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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31호
2012.12.4 (음10.21)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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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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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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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교향악단도 강아지를 보고 웃는 2살짜리 계집애의 웃음소리와 같은 음악을 연주해내지는 못했다. - 번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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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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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바루기] 바이러스
온 나라가 바이러스에 습격당하는 양상이다. 구제역으로 축산업이 거의 초토화되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조류 인플루엔자(AI)가 발생했다. 바이러스는 동물·식물·세균 따위의 살아 있는 세포에 기생하고, 세포 안에서만 증식이 가능한 비세포성 생물을 말한다. 세균 여과기에 걸리지 않으며, 병원체가 되기도 한다.이런 까닭에 바이러스는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인식된다. 그런데 최근 들어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말과 결합해 쓰이는 경우가 잦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재산 기부를 계기로 나눔 바이러스가 더 확산됐으면 좋겠다.” “이른 아침 휴대전화에 찍힌 사랑의 문자는 하루를 행복하게 해 주는 행복 바이러스가 돼 준다.”바이러스의 대표적인 특성(숙주 세포에 피해를 주고, 빨리 퍼지는 것) 중 하나만 따온 이런 쓰임새는 ‘구제역[감기·에볼라·에이즈] 바이러스’ 등과 견줘 볼 때 그리 바람직해 보이진 않는다. 바이러스의 속성과 어울리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부패라는 바이러스에 굴복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처럼 사용하는 게 맞다고 본다.‘행복 씨앗’ ‘기부 홀씨’ ‘나눔 꽃씨’ 등 우리말로 대신하면 어떨까.
[우리말바루기] 자처하다, 자청하다
“주말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는 뇌사에 빠진 라임을 살리기 위해 영혼 바꾸기를 자처하는 주원의 애절한 사랑이 그려졌다.” 얼마 전 종료된 한 인기 드라마의 내용을 전한 글이다. ‘영혼 바꾸기를 자처하다’, 맞는 표현일까.
ㄱ. 야구대표팀의 이대호는 특타 훈련을 자처했다. ㄴ. 김수로가 데뷔 후 처음으로 노 개런티 출연을 자처했다. ㄷ. 지성인을 자처하는 그가 그러다니 개탄스러운 일이다. ㄹ. 1980년대부터 한국은 아시아 축구의 맹주를 자처했다.
‘자처(自處)’는 ‘스스로를 어떤 사람으로 여겨 그렇게 처신함’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반면 ‘자청(自請)’은 ‘어떤 일에 나서기를 스스로 청함’이란 뜻이다. ㄱ, ㄴ처럼 쓰면 이대호가 자신을 ‘특타 훈련’이라고 여겼다는 것이고, 김수로가 자신을 ‘출연’이라고 여겼다는 것이어서 말이 안 된다. 이 경우는 ‘스스로 하겠다고 나섰다’는 것을 표현하려는 것이므로 ‘자청’을 써야 한다. ㄷ과 ㄹ은 스스로를 ‘지성인’, ‘아시아 축구의 맹주’로 여겼다는 것이므로 ‘자처’를 제대로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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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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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버리다 - 김사인
죽은 이는 죽었으나 산 이는 또 살았으므로 불을 피운다 동짓달 한복판 잔가지는 빨리 붙어 잠깐 불타고 굵은 것은 오래 타지만 늦게 붙는다 마른 잎들은 여럿이 모여 화르르 타오르고 큰 나무는 외로이 혼자서 탄다
묵묵히 솟아오른 봉분 가슴에 박힌 못만 같아서 서성거리고 서성거리고 그러나 다만 서성거릴 뿐 불 꺼진 뒤의 새삼스런 허전함이여
용서하라 빈 호주머니만 자꾸 뒤지는 것을 차가운 땅에 그대를 혼자 묻고 그 곁에서 불을 피우고 그 곁에서 바람에 옷깃 여미고 용서하라 우리만 산을 내려가는 것을 우리만 돌아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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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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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2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1. 꿈을 이루기 위한 스프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방해해선 안 된다. - 작자 미상
지구가 움직인 이유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안젤라는 근위축증이라는 희귀병에 걸겼다. 신경계를 포함한 일종의 신체 무력증이었다. 차츰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불가능해졌으며, 몸을 움직이는 것도 한정된 부분만 가능했다. 의사들은 안젤라가 이 병에서 회복되리라는 희망을 전혀 갖지 않았다.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해 보내야 할 것이라고 모든 의사가 진단내렸다. 한번 이 병에 걸리면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열세 살 소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곳 병원 침대에 누워 안젤라는 자기의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자기가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걷게 되리라고 다짐하곤 했다. 그 후 안젤라는 샌프란시스코의 바다 근처에 있는, 장애자를 위한 특수 재활 센터로 옮겨져 심리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녀의 증세에 적용될 수 있는 모든 정신 요법이 다 동원되었다. 심리 치료가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녀의 강한 의지와 정신력에 감동받았다. 그곳에서 심리 치료가들은 안젤라에게 시각화 요법을 가르쳤다. 휠체어에 의지하지 않고 정상 적으로 걸어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계속해서 마음 속으로 상상하는 치료법이었다. 그것이 실제 치료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될지라도, 적어도 그녀가 병원 침대에 누워 그런 상상을 하고 있는 동 안에는 정신적으로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 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안젤라는 월풀(신체 장애자를 위한 물리치료법)이나 운동 등 신체와 관련된 치료법에도 열심히 었지만, 침대에 누워서 하는 시각화 요법에도 강한 신념을 갖고 열심히 매달렸다. 그녀는 상상 속에서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안젤라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침대에 누워서 열심히 자신의 두 다리가 움직 이는 상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기적이 일어났다. 침대가 움직인 것이다! 침대가 병실 안을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젤라는 소리쳤다. "이것 좀 봐요! 드디어 해냈어요! 난 해냈다구요! 내 다리가 움직였어요!" 물론, 이 순간 병원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 역시 소리를 지르며 대피소로 달려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장비들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유리제품들은 산산조각이 났다. 샌프란시스코에 대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이 사실을 안젤라에게 말해선 안 된다. 실제로 아무도 말해 줄 수가 없었다. 안젤라는 자신이 드디어 해냈다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난 뒤인 지금, 안젤라는 다시 학교에 다니고 있다. 물론 자신의 두 다리로 걸어서다. 목발이나 휠체어 따위는 이제 필요없게 되었다. 생각해 보라.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 일대의 대지를 뒤흔들 만큼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하찮은 신체의 병 따위를 정복할 수 없겠는가?
하녹 맥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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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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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계 교수의 철학 이야기 - 탈레스에서 라캉까지
제6부 현대 철학 이야기
형이상학적 명제에 반대한다 : 논리 실증주의
형이상학적 명제는 참거짓을 결정할 수 없으며 분석적인 것도 아니고 경험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에 무의미하다. 무의미한 명제는 거짓 명제, 곧 사이비 명제이다. 논리 실증주의란 1920년대 빈 학파를 중심으로 발전한 현대 철학의 한 경향이다. 논리 실증주의는 경험적 실증주의라고도 일컬어지며, 파이글과 같은 학자는 논리 실증주의를 논리적 경험론이라고 부른다. 미국으로 건너간 논리 실증주의는 실용주의와 폴란드의 의미론을 결합해 과학적 경험론이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논리 실증주의의 일반적 경향 크게 보면 논리 실증주의는 소위 분석철학의 범주에 속하는 현대 철학의 한 경향이다. 분석철학은 20세기 초반 헤겔의 절대적 사변(관념)철학에 대한 비판을 시발점으로 삼아 확대된 철학적 탐구의 방법이다. 분석철학은 형이상학적 명제를 배격하고 철저한 논리적 분석에 의해서 문제를 명백하게 해결하고자 한다. 명제를 논리적으로 분석할 때 우리의 사고는 언어라는 매개체에 의해서 전개되고 표현되므로, 분석철학에서는 언어 분석이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분석철학의 입장을 지닌 학자들은 각기 색깔이 다른 여러 집단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일상언어학파, 의미론적 분석학파, 프랑스와 스위스 및 이탈리아의 과학론 그룹, 캠브리지 분석학파, 경험철학협회, 북유럽분석학파, 실용주의, 조작주의, 빈 학파 등이 대표적인 집단들이다. 이들 여러 그룹들은 철학을 과학화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방법문제와 철학의 주제 선택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인다.
논리 실증주의를 탄생시킨 빈 학파는 쉴릭을 중심으로 1924년에 창시되었다. 쉴릭, 카르납, 파이글, 노이라트 등 주로 자연과학에 종사하는 학자들이 모여서, 논리적 분석으로 철학을 과학화하는 것에 대해서 다각도로 논의했다. 당시 이 학파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논리 실증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대표적인 두 사람으로는 비트겐슈타인과 칼 포퍼를 꼽을 수 있다. 논리 실증주의가 논의 대상으로 삼은 주제는 광범위했지만 그 중에서도 주로 형이상학, 명제의 진위(참과 거짓) 문제, 검증 가능성의 원리 및 프로토콜 명제(Protocol-Satz, 명제들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명제), 명제의 진리와 의미 그리고 과학의 통일 등이 주된 논의의 대상이었다.
우선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형이상학적 명제(예컨대 신, 자유, 영혼불멸 등에 관한 명제)는 참거짓을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한다. 무의미한 명제는 거짓 명제, 곧 사이비 명제(pesudo-proposition)이다. 형이상학적 명제가 무의미한 이유는 그것이 분석적인 것도 아니고 경험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분석적 명제는 술어가 주어를 해명해 주는 명제로서 대표적인 것은 수학 명제들이다. 예컨대 'A는 A이다'와 같은 동치 내지 동의어 반복의 명제는 분석적 명제이다. 명제가 분석적이어서 논리적 및 수학적으로 참거짓이 밝혀지거나 명제가 경험적이어서 명제의 참거짓이 실험, 관찰 및 검증에 의해서 드러나면 그러한 명제는 의미 있는 명제이겠지만, 형이상학적 명제는 분석적이지도 그렇다고 경험적이지도 않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명확한 근거에 의해서 철저한 사고 및 그것의 언어적 표현을 획득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형이상학을 배격한 카르납 카르납은, 물 자체, 존재, 무, 절대자, 신, 실체 등에 관한 명제는 논리적이지도 않고 또 경험을 초월하는 지식을 나타내는 명제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이며, 참거짓이 가려지지 않기 때문에 학문의 범주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형이상학적 명제를 무의미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의 참거짓을 가릴 수 없기 때문이지 형이상학적 명제가 전적으로 쓸모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카르납에 의하면 형이상학이란 비논리적이고 경험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므로 시와 마찬가지로 상상적 성격을 갖는다. 형이상학은 시와 마찬가지로 감정의 산물에 불과하다.
시는 원래부터 허구적이므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지 않지만, 형이상학은 경험을 초월하는 것에 관해서 마치 사실을 기술하는 것처럼 주장하기 때문에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카르납의 주장이다. 카르납에 의하면 철학이 사용하는 언어 기능은 대상 표시 기능이어야 하는데, 형이상학은 시와 마찬가지로 언어의 의사표시 기능을 사용하기 때문에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근거에서 카르납은, 형이상학이 실제로는 아무런 지식도 가져다주지 못하면서도 지식이라는 착각 내지 환상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므로 당연히 배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카르납은 <철학의 논리적 구문>의 제1장 '형이상학의 배격'에서 위에서 언급된 내용에 관해 밀도 있게 다루었다.
영국의 일상언어학파에 속하는 에이어도 카르납과 비슷한 입장에서 형이상학적 체계의 모든 언명을 철학적 논의에서 배제할 것을 주장했다. 카르납이나 에이어가 명제의 참거짓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제시한 것은 검증 가능성의 원리이다. 그것은 명제가 분석적이든가 아니면 경험적으로 검증이 가능해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카르납에 의하면 명제를 검증하는 방법으로는 직접적 검증의 방법과 간접적 검증의 방법이 있다. 우리가 관찰해서 검증할 수 있으면 그것은 직접적 검증 방법이고, 간접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간접적 검증 방법이다. 에이어는 카르납보다 더 구체적으로, 실제적 검증 가능성과 원리상의 검증 가능성을 구분한다. 우리가 지구상의 물을 직접 관찰해서 물의 존재를 검증할 경우 그것은 실제적 검증 가능성에 의존한다. 그러나 화성의 물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추론해 검증한다면 그것은 원리적 검증 가능성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들 양자는 각각 강한 의미의 검증 가능성과 약한 의미의 검증 가능성에 대응하며,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경험적 명제는 약한 의미에서 검증 가능하다는 것이 에이어의 견해이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형이상학적 명제를 무의미한 것으로 배격하고 검증 가능성의 원리에 적용될 수 있는 명제를 의미 있는 명제, 곧 프로토콜 명제라고 불렀다. 프로토콜 명제는 직접적 명제 또는 관찰 명제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카르납과 노이라트 등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과학의 통일을 또 하나의 과제로 생각했다. 이들은 자연과학과 정신과학, 사실과학과 규범(가치)과학 등 서로 다른 여러 과학(학문)들이 있다는 것을 반대하고, 과학의 통일을 꾀했다. 즉 그들은 과학의 통일에 의해서 자연과 인간 생활의 현상에 관한 프로토콜 명제로부터 포괄적인 법칙에 도달하는, 인식론적으로 동일한 성질을 가진 명제 내지 문장을 과학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카르납은 노이라트와 함께 포괄적 법칙에 도달하는 명제를 얻기 위해서는 물리적 언어 내지 사물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들에 의하면 물리적 언어는 감정적 언어와 전혀 다르게 개별 과학들의 기초 언어일 뿐만 아니라 모든 과학들을 포괄적으로 다를 수 있는 보편언어이다. 최근 논리 실증주의는 무엇보다도 기호 논리학의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발전했으며 또한 의미론 연구와 과학의 분석 분야에 있어서도 현저하게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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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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畵虎類狗(화호유구) 畵(그릴 화) 虎(범 호) 類(같을 류) 狗(개 구)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의 이야기다. 동한(東漢)시기,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은 마엄(馬嚴)과 마돈(馬敦)이라는 경박한 조카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계형자엄돈서(誡兄子嚴敦書)>라는 편지를 썼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장점이나 단점을 비난한다거나, 국가의 대사(大事)를 함부로 말하는 것을 가장 싫어 한다. 나는 사람됨이 후덕하고 신중하며 청렴했던 산도현(山都縣)의 현령 용백고(龍伯高)와 의협심이 강한 월기사마(越騎司馬) 두계량(杜季良)을 존경하고 있지만, 너희들이 그들을 본받기는 바라지 않는다. 용백고처럼 되는지 못한다하더라도 조정의 신임을 받는 관리는 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너희들이 두계량을 본받는다면, 그와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천하의 경박한 사람이 될까 두렵다. 이는 마치 호랑이를 그리려다 도리어 개를 그린 것과 같기 때문이다(畵虎不成反類狗者也).
畵虎類狗란 서투른 솜씨로 큰일을 하려다가 도리어 일을 그르침 을 비유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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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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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자서전. 시민의 불복종 - 간디 / 함석헌 역
제1편
22. 나라얀 헴찬드라
바로 그때 나라얀 헴찬드라(Narayan Hemchandra)가 영국에 왔다. 나는 그가 저작가란 말을 들었었다. 우리는 국립인도협회의 맨닝양의 집에서 만났는데 맨닝은 내가 사교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가면 언제나 입이 붙어 말을 못하고, 그녀가 물어야 겨우 대답하는 정도였다. 그녀는 나를 나라얀 헴찬드라에게 소개해 주었다. 헴찬드라는 영어를 몰랐다. 그의 옷차림은 괴상했다. 너절한 바지에, 우글쭈글하고 때묻은 갈색 파르시식 외투에, 넥타이도 칼라도 없이, 술을 단 털모자 차림이었다. 그는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그는 몸이 가늘고 단신이었다. 둥근 얼굴에 곰보요, 코는 뾰족하지도 납짝하지도 않았다. 손으로 연방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괴상하게 생기고 괴상한 차림을 한 사람은 사교계에서는 따로 돌 수 밖에 없었다. 선생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선생님 책도 좀 읽었습니다. 제 집에 와 주신다면 참 고맙겠습니다. 고 나는 말했다. 나라얀 헴찬드라는 좀 쉰 목소리였다. 얼굴에 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네, 어디 계십니까? 스토어가 입니다. 그럼 서로 이웃이군요. 영어를 배워야겠습니다. 가르쳐 주시렵니까? 무엇이든지 해드릴 수 있다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당신이계신데로 제가 가겠습니다. 아니오, 아니오, 제가 가지요. 번역 연습책도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래서서로 약속을 하고, 우리는 아주 친숙한 친구가 되어 버렸다. 나라얀 헴찬드라는 문법에는 깜깜이었다. 그에게는 말은 동사요, 달린다는 명사였다. 그렇게 웃을 일이 여러번이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런데 그렇게무식한 것에도 조금도 당황해 하지 않았다. 나의 보잘것 없는 문법 지식을가지고는 아무런 효과도 그에게 나타낼 수가 없었다. 그뿐인가, 그는 문법에무식한 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기지조차 않았다. 아주 완전히 뻣뻣한 태도로 이랬다. 나는 당신처럼 학교에 가본일이 없소. 나는 내 생각을 발표하는 데 문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소. 그런데 당신 뱅골 말을 아오? 나는 아오. 나는 뱅골에 여행했던 일이 있어요. 마하르쉬 데벤드라나드 타고르의 저서들을 구자라트 말로 세계에 전한 것은 바로 나요. 그리고 나는 다른 여러나라 말로된 보배들도 구자라트 말로 옮기려고 해요. 당신도 알듯이 내 번역은 언제나 직역이 아니지요. 그 정신을 그려내면 그만이오. 지식이 더 많은 다른 사람이 후에 가서 더 잘할 수 있겠지. 그렇지만 나는 문법의 도움없이 내가 한 그것으로도 만족해요. 나는 마라타 말도 알지, 힌드말도 알지, 뱅골말도알지, 그리고 지금 영어도 알기 시작했소. 내가 하고 싶은 건 낱말을 숱하게 아는 거요. 그리고 내 욕심이 그게 다인 줄 아시오? 놀라지 말아요, 나는 프랑스에서 프랑스 말을 배울거요. 들으니 그말로 된 문학은 굉장히 많다던데. 나는 또 독일로 갈 수 있다면 가서 독일말도 배워야지. 이렇게 그의 말은 끝이 없었다. 그는 외국말을 배우고 외국을 여행하자는 데 한이 없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럼 미국도 가려고요? 그렇고말고. 아, 어떻게 신세계를 보지않고 인도로 돌아간단 말이오? 허지만 돈이 어디서 납니까? 돈은 뭘해요? 나는 당신처럼 말쑥한 물건이 아니오. 최소한의 먹을 것, 최소한의 입을 것이면 되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 책에서 나오는 얼마 안되는 돈과 친구들이 주는거면 넉넉해요. 나는 언제나 3등차로 여행하는데 미국 갈때도 갑판위에 탈거요. 나라얀 헴찬드라의 소박함은 그만이 할 수 있는 것이요, 그의 솔직도 거기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자랑이란 터럭끝만한 기색도 없었다. 물론 작가로서 자신을 지나칠 정도로 평가하는 점은 제외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만났다. 우리의 사상과 행동에는 상당히 공통되는 점이 많았다. 둘 다 채식주의자였다. 점심을 같이 하는 일이 많았다. 이것은 내가 매주 17실링으로 자취하며 살아갈 때였다. 어떤때는 내가 그의 방으로 가고, 어떤때는 그가 내 방으로 왔다. 나는 영국식으로 요리하는데 그는 꼭 인도식이어야만 좋아했다. 그는 달(dal)없이는 못했다. 내가 당근따위를 가지고 수프를 끓이면 그는 내 식성을 가련하다고 했다. 한번은 그가 어디서 멍*1을 찾아내 가지고는 그것으로 요리를 만들어 가지고 내게로 와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이것이 시작이 되어서 우리는 규칙적으로 서로 바꾸기로 해서 내가 맛있는 것을 하면 그에게로 가지고 가고 그가 하면 내게로 가지고 왔다. 카디날 맨닝의 이름이 그때 모든 사람 입에 오르내렸다. 부두노동자들의 파업이 존 번스와 카디날 맨닝의 노력으로 일찍이 해결이 됐다. 내가 나라얀 헴찬드라보고 카디날 맨닝의 소박함에 대한 디즈레일리의 찬사를 이야기했더니 그는, 그럼 그 현인을 내가 만나 봐야죠 하고 말했다. 그는 거물입니다. 어떻게 감히 만나렵니까? 아, 방법이 있지요. 내가 당신을 시켜서 내 이름으로 편지를 하는 거요. 그에게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인데, 내가 친히 만나서 그의 인도적인 공헌에 대해 감사를 올리겠단다고 하고, 또 내가 영어를 모르기 때문에 당신을 통역으로 데리고 간다고 하십쇼. 내가 그 뜻으로 편지를 냈더니 2,3일 후 카디날 맨닝의 엽서가 왔는데 만나자는 약속이 있었다. 그래서 둘이 카디날을 방문했다. 나는 주로 입던 방문옷을 입었고 나라얀 헴찬드라는 언제나 하는대로 그 외투에 그 바지였다. 내가 그것을 조롱했더니 그는 허허 웃고는 말했다. 당신들 문명했다는 사람들은 다 겁쟁이요. 훌륭한 사람은 사람의 겉을 보지 않는단 말이오, 그 속을 보지. 우리는 카디날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몸이 가늘고 키가 큰 나이 많은 한 신사가 나타나, 우리와 악수를 했다. 나라얀 헴찬드라는 이렇게 인사를 했다. 시간을 많이 빼앗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명성을 많이 들었고, 파업자들을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하신 데 대해서 뵙고 감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세계의 현인들을 찾아보는 것이 제 버릇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미안을 끼쳤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의 구자라트 말을 내가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오셔서 감사합니다. 런던에 계시는 동안 재미가 있으시고, 이곳 사람들과도 잘 만나시기 바랍니다. 평안하시기 빕니다. 이렇게 말하고 카디날은 일어나서 우리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한번은 나라얀 헴찬드라가 내복과 도티 바람으로 나한테 왔다. 착한 안주인이 문을 열었다가 혼이나서 내게로 달려왔다.(그녀는 나라얀 헴탄드라를 모르는 새 안주인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어떤 놈팡이가 선생님을 만나 보자고해요. 라고 말했다. 문으로 나가보니 천만뜻밖에 나라얀 헴찬드라 아닌가. 나는 깜짝 놀랐다. 그의 얼굴은 조금도 다름없이 웃음을 띠고 있었다. 아니, 거리의 아이들이 놀리지 않습디까? 네, 줄줄 따라 옵디다. 그래도 아랑곳 아니했더니 조용하던데요. 나라얀 헴찬드라는 런던에 몇 달 머문 후 파리로 갔다. 그는 프랑스 말을 배우기 시작했고 또 프랑스 책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더러 읽으라고 그것을 주었다. 그것은 번역이 아니라 그 요지였다. 마침내 그는 미국 방문의 결정을 실행했다. 굉장한 고난을 겪고 3등 배표를 구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그전에 내복과 도티만 입고 외출했듯 단정치 못한 옷차림 을 했다는 이유로 기소를 다한 일이 있었다. 나는 그가 추방을 당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1. mung : 일종의 인도 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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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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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 6장 제우스의 아들과 딸
6. 셀레네
셀레네(Selene)는 달을 화신하여 숭상한 여신으로, 로마인은 루나라 하였다.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티탄족인 휴페리온과 테아의 딸이며 헬리오스와 에오스의 자매라 하나, 이와 달리 거인족인 팔라스 혹은 헬리오스와 에우류파이사의 딸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 쌍의 말 혹은 황소가 끄는 달수레를 타고 달리는 셀레네에 관한 신화는 별로 없고 제우스와 관계하여 판디아를 두었다고 한다. 그녀는 엔듀미온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이를 알게 된 제우스가 그를 라트모스 산 동굴 속에 던져 영원히 잠들게 하자 셀레네는 밤마다 천상에서 내려와 그 곳으로 찾아갔다. 다른 전설에는 판이 아름다운 백색 양모를 진상하여 셀레네를 산 속에서 유혹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 셀레네는 제우스와의 사이에 헤르세(이슬)를 낳았다고도 하고 또한 헬리오스의 사이에 후르스(시간)를 낳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한편 셀레네는 헤카테 혹은 아르테미스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그리스 세계에는 원래 달 여신 숭배가 없었으며, 라코니아 탈라마이에 있는 셀레네 파시파에 신전은 신탁을 내리는 장소이다. 프리지아에는 달의 남신이 있어 여러 그리스 도시로 퍼져 숭배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셀레네는 여신으로서의 역할보다는 달의 광채를 미술, 노래, 시문에서 표현할 때 더 중요시되었다.
헤카테
[William Blake의 <Hecate>, 1795 - 헤카테는 3개의 머리와 3개의 뭉뚱이를 지녔기 때문에 3이란 숫자와 연관이 아주 깊다.]
헤카테(Hecate)는 옛적 보이오티아에서 예찬된 여신으로, 인간에게 부와 승리, 육아와 동물사육의 성공 등 여러 면에서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알려졌다. 카이오스와 포이베의 손녀 혹은 페르세스와 아스테리아의 딸이라고도 한다. 올림포스 신족이 아닌 독자성을 가진 여신이지만 제우스는 헤카테에게 각별한 명예를 주고 지상, 바다 및 천상에서 명성을 갖게 하였다. 때로 셀레네나 아르테미스와 혼동되고 후기에는 천상에서는 루나, 지상에서는 디아나, 지하계에서는 헤카테로 불러 디바 트리포미스, 테르게미나, 트리켑스라고도 한다. 헤카테에 관한 신화는 별로 없고, 콜키스의 으뜸가는 마술사 가계와 연관되어 여자 마술사 키르케 혹은 메데이아의 어미라는 주장도 있다. 그리스 세계에서도 마술과 마법을 주관하고 말.개.멧돼지로 분장한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여인으로 등장하는데 세 개의 몸으로 또는 한 몸에서 세 개의 다른 얼굴을 지닌 형상을 하고 있다. 헤카테의 성찬은 특이하여 매월 개의 날고기, 어린 양고기, 꿀 등을 바쳤다. 교차로, 특히 세 교차로와 대로상에서 마술활동을 하여 트리비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여신은 그 세력이 천상과 지상 및 지하 세계에까지 미쳤으므로 왕이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강이 여신의 은혜 때문이라고 믿고 존경하였다. 매년 여신의 축제 헤카테시아가 개최되었으며 이 축제 때는 빈곤한 사람들에게 특히 많은 음식이 제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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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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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류시화
갠지스 식당
나는 저녁마다 그 집에 가서 남인도 음식인 마살라 도사이와 차 한 잔을 사 먹었다. 바라나시 화장터로 가는 네거리에서 서쪽으로 20 미터쯤 가면 대로변에 허름한 식당이 있었다. 간판도 없었다. 그냥 다들 그곳을 '갠지스 식당'이라고 불렀다. 테이블은 다섯 개뿐이고, 주방도 없이 노천에서 요리를 해다 바쳤지만 꽤 북적대는 식당이었다. 북인도에서 남인도 음식을 파는 식당들 중에 내가 판단하건대 마살라 도사이를 그 집만큼 잘하는 곳도 드물었다. 우리의 찹쌀 부꾸미처럼 생긴 마살라 도사이는 쌀가루 반죽을 손수건처럼 얇게 펴서 후라이팬에 지진 다음 감자와 양파 등 각종 양념 으깬 것을 한가운데 넣고 세 겹으로 접은 것이다. 그것을 인도 카레라고 할 수 있는 '달'에 묻혀 먹으면 더욱 맛이 난다. 남인도 마드라스를 여행할 때 처음 먹어보고는 그 맛에 반해 나는 가는 곳마다 마살라 도사이를 찾게 되었다. 그것 말고도 저녁에 갠지스 식당에 가면 온갖 흥미있는 이야깃거리를 주워들을 수 있었다. 바라나시의 특산품인 실크 상점의 점원으로 일하는 크리슈난은 혼자 살기 때문에 늘 그곳에 와서 저녁을 먹었다. 어느 날 그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자신의 전생을 보게 된 어떤 음악가의 이야길 해드릴까요?" 내가 관심을 보이자 크리슈난은 의자를 잡아당겨 내 앞으로 와서 앉았다. 나는 마살라 도사이 하나를 해치우고 나서 오렌지 조각을 띄운 뜨거운 물에 손가락을 씻고 있던 중이었다. 인도는 대부분이 손으로 식사를 하기 때문에 식사 후에는 이런 식으로 오렌지 조각이 담긴 작은 물잔이 제공된다. 처음에는 그것이 손 씻는 용도인 줄 모르고 오렌지 차로 착각해 훌쩍거리며 마신 적도 있었다. "이건 실화예요. 누가 꾸며낸 얘기가 아닙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크리슈난은 내 물병에 담겨 있는 물을 한 모금 입에 문 다음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늙은 음악가가 있었는데, 남인도 하이데라바드에서 이곳까지 무려 천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어 순례를 왔어요. 차비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냥 도보 여행하고 싶었던 거^36^예요. 인도에서는 걷는 게 다반사니까요." 그의 말에 따르면 그 음악가는 바라나시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성스런 강 갠지스로 가서 목욕을 했다. 그 순간 굉장한 기적이 일어났다. 강물로 눈을 씻는 순간 갑자기 그의 전생을 보게 된 것이다. 전생에 그는 힌두 고행승으로 북인도 스리나가르의 동굴에서 수행중이었다. 그런데 평소에 힌두교에 원한을 품고 있던 회교 광신자 하나가 그를 증오하게 되었다. 어느 날 밤 광신자는 몰래 동굴에 침입해 명상이 잠겨 있는 그를 공격했다. 그는 광신자가 휘두른 칼에 찔려 그 자리서 숨을 거두었다. 과거 생을 볼 수 있게 된 음악가는 전생의 자신의 시체가 아직도 동굴 속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것까지 다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 길로 음악가는 스리나가르로 가서 천신만고 끝에 문제의 동굴을 찾았다고 한다. 과연 시체 한 구가 그곳에 놓여 있었다. 세월이 많이 지났을 텐데도 시체는 전혀 부패되지 않은 채였다. 동굴이 해발 4천 미터가 넘는 고지대에 위치해 있는 탓이었다. 음악가는 전생의 자신의 시체를 수습해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다리뼈 하나를 남기고 모두 화장을 했다. 그 다리뼈로는 피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크리슈난은 말했다. "그 사람은 오랫동안 바라나시에 남아 피리를 불었어요. 가끔 이 식당에도 오곤 했지요. 자신의 전생의 뼈로 만든 피리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많은 걸 느끼게 했어요. 서양인들이 그 음악을 녹음해 가지고 했어요." 내가 그것이 전부 사실이냐고 묻자 크리슈난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물론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얘긴걸요. 당신이 원한다면 그 음악 테이프를 수소문해서 구해다 드릴 수도 있어요. 정말이라니까요." 나는 진한 향의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다. "어느 날 사라졌어요. 그게 전부예요. 늙은 개 한 마리가 그를 따라다니며 밥을 얻어먹었는데 개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캘커타 후글리 강가에서 여전히 피리를 불고 있는 걸 봤다는 사람도 있고, 전생에서 수행을 하던 스리나가르의 동굴로 되돌아간다는 말을 들었다는 증인도 있지만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죠." 그러면서 크리슈난은 덧붙였다. "피리소리가 들리지 않으니까 왠지 허전하더라구요. 참 이상한 일이죠. 그 피리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나 봐요. 그런데 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공짜로 들으면서도 마냥 혼자서 차를 마시긴가요?" 나는 얼른 크리슈난에게 사과를 하며 주인에게 차 한 잔을 더 시켰다. 차는 한잔에 1루피(30원)밖에 하지 않았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면 화장터 인부 쿠마르가 일을 끝내고 늦은 저녁을 먹으러 갠지스 식당엘 왔다. 쿠마르는 쉰 살이 넘었는데 말수가 적었다. 언제나 똑같은 옷차림이었으며, 주문 음식도 밥과 알루 둠(감자 카레)이 전부였다. 인도인들이 식사할 때 흔히 마시는 다히(요구르트의 일종)조차도 시키지 않았다. 하루는 크리슈난과 내가 낄낄거리며 잡담을 늘어놓고 있다가 쿠마르에게 맥주를 한 잔 사면서 그를 대화로 끌어들였다. 맥주는 워낙 비쌌기 때문에 아무나 마실 수 있는 음료가 아니었다. 내가 밖에 나가서 맥주를 사 갖고 들어오자, 어려서 천연두를 앓았는지 곰보딱지 얼굴을 한 식당 주인 미스터 티와리도 말참견을 하는 척 하면서 기어코 한 잔을 얻어 마셨다. 화장터 인부 쿠마르는 손가락이 모두 합해 여섯 개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날 때부터 기형인 것도 아니었다. 화장터 인부는 사실 인도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에 속하는 계층이다. 하지만 쿠마르는 완벽한 영어를 구사했다. 그것은 그가 충분한 학교 교육을 받았다는 걸 증명했다.
쿠마르가 화장터 인부가 된 데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다. 그날 맥주를 나눠 마시면서 우리는 처음으로 그 기막힌 사연을 듣게 되었다. 쿠마르는 원래 인도 국책 은행의 직원이었다. 영국 유학까지 마친 그는 누구보다도 유능한 직원이었고, 장래가 보장된 거나 다름없었다. 아내 역시 델리 대학 출신의 인텔리로 외국인 회사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말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이나 사원으로 피크닉을 다녔다. 누구보다도 행복한 가정이었다. 그런데 모든 일이 그렇듯이 갑자기 불행이 닥쳐왔다. 서른다섯 살이 되었을 때 쿠마르는 얼굴에 부스럼이 나고 진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나병이라는 진단으로 이어졌다. 그는 즉시 은행에서 해고당했으며, 가족으로부터도 이별을 당했다. 인도에서는 문둥병 혼자가 마을에 나타나면 몰매를 때리는게 관습이기 때문에 낮에는 숲속에 숨고 밤에만 주로 이동했다. 그의 아내와 두 명의 자식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타지역으로 옮겨갔다. 그가 문둥병을 치료하게 된 것은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에 도착해서였다. 그는 델리에서 바라나시까지 수백 킬로는 순전히 걸어서 왔다. 그 사이에 살이 짓무르고 손가락이 떨어져나갔다. 하지만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유일한 희망은 성스런 강 갠지스였다. 인도인들은 갠지스를 '강가 강'이라고 부른다. 강가는 어머니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어머니 신 강가가 병을 치유해줄 것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한밤중에 갠지스 강에 도착한 쿠마르는 곧장 신에게 바치는 기도문을 외며 목욕 의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며칠 뒤에 기적처럼 병이 나았다.
쿠마르의 살아온 얘기를 드는 동안에 크리슈난은 자기 잔을 벌써 다 비우고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하지만 쿠마르는 맥주 한 컵을 마치 성스런 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마셨다. 곰보주인 미스터 티와리도 더 얻어 마시지 못해 흘끔거리며 우리 자리를 엿보았다. 쿠마르가 말했다. "난 곧바로 화장터 인부로 취직을 했소. 은행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날 다시 받아들여 줄 리도 없고. 어쨌든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소. 아내와 자식이 어디로 갔는지 찾아서 생활비라도 보내야 했으니까 말이오." 그런데 여섯 달쯤 일했을 때 델리의 사촌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델리를 떠나 알라하바드라는 도시로 간 그의 아내와 자식은 때마침 닥친 홍수에 휩쓸려 모두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쿠마르는 남은 잔을 비우며 얘기를 끝맺었다. "그렇게 된 거요. 알라하바드는 바로 요 옆에 있는 도시가 아니오? 이곳으로 데려왔어야 하는 건데 난 그럴 용기가 없었던 거요. 난들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겠소? 그냥 모든 일을 받아들일 뿐이오." 그러면서 쿠마르는 한마디 덧붙였다. "난 신이 인간을 만들 때는 목적이 있다고 믿소. 누구는 달리기를 잘하도록 만들었고, 누구는 장사를 잘하도록 만들었소. 반면에 내게는 문둥병을 주어 인생이 집착을 끊어버리도록 만든 거요. 하루에도 수십 구의 시신을 장작에 태우면서 신이 내게 부여한 삶의 목적을 깨달으라고 말이오."
쿠마르의 나지막한 목소리도 끊어지고, 어느덧 밤이 깊었다. 거리의 인적도 뜸해졌다. 노천에 피운 소똥 연료의 화덕만이 푸석거리며 타오를 뿐이었다. 이때쯤이면 꼭 나타나는 손님이 있었다. 다 깨어진 손풍금을 든 두 명의 계집아이 락쉬미와 비베크 자매였다. 그들은 마지막 구걸을 하기 위해 식당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손풍금을 켰다. 그리고는 목젖을 내보이며 인도 시인 카비르의 노래를 부리기 시작했다. "함사 카호 푸라탄 바트, 함사 카호 푸라탄 바트. 백조여, 네 지난 이야기를 들려다오. 넌 어느 나라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저기 슬픔도 죽음도 없는 나라가 있다. 백조여. 나와 함께 저기로 가지 않겠는가." 머리 꼭지에서 터져나오는 듯한 높은 음정의 노래와 함께 밤이 문을 닫았다. 갠지스 식당도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도, 크리슈난도, 화장터 인부 쿠마르도, 그리고 식당 주인 미스터 티와리도 그냥 말없이 앉아 있었다. 끝없이 계속될 것만 같은 두 걸인 소녀의 노래에 귀를 기울인 채로. 아니면 우리 각자가 반쯤 졸면서 다른 어떤 상면에 잠겨 있었는지도 모른다. 팔다 남은 사브지(야채 카레)와 베간 바라타(삶은 가지고 만든 카레)가 무심히 놓여 있고, 이윽고 소똥도 떨어져 화덕의 불은 가물거렸다. 그 대신 엉킨 전선줄과, 길가에 세워진 텅 빈 릭샤와, 간판 없는 갠지스 식당 위로 한 점 두 점 별들이 떨어져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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