄷ·ㅈ·아’ 앞에서 줄지 않는 게 원칙인데, 관용상 ㄹ이 줄어진 형태가 굳어져 쓰이는 건 준 대로 적는다는 규정에 따른 것이다. 매우 긴 것을 나타내는 ‘길디길다’는 이 예외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기디길다’로 사용하지 않는다. ‘-디’는 형용사 어간을 반복해 그 의미를 강조하는 연결어미이므로 ‘검디검다·곱디곱다·넓디넓다·쓰디쓰다·약하디약하다·차디차다·희디희다’처럼 붙여 쓴다는 것도 기억하자.
|
|
|
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
|
겨울의 유서遺書 - 한우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네 글씨체가 아니구나, 아니라며 너에게 뛰어내리는, 너를 어쩌지 못하고 발만 동동, 눈발이 허리를 비튼다. 네가 쓴 자서自序 한 줄도 언제 한번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내가 어쩌지 못하고 눈발을 맞는다. 눈발이 발목을 꺾는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강이 흐르면서 유서를 쓴다. 나무체였다가 구름체였다가 드문드문 창호지를 바른 얼음 밑으로 너의 서체書體가 드러난다.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 강이 살얼음 물고 유서를 쓴다
|
|
|
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
|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2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1. 꿈을 이루기 위한 스프
비밀상자
대학교 4학년 때 나는 겨울 방학을 맞아 집으로 내려갔다. 2주 동안의 짧은 방학이었지만, 두 남동생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계획으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우리는 너무 신이 나고 흥분한 나머지, 엄마와 아버지를 휴가 보내 드리고 우리가 대신 가게를 보겠다고 자원하고 나섰다. 두 분은 가게에 매달려 계시느라고 몇 해 동안 휴가 한 번 떠나지 못하셨던 것 이다. 부모님이 보스톤으로 휴가 여행을 떠나시기 전날, 아버지는 가게 뒤켠에 딸린 골방으로 가만히 나를 부르셨다. 그 방은 너무 작아서 피아노 한 대와 접는 침대만으로도 꽉 찼다. 사실 침대를 펴 놓으면 그 발치에 앉아서 피아노를 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방은 우리 식구들 중에도 출입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낡은 피아노 뒤로 손을 넣더니 그곳에서 시가 담배를 넣는 네모난 상자 하나를 꺼내 셨다. 상자 뚜껑을 열고 아버지는 그 안에 든 것들을 내게 보여 주셨다. 상자 안에는 뜻밖에도 신문기사 오려 둔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난 어려서부터 탐정소설들을 수없이 읽은 터라, 가위로 오린 신문기사들이 담긴 비밀 상자를 보자 갑자기 흥분이 되었다. 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것들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것들이 뭐예요. 아버지?" 내 물음에 아버지는 진지하게 대답하셨다. "이것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신문의 독자 투고란에 실린, 내가 보낸 기사와 편지들이다." 나는 몇 장을 꺼내 훑어보았다. 반듯하게 오린 각 기사마다 한결같이 '월터 채프먼'이라고 아버지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놀라서 물었다. "왜 진작 말씀해 주시지 않았어요. 아버지?"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난 네 엄마가 이 사실을 아는 걸 원치 않는다. 네 엄마는 늘 내가 학교 교육을 별로 받지 못 했으니 글을 쓰면 안 된다고 지적해 왔다. 난 한때 정치 사무실을 운영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 만, 네 엄마가 절대로 못 하게 했다. 아마 내 무식함이 탄로나서 실패할까 두려웠던 게지. 난 그 냥 재미삼아 이 일을 해 왔다. 네 엄마 몰래 신문에 글을 실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실제로 지금까지 한 번도 들키지 않고 그렇게 해 왔단다. 내가 보낸 글들이 신문에 실리면 난 그 것들을 오려 이 상자 속에 감춰 두곤 했지. 하지만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이 상자를 보여 주리라 고 마음먹었었다. 그것이 바로 너다." 내가 몇 편의 기사를 읽는 동안 아버지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만 계셨다. 마침내 내가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쳐다보았을 때 아버지의 눈은 물기에 젖어 있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덧붙이셨다. "지난 번에 마지막으로 좀 무리한 시도를 해 봤다." 내가 호기심에 찬 얼굴로 물었다. "또 글을 보내셨군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맞았다. 우리의 종교 잡지에다 전국 대의원들을 공정하게 선출하는 방법에 대한 장문의 글을 기고했지. 그걸 보낸 지 벌써 석 달이 넘었다. 아마 내가 너무 무리한 주제를 잡았던게 아닌가 생 각이 드는구나."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알아온 아버지의 전혀 새로운 면이었기 때문에 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명랑한 목소리를 지어 말했다. "아마 잘 될 거예요. 미리부터 실망하진 마세요."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어쩜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까지 마음 죄며 기다리진 말아라." 아버지는 내게 미소와 함께 윙크를 보내고는 비밀 상자를 닫았다. 그리고 그것을 피아노 뒤켠 의 공간 속에 도로 숨겨 놓으셨다. 다음 날 우리 부모님은 버스를 타고 하버 힐 역으로 가셨다.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보스톤으로 떠나실 예정이었다. 나는 두 남동생 짐과 론을 데리고 가게를 보면서 아버지의 비밀 상자에 대해 생각했다. 아버지가 글 쓰는 걸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난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어쨌 든 난 그것을 동생들에겐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아버지와 나만의 소중한 비밀이었다. 숨겨진 상자의 비밀.
그날 이른 저녁, 내가 가게 유리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데 엄마가 버스에서 내리시는 것이었다. 엄마 혼자였다. 엄마는 광장을 가로질러 잰 걸음으로 가게를 향해 걸어오셨다. 우리는 일제히 엄마에게 물었다. "아버진 어디 계세요?" "너희 아버진 죽었다." 엄마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엄마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엄마의 설명에 따르면, 보스톤의 파크 스트리트 지하철역의 군중 속을 걸어가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바닥에 쓰러지셨다고 한다. 그때 지나가던 한 간호사가 몸을 굽혀 아버지를 살펴보더니 엄마를 쳐다보면서 "죽었군요."하고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엄마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버지 옆에 멍하니 서 있었고, 지하철에서 몰려나오는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걸려 넘어지기까지 했다. 그러자 어떤 목사가 다가오더니 "내가 경찰을 불러 주 겠소."하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마침내 구급차가 와서 두 사람을 곧장 시체 보관소로 데려갔다고 했다. 엄마는 아버지의 호주머니 속에 든 물건들을 꺼냈고, 시계도 풀었다. 그 뒤 엄마는 혼자서 기차를 타고 돌아왔으며, 다시 버스를 타고 집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이 충격적인 사건을 전하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셨다. 남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엄마의 오랜 훈련이자 자부심이었다. 우리들 역시 울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가게로 내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손님들에게로 돌 아갔다. 오랫동안 우리 가게를 다닌 한 단골 손님이 물었다. "오늘 저녁엔 노인 양반이 어딜 가셨나?" 내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돌아가셨어요." "저런! 정말 안됐군." 그는 그렇게 말하고 가게를 나갔다. 나는 아버지를 한 번도 노인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손님이 묻는 질문에 화가 났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일흔 살이셨고, 엄마는 쉰 살이셨다. 아버지는 언제나 건강 하고 행복하셨으며, 연약하고 예민한 엄마를 아무런 불평 없이 잘 돌봐 오셨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는 떠나고 안 계셨다. 가게 선반을 정리하면서 부르시던 그 휘파람 소리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 다신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노인 양반'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장례식 날 아침, 나는 스크랩 북을 가져다가 가게 테이블에 앉아 조문객들이 보낸 문상 카드를 정리하던 도중에 우편물 뭉치 속에서 두툼한 교회 잡지 한 권을 발견했다. 평소에 나는 지루한 내용의 종교 출판물 따위는 들춰 보지도 않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아버지가 보낸 글이 실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서둘러 잡지를 넘겼다. 그렇다. 그곳에 아버지의 기고문이 몇 장에 걸쳐 실려 있었다. 나는 잡지를 들고 작은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걷잡을 수 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난 용감하게 참아 왔지만, 전국 대의원 선출 방법에 대한 아버지의 대담한 조언이 잡지에 실려 있는 걸 보고 더 이상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난 기사를 읽고 또 울고, 또다시 읽곤 했다. 잡지 속에는 아버지의 훌륭한 제안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는, 헨리 카보트 롯지 경의 편지가 정중한 필체로 동봉되어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기고문을 오려 롯지 경의 편지와 함께 피아노 뒤의 비밀 상자 안에 넣었다. 그 후 나는 비밀 상자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랫동안 하나의 비밀로만 남았다.
플로렌스 리투아르
|
|
|
문학자료 → 철학 |
|
|
강영계 교수의 철학 이야기 - 탈레스에서 라캉까지
제6부 현대 철학 이야기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분석적 언어철학에서는 경험을 근거로 삼아 기호 안에서 언어의 의미를 찾는다. 해석학적 언어철학에서는 언어가 해석학적 체험의 매개물이라는 것에서 언어의 의미를 찾는다. 오늘날의 과학철학과 현상학, 그리고 분석철학과 해석학 등은 탐구 과제와 방법론에 있어서 서로 접근하는 것같이 보이는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살펴볼 경우 이들은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분리되고 또한 각각 고립되어 가는 경향이 강하다. 현대에 들어와서 전통적 의미의 인식의 문제를 비롯해 실체와 윤리, 논리와 미학의 문제들은 해결의 실마리를 언어의 본질과 구조에서 추구하려는 경향이 매우 두드러진다. 우리들 인간의 사고나 감정은 논리적이든 아니든 간에 언어로 표현되고 또한 언어를 수단으로 삼아 인간의 의사 소통이 성립되고 삶이 표현된다.
현대 언어철학의 두 갈래 폭넓게 볼 때 현대의 언어철학은 대강 두 갈래의 흐름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대륙의 해석학적 입장이고 또 하나는 영미의 분석적 입장이다. 해석학적 입장은 다시 현상학적 견해, 구조주의적 견해 및 해석학적 견해로 세분될 수 있다. 분석적 입장은 다시금 비트겐슈타인과 태도를 같이하는 견해, 비트겐슈타인과는 입장을 달리하는 옥스퍼드 학파 및 기호 논리학적 견해로 세분된다. 우리들은 언어를 매우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할 수 있으나, 오늘날 언어철학의 주된 관심사는 언어와 사유, 언어와 논리, 언어와 사회 등이다. 그러나 언어철학의 주된 관심사들을 탐구하기에 앞서서 밝혀져야 할 것은 언어란 무엇이고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다. 언어철학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문제는 언어의 의미에 있다. 분석적 언어철학에서는 언어 현상, 곧 언어가 어떤 것인가라는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는 반면, 해석학적 언어철학에서는 언어의 본질, 곧 언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분석적 언어철학에서는 경험을 근거로 삼아 기호 안에서 언어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그런가 하면 해석학적 언어철학에서는 언어가 해석학적 체험의 매개물이라는 것에서 언어의 의미를 찾는다. 이들 두 입장은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인다. 언어의 의미에 관해서 분석적 입장과 해석학적 입장은 어떤 점에서 서로 양립하는가, 그리고 언어의 의미는 포괄적 입장에서 밝혀질 수 없을까 하는 것은 해결되어야 할 물음들이다.
분석적 언어철학 분석적 언어철학의 입장에서는 우선 현상을 '사태'로 본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서 "모든 대상이 주어져 있다면 모든 가능한 사태로 주어져 있다"고 말한다. 사태는 상을 형성한다. 상은 우리의 언어에 의한 표현 형식을 떠날 수 없다. 표현 형식은 명제로 나타난다. 명제는 사물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현상만을 언급한다. 표현이 의미를 가지는 장소는 오직 명제이다. 만일 우리의 사유 구조가 사태 구조와 논리적으로 서로 상관 관계에 있다면 언어의 의미는 명제 이외의 다른 곳에서 찾아질 수 없다. 우리는 이제 명제가 의미 있는지 아니면 의미 없는지를 결정하는 기준을 찾아야만 한다. 명제의 의미는 검증 원리라는 기준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 분석적 언어 철학자들의 일반적 견해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현상을 '말놀이' (Sprachspiel)에서 밝히고 있다. 선생님이 한 대상을 의미하는 말을 하면 학생이 따라서 말할 때 이와 같은 현상을 말놀이라고 한다. 언어와 언어가 결부된 행위의 전체는 말놀이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이러한 말놀이에 있어서도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명제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명제를 이해하는 것은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다.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기술을 지배하는 것이다. 분석적 입장에서 볼 때 검증 원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과학적 가설이나 상식적 언명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언어의 의미가 타당할 수 있는 범위는 검증 원리의 범위와 일치한다. 그러나 분석적 언어철학은 언어를 형식적, 논리적 측면에서만 탐구해 언어의 의미를 밝히고자 하기 때문에 인간의 삶 자체의 표현인 언어를 전체적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단점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해석학적 언어철학 분석적 언어철학에서는 형이상학적 명제가 검증 원리에 타당치 못하기 때문에 거짓이고, 따라서 탐구 대상으로부터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해석학적 언어철학에서는 언어를 해석학적 체험의 매개물로 그리고 또한 해석학적 존재론의 지평으로 이해한다. 물론 언어는 인간의 의사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객관적인 의미 체계이지만 해석학에서 문제삼는 언어의 의미는 언어 현상이 아니라 언어의 본질에 있다. 하이데거는 "언어의 실존: 존재론적 기초는 대화"라고 말함으로써, 언어가 대담이 아니라 대화에 뿌리박고 있음을 밝힌다. 대담은 물론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단순한 음성의 연속이고 의미가 없다. 야스퍼스도 비슷한 입장을 전개한다. 외침, 피리 불기, 바람소리, 새나 개구리의 울음 등은 전혀 언어가 아나다. 언어는 내가 듣거나 말하는 소리 속에서 대상에 관한 나의 의향과 의미를 이행할 때 성립한다. 내가 소리 속에서 나와 거리를 두고 있는 대상을 의식하면서 지향하는 그것이 근본 현상이다.
단순한 대담은 지껄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의미를 소유하치 못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바로 대화라고 한다. 인간은 서로 말하고 들을 수 있는 존재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론적으로 현존재의 존재인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지금까지의 논리적 언어 탐구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논리적 언어 형식은 살아서 생동하는 언어의 내용과 전체성을 무시하고 단지 언어의 껍질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언어 형식에 의해서 우리는 결코 '사태 자체'를 획득할 수 없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언어는 존재의 언어이며 일종의 존재 방식이다. 그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 집 안에 인간이 산다. 생각하는 자와 시 쓰는 자는 이 집의 문지기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구름이 마치 하늘의 구름인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는 존재의 언어"라고 설명한다. 언어의 본질은 본질, 곧 존재의 드러남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언어의 의미는 형식적 문법과 논리적 측면을 넘어서서 역사적으로 인간 존재를 보장하는 최고의 가능성이며, 또한 진리를 드러내는 존재 방식이기까지 하다.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하이데거의 입장을 한층 더 심화시켜, 플라톤의 로고스에서 보는 것처럼 인간의 세계 체험에 있어서의 언어는 존재에 관한 사유를 발전시킨 실마리로 본다. 가다머에 의하면 언어는 세계 체험으로서의 언어이다.
분석적 언어철학과 해석학적 언어철학의 의미론적 지양 이제 분석적 언어철학과 해석학적 언어철학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서로 보완하는 입장에서 해결할 수 없는 것일까라는 물음을 놓고 해답을 찾아보기로 하자.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목적은 사유의 논리적인 해명이다. 철학은 교훈이 아니라 해명이다. 철학의 결과는 철학적 명제가 아니고 명제에 의한 해명이다"라고 말한다. 사유로서의 사유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 표현은 논리적 표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분석적 입장이나 해석학적 입장에 의존하지 않고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의미론에 의존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의미론에 의존할 경우 형식으로서의 언어와 내용으로서의 사유 사이의 내면적 연관성이 드러날 수 있다. 언어의 의미는 사유 현상으로서 언어의 본질과 현상에 모두 타당하다.
우리는 언어의 의미를 매우 다양한 각도에서 탐구할 수 있지만 언어의 의미는 주로 형식적 현상의 측면에서 그리고 본질의 측면에서 탐구된다. 한국말만 아는 사람은 "She is very nice"라고 말하면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녀는 매우 멋지다"라고 말하면 곧 이해한다. 신호등을 한번도 본적이 없는 섬 아이가 서울에 와서 신호등을 보면 어리둥절해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행동이나 설명을 통해서 아이는 곧 신호등에 적응하게 된다. 우리들 인간은 어떤 경우든지 이해하기 위해서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기호 상황을 만든다. 분석적 언어철학에서 보면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언어의 의미는 논리적 사태에 관한 사유의 형식이다. 그러나 해석학적 언어철학에서 보면 언어의 의미는 가다머가 말한 것처럼 세계 체험의 지평이다. 언어는 대상을 지시하기 때문에 언어의 의미는 대상이고 의미가 입고 있는 틀로서의 명칭은 기호이다. 이 경우 기호는 단순히 기호 논리학적 의미의 기호보다 넓은 의미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기호는 형식이면서도 항상 사유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의 의미는 명제의 참거짓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대상과 사유 관계의 특징이고 더 나아가서 존재 방식이며 우리들 인간의 체험의 지평이기도 하다.
|
|
|
문학나눔 → 고사성어 |
|
|
高陽酒徒(고양주도) 高(높을 고) 陽(볕 양) 酒(술 주) 徒(무리 도)
사기(史記) 역생육가( 生陸賈)열전의 이야기. 진(秦)나라 말기, 유방(劉邦)은 패현(沛縣)에서 군대를 일으켜 진류(陳留)현의 교외에 주둔하였다. 당시 진류현의 고양이라는 시골에는 역이기( 食其)라는 한 가난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책 읽기를 좋아하였으나, 일정한 생업을 갖지는 못했다. 역이기는 유방의 휘하로 들어가고자 했는데, 유방이 유생(儒生)들을 싫어하여 그들이 찾아오면 관(冠)을 벗겨서 거기에 오줌을 누고 욕을 퍼붓는다는 말을 듣었다. 역이기는 심사숙고한 후 대책을 마련하여 유방을 만나러 갔다. 유방은 유생이 찾아왔다는 말에 크게 노하여 유생 따위는 만날 시간이 없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역이기는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고양땅의 술꾼이지 유생이 아니오(吾高陽酒徒. 非儒人也) 시위의 보고를 받은 유방은 발을 씻다말고, 맨발로 나가 역이기를 맞았다. 그후 역이기는 유방을 도와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高陽酒徒 란 술을 좋아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 을 비유한 말이다. 술 마시고 행패 부리거나, 음주운전하다 삼진 아웃 당하는 사람들도 모두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
|
|
|
문학자료 → 수필 |
|
|
간디자서전. 시민의 불복종 - 간디 / 함석헌 역
제1편
23. 대박람회
1890년 파리에서 대박람회가 열렸다. 나는 그것이 치밀하게 준비되었다는 것을 읽었고, 또 파리를 보고픈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두가지를 한꺼번에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이 기회에 가기로 했다. 박람회의 특별한 인기는 에펠탑에 집중이 되었는데, 그것은 순전히 강철로만 지어진 것이고, 높이가 거의 1천 피트나 되었다. 그밖에도 흥미있는 것들이 물론 많이 있었지만 그 탑이 가장 주되는 것이었다. 이때까지 그런 높이의 건축물은 도저히 무사히 서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나는 파리에 채식 식당이 있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래서 거기다 방을 하나 예약해 놓고 이레동안 묵었다. 나는 파리까지 가는 여행이나 거기서 구경하는 것이나 모든 것을 매우 경제적으로 짰다. 그것을 나는 대부분 파리 지도와 박람회의 지도, 그리고 안내서를 가지고 걸어다니면서 했다. 그것이면 시의 중심 시가와 흥미있는 곳의 중요한 것을 찾기에는 충분했다.
그 박람회의 규모가 크고 아주 다채롭게 됐더라는 것을 제하고는 기억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에펠탑에는 두번인가 세번인가 올라갔었기 때문에 잘 기억한다. 첫 층에 식당이 있었는데, 단지 굉장히 높은 데서 저심을 먹었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맛에 나는 7실링을 거기 내던졌다. 파리의 옛날 성당들은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그 웅장함과 평화스러움은 잊을 수 없다. 노트르담의 놀라운 건축과 내부의 정교한 장식과 아름다운 조각들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 그런 성당을 위해 몇 백만의 돈을 썼던 사람들은 가슴속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을 수밖에 없다고 나는 느꼈다.
파리의 유행과 경박한 풍에 대하여 그런 풍경과는 완연히 다르게 서 있었다. 누구나 그러한 교회 중 어느 하나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밖의 소리와 혼잡을 다 잊을 수 있었다. 동정녀의 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의 옆을 지나노라면, 누구나 그 모양이 달라지고 위엄과 존경심을 가지고 행동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 내가 거기서 얻었던 느낌, 이 모든 무릎 꿇음과 기도함은 한갓 미신만일 수는 없다는 느낌은 그 후에도 점점 자라갔다. 동정녀 앞에 무릎을 꿇는 그 경건한 혼들이 다만 대리석을 보고 절을 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들은 진정한 신앙에 불이 붙는 사람들이요, 돌을 보고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돌이 상징하고 있는 거룩한 이를 에배하는 것이다. 내가 그때 느꼈던 그 인상은, 이 예배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펠탑에 관해 한마디 할 말이 있다. 현재 이것이 무슨 목적에 쓰이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때는 이것을 크게 비난도 했고 칭찬도 했다.
그것을 비난하는 사람 중에 가장 두드러졌던 이는 톨스토이였다고 기억한다. 그는 에펠탑은 인간의 지혜의 기념물이 아니라 어리석음의 기념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담배는 모든 마취제 중에 가장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중독된 사람은 주정뱅이도 감히 범하지 못하는 죄악을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술은 사람을 미치게 하지만 담배는 사람의 지성을 흐려뜨려 공중에 누각을 짓게 한다. 에펠탑은 그러한 영향을 받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다. 에펠탑에 예술이란 것은 없다. 어떤 점으로 봐도 이것이 박람회의 진정한 아름다움에 공헌한 바는 없다. 사람들은 이것이 괴상하고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구경하려고 몰려든다. 이것은 박람회의 하나의 장난감이다. 우리가 어릴때는 장난감에 끌린다. 그러므로 그 탑은 우리가 모두 쓸데없는 것에 정신이 팔리는 어린애라는 좋은 증거다. 에펠탑은 그 목적을 위해 세워진 것이라 할 수 있다.
|
|
|
문학자료 → 동서고전/신화 |
|
|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 6장 제우스의 아들과 딸
7. 나르키소스
나르키소스(Narcissus)는 하신 케피소스와 요정 리리오페의 아들로, 보이오티아의 테스피아이에서 태어난 뛰어난 미모의 젊은이다. 그는 애정의 기쁨 같은 것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경멸하였다. 그에게 애끓는 연정을 가졌던 요정 에코는 사랑을 거절당하자 죽어 바위로 화신하였다. 아메이니아스라는 젊은이도 그를 열렬히 사랑하였으나 그가 대꾸도 않고 단검을 선물하니 나르키소스 집 대문 앞에서 그 단도로 자살하며 무정한 친구라고 신에게 저주하였다. 그 저주로 인해 어느 날 나르키소스는 샘물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아름다운 샘물의 요정으로 알고 짝사랑에 빠져 연모하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이 때 흘린 피에서 수선화가 피어났다. 이러한 전설은 테스파이아 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숭배사상에서 연유했으며 여기서 나르시시즘이라는 낱말과 꽃이름 수선화(narcissus)가 생겨났다. 반면 파우사니아스는 다른 설을 주장하는데, 즉 나르키소스에게는 아름다운 여동생이 있어 같이 수렵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었는데 여동생이 죽자 사는 재미를 잃고 숲의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으로 생생한 동생의 영상을 누리며 감상에 빠졌다고 한다.
에코
에코(Echo)는 보이오티아 헬리콘 산의 요정으로 케피소스 강에서 살았으며 한때는 헤라의 시중을 들며 제우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말이 많아 제우스의 기분을 상하게 한데다 제우스와의 관계를 의심한 헤라의 미움을 받아 말하는 기능을 제거당하여 누군가 부르면 끝음절만을 반복하여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판이 그녀를 찬미하여 연정을 품었으나 호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닌 사튜로스를 사랑한 데 앙심을 품고 실성한 양치기를 보내 그녀를 박살내었다. 그러나 메아리만은 계속 남았다고 전한다. 다른 전설에 따르면 에코는 나르키소스를 애타게 사랑하였다가 거절당하자 절망에 빠져 초췌하져 돌로 화신하였고 아직도 울림의 힘이 남아 메아리(echo)가 난다고 한다.
[나르키소를 바라보는 에코]
|
|
|
문학자료 → 수필 |
|
|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류시화
피리 부는 노인
"집에는 아이들이 다섯이나 있습니다. 먹을 거는 없고, 아내는 작년에 죽었지요." 피리 하나만 팔아달라고 통사정을 하면서 노인은 가정 사정을 늘어놓았다. 어딜 가나 듣는 얘기였다. 워낙 인도의 피리 음악을 좋아하는 나이기에 잠깐 기웃거렸을 뿐이지 사실 그가 가진 형편없는 대나무 피리들을 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내가 관심을 보이자 필사적으로 달라붙었다. "훌륭한 물건입니다. 인도의 어딜 가도 이런 진짜배기 피리들을 구하긴 어렵지요. 싸게 해드릴 테니 제 사정 좀 봐주세요. 막내아이가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답니다." 나는 그가 하는 거짓말을 다 알고 있다는 듯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집세도 못 내서 쫓겨나겠군요." 그러자 노인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아니, 어떻게 그걸 아십니까? 우리 식구는 완전히 거리에 나앉았답니다. 그러니 적선하는 셈치고 하나만 팔아 주세요." 내가 다시 말했다. "물론 1주일 동안 한 개도 못 팔았겠죠?" 노인은 말했다. "맞습니다. 사실 이 피리들이 좋은 것이긴 해도 누가 사줘야 말이죠. 솔직히 말해 당신처럼 히피 같은 사람들이 아니면 누가 인도 피리 따위를 사려고 하겠습니까?" 노인은 말을 마치고 나서 내 환심을 사려고 피리 하나를 꺼내더니 휘엉청 불어제끼기 시작했다. 피리 장사를 오래 한 때문인지 피리 솜씨는 더없이 훌륭했다. 더구나 갠지스 강의 낙조를 배경으로 허공에 솟구치는 피리 곡조를 들으니 감동이 더했다. 피리 한 개를 팔려고 상투적인 거짓말을 하는 것이 틀림없긴 했으나, 피리를 부는 모습은 더없이 진지하고 감동적이었다. 나는 그동안 인도 여행 때마다 피리 한두 자루를 꼭 사 들고 돌아오곤 했었다. 하지만 막상 사 갖고 온 피리들은 번번이 너무 형편없어서 제대로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파는 사람만 멋들어진 곡조를 낼 수 있을 뿐 나 같은 아마추어는 흉내내기도 어려웠다. 나는 또다시 쓸모없는 피리를 사고 싶지 않아서 노인에게 10루피(300원) 정도 적선하고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그런데 주머니에서 10루피짜리를 꺼낸다는 것이 그만 덜렁 1백 루피짜리 종이돈이 나오고 말았다. 내가 아차 하는 사이에 1백 루피는 노인의 재빠른 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노인은 종이돈을 꽉 움켜쥔 손을 합장을 하고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아, 이런 고마우실 데가! 신께서 틀림없이 당신을 기억하실 겁니다. 나 또한 영원히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는 연신 합장한 손을 이미 위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이미 때는 늦어서 돌려 달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맥없이 1백 루피를 빼앗긴 터라 속이 쓰렸지만 내색할 수도 없고 해서 억지로 자비스런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더 손해를 보기 전에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었다. 노인은 몇 걸음 더 쫓아오며 감사 표시를 하다가 내가 그만 됐다고 손짓을 하자 마지막으로 합장을 하고는 작별의 손을 흔들었다. 노인으로선 뜻밖의 횡재를 한 셈이었다.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온 나는 할 일도 없고 해서 일찌감치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녘이 됐는데, 난데없이 피리소리 하나가 내 잠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아직 잠이 덜 깬 의식으로, 이 피리소리가 꿈속에서 들리는 건지 창밖에서 들리는 건지 몰라 한참을 그냥 침대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것은 창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눈을 부비며 창문을 열자 베란다 밑에 어제의 그 노인이 피리를 불며 서 있었다. 나를 보더니 그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얼른 또다시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가락이 긴, 아침에 듣는 인도 전통의 라가 곡이었다. 나는 순간 기가 막혀서 창문을 도로 닫았다. 어제 1백 루피를 빼앗아가더니 이제는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서 흥정을 붙이고 있었다. 그래서는 금방 쪼개져버릴 피리를 떠넘기고 또다시 거금을 우려낼 계획이었다. 나는 고약한 노인네 때문에 잠이 확 달아나버렸다. 창문을 닫은 뒤에도 피리소리는 멎지 않았다. 하는 수작은 미워도 피리 부는 솜씨는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일러서 보낼 생각으로 주섬주섬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노인은 합장을 하며 내게 아침 인사를 했다.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보시오. 어제 그만큼 돈을 줬으면 됐지 왜 또 와서 이러는 거요? 난 분명히 말하지만 피리를 살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 어서 가시오." 그러나 노인이 말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에요." 나는 더 엄숙하게 소리쳤다. "아니긴 뭐가 아녜요? 어서 가세요. 더이상 내게서 뭘 뜯어낼 생각일랑 하지 말아요." 노인이 말했다. "그게 아닙니다. 난 당신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아침마다 당신의 방 앞에 와서 피리를 불어주려고 했습니다. 당신이 내게 도움을 주었으니까요. 난 그것 말고는 당신한테 해줄 것이 없거든요." 노인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서 순간 난 내가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노인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돈을 더 우려내려고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내가 준 돈에 고마움을 느껴 뭔가 보답을 하려고 찾아온 것이었다. 노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것이 곧 밝혀졌다. 그는 내가 그 갠지스 강가에 머무는 닷새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마다 내 방 앞에 와서 필릴리 필릴리 피리를 불었다. 피리소리에 잠이 깨어 창문을 열면 미명을 헤치고 갠지스 강 위로 오렌지색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노인이 불어주는 피리곡 때문에 나는 날마다 새롭고, 뭔가 다른 하루를 맞이할 수 있었다.
마음이 내키지도 않은 상태에서 1백 루피, 약 3천 원 정도를 적선한 덕분에 나는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 노인은 내게 작은 베풂에도 보답하는 자세를 가르쳤고, 가난하지만 아직은 부유함을 잃지 않은 마음을 전해주었다. 그 노인 덕분에 나는 지금도 잘난 체하며 말한다. 나처럼 인도 여행을 멋지게 한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어떤 국가 원수가 인도를 방문했을 때 과연 아침마다 누군가가 와서 환상적인 피리소리로 잠을 깨워 주었겠느냐고. 내가 알기로 인도 역사상 그런 일은 한번도 없었다.
|
|
|
|
바탕화면 |
|
|
|
『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