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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26호
2012.11.23 (음10.10)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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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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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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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라. 그것은 가장 파괴적인 감정이다. 자아라는 다람쥐 쳇바퀴 속에 갇힌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 밀리슨트 펜위크(前 美 하원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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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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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태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 /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집트의 왕처럼 미라가 됐을 때….” 양명문의 시에 변훈이 곡을 붙인 노래 ‘명태’의 앞 소절이다. 어젯밤 이 노래가 입안에서 맴돌았다. 뜬금없는 명태 타령은 어젯밤 술상에 오른 ‘먹태’ 때문일 것이다. ‘먹태’는 ‘(얼고 녹는 게 모자라) 황태가 되지 못한 것’이라는 게 가게 주인의 설명이지만 사전에 오르지 않은 말이다. 이처럼 명태는 잡는 방식과 상태에 따라 이름도 여럿으로 나눠 부른다.
‘어부의 그물에 걸린’ 명태는 망태이고, 낚시로 잡은 것은 조태라 한다. ‘미라가 된’ 것은 북어 또는 건태라 하는데 이 중에 ‘얼었다 녹았다’를 20회 이상 거듭해야 한다는 ‘황태’를 으뜸으로 친다. ‘짝태’(북한어)는 ‘명태의 배를 갈라서 내장을 빼고 소금에 절여서 넓적하게 말린 것’이고, ‘염태’는 ‘소금에 절인 명태’로 ‘간명태’와 한뜻이다. ‘봄에 잡은 명태’를 춘태라 하는데, 음력 4월과 5월에 잡히는 것을 ‘사태’, ‘오태’로 따로 이르기도 한다. 맨 끝물에 잡은 ‘막물태’는 ‘뭔가 부족한 듯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노가리는 ‘명태의 새끼’이다.(표준국어대사전) 꾸들꾸들하게 반건조시킨 명태는 ‘코다리’라 한다.(고려대 한국어사전)
이 모든 것의 ‘원형’인 명태는 ‘명천(明川)에 사는 태씨(太氏)가 물고기를 낚았는데, 이름을 몰라 땅이름의 첫 자(명)와 고기 잡은 이의 성(태)을 따서 이름 붙였다’ 한다. 제물포조약 체결 때 우리 쪽 ‘수석대표’를 맡기도 한 이유원이 펴낸 <임하필기> ‘문헌지장편’에 나오는 기록이다. ‘원산에 가면 명태가 땔나무처럼 쌓여 있다’는 얘기도 여기에 나온다. 한때 지천이던 명태가 금태(金-)가 될지 모르겠다. 어제 ‘한-러 어업협상 결렬…명태값 오르나’ 소식을 듣고 떠올린 생각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우리말바루기] 맞벌이, 외벌이, 홑벌이
예전에는 거의 아버지가 직장에 나가고 어머니는 집안일과 아이 기르는 일을 맡아 했으므로 ‘맞벌이’라는 말이 없었다. ‘맞벌이’는 ‘맞-’과 ‘벌이’가 결합해 이루어진 말로 부부가 모두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버는 일을 뜻한다. 요즘은 대부분의 신혼부부가 맞벌이를 하므로 오히려 맞벌이를 하지 않는 것을 이르는 말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맞벌이에 반대되는 말이 무엇인지를 물어오는 사람이 많다. 우선 떠오르는 게 ‘홑벌이’다. ‘홑벌이’는 ‘벌이’에다 ‘한 겹으로 된’ 또는 ‘하나인’ ‘혼자인’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홑-’을 덧붙인 것이다. ‘홑-’과 상대되는 말로 떠오르는 게 ‘겹-’이다. ‘겹-’은 ‘면이나 선 따위가 포개져 있는’ 또는 ‘비슷한 사물이나 일이 거듭된’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다. 그렇다면 ‘겹벌이’란 말도 있을 수 있는데 이보다는 ‘맞벌이’가 이미 쓰여 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맞벌이’의 상대어로 ‘외벌이’가 있다(훈민정음국어사전). ‘외-’는 ‘혼자인’ ‘하나인’ 또는 ‘한쪽에 치우친’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다. ‘홑벌이’보다는 ‘외벌이’가 더 나은 말로 생각된다. ‘외벌이’는 부부 가운데 어느 한쪽만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버는 일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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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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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줄타기 - 최영준
한강줄타기대회, 직경 3cm의 외줄 위 곡예사가 한 발짝씩 옮겨 갈 때마다 외줄이 출렁이고 내 심장이 따라서 출렁인다 살아온 생이 외줄 위에서 출렁거린다
저울눈을 가진 긴 장대 하나로 생의 균형을 잡는다 바람에 줄이 흔들리고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지만 가느단 외줄이 늘어진 생을 팽팽하게 끌어당긴다
탯줄의 흔적이 내 몸의 중심을 잡고 한 번도 세상줄을 놓아 본 적이 없는 삶,
서 있는 줄에 따라 가는 길이 달라지는 세상에서 한 순간의 삶이지만 목숨을 건 줄타기 게임을 한다
이승줄에서 내려올 수도 없는 내 몫의 명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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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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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1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4. 가정과 가족을 위한 수프
당신이 무엇을 하는가보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가 더 중요하다.
당신의 행동이 너무도 큰 소리로 말하기 때문에 난 당신이 입으로 말하는 걸 들을 수가 없다. - 랄프 왈도 에머슨
미국 오클라호마 시의 어느 햇빛 화창한 토요일 오후였다. 내친구이자 자부심이 강한 아버지인 보비 루이스는 두 명의 어린 아들을 데리고 미니 골프장에 놀러 갔다. 표 파는 곳으로 다가간 그는 매표원에게 물었다. "얼마입니까?" 젊은 매표원이 말했다. "어른은 3달러이고, 여덟 살 이상의 아이도 3달러입니다. 여덟 살 이하의 어린이는 무료 입장이구요. 아드님들이 몇 살인가요?" 보비가 대답했다. "변호사인 아이는 다섯 살이고, 의사인 아이는 아홉 살이오. 그러니 6달러만 내면 되겠군요." 그러자 매표원이 말했다. "선생님, 혹시 복권에라도 당첨되셨나요? 큰애의 나이가 여덟 살이라고 말하면 3달러를 버는 셈이 되는데 뭣하러 솔직하게 아홉 살이라고 말하죠? 여덟 살이든 아홉 살이든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보비가 말했다. "당신 말도 일리가 있소, 하지만 이이들에겐 그것이 큰 차이가 있소." 랄프 왈도 에머슨은 "당신의 행동이 너무도 큰 소리로 말하기 때문에 난 당신이 입으로 말하는 걸 들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많은 도전이 밀려오는 시기엔 특히 그 어느 때보다 정직성이 필요하다. 당신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패트리샤 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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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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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계 교수의 철학 이야기 - 탈레스에서 라캉까지
제6부 현대 철학 이야기
소쉬르 : 언어의 기호는 체계이다
소쉬르는 언어가 선험적 법칙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관습적인 기호체계에 의해서 구성된다는 구조주의 언어학을 대변한다.
현대철학의 조류 중 하나인 구조주의는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으로부터 시작된다.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 (Cours de linguistique generale, 1916)는 구조주의 언어학을 대변하며 더 나아가서 구조주의 철학이 형성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소쉬르는 19세기의 전통적 언어학자들에게 정면으로 반대하면서 언어는 특정한 선험적 법칙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임의적인 역사적 관습 체계에 의해서 결정되는 기호체계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언어학 탐구는 언어 비교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시간의 진행에 따라서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언어 형식을 연구해서는 안 되고 어떤 주어진 시간에 동일한 체계에 속하는 기초들의 관습적 관계를 연구해야 한다. 소쉬르는 언어 연구는 공시적(synchronique)이어야 하고 통시적(diachronique)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랑그와 파롤 소쉬르 언어학의 출발점은 랑그(la langue)와 파롤(le parole)의 구분이다. 모든 언어는 기본적인 관습의 체계와 그 체계의 일상적 사용으로 구분된다. 예컨대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독일인은 리베(Liebe)로, 프랑스인은 아무르(amour)로, 미국인은 러브(love)로 발음하며 기록한다. 이처럼 실제로 사용되는 말이 파롤이며 파롤의 바탕이 되는 사회적 관습 체계는 랑그이다. 우리들은 사회생활에서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파롤을 사용하기 때문에 파롤은 의도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파롤의 근거가 되는 관습 체계로서의 랑그는 실생활에서 사용되지 않고 단지 논리적으로 파롤에 선행하며 동시에 파롤보다 더 추상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은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말이나 글이 아니라 관습적인 언어의 기본 체계인 랑그이다.
기호체계 소쉬르는 오늘날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의 선구자 퍼스와 함께 현대 기호학 이론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소쉬르의 기호론에 의하면 모든 기호는 청각적 국면과 개념적 국면을 소유한다. 예컨대 사나이, 사내, 사내자식 등의 청각적 국면은 남자라는 개념적 국면에 대응한다. 이 말은 한 단어가 청각적 국면(Signifiant : 기표)과 개념적 국면(signifie : 기의)을 동시에 가진다는 것을 뜻한다. 한 단어에 있어서 청각적 국면과 개념적 국면의 관계는 선험적 법칙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우연적으로 결정된다. 소쉬르는 단어의 청각적 국면과 개념적 국면의 관계가 언어 이외의 다른 요소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견해에 반대한다. 언어 심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들의 지각 과정에 있어서 청각상은 에코(echo)로 그리고 시각상은 아이콘(icon)으로 우리들의 뇌에 코드화되어 저장된다. 대상을 지각할 때 에코로 코드화하는 것은 아이콘으로 코드화하는 것보다 훨씬 더 명백하게 지각된다. 이러한 이론은 소쉬르가 말하는 단어의 청각적 국면의 이론을 뒷받침해준다. 소쉬르는 <일반 언어학 강의>에서 자신의 언어학을 사회심리학 그리고 일반심리학의 한 부분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기호학이라고 한다. 언어는 기호체계(랑그)를 바탕으로 삼으며 기호체계는 사회적 관습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의 방법론은 후에 메를로 퐁티, 레비 스트로스, 바르트, 라캉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현상학, 해석학 등의 등장에 따라 구조주의는 쇠퇴의 길을 걸은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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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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貪小失大(탐소실대) 貪(탐할 탐) 小(작을 소) 失(잃을 실) 大(큰 대)
전국(戰國)시대, 진(秦)나라 혜왕(惠王)은 군대를 동원하여 촉(蜀)나라를 치려고 하였으나, 험한 산세에 길이 없어서 진군(進軍)이 불가능하였다. 이에 진혜왕은 탐욕스런 촉왕을 속이기 위해 실물 크기의 돌소(石牛) 다섯 개를 만들어, 돌소의 꼬리에 번쩍거리는 황금을 달아 놓고, 신우(神牛)가 황금의 변(便)을 본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식을 들은 촉왕이 신기한 돌소에 군침을 흘리자, 혜왕은 촉왕에게 돌소를 대가없이 주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돌소를 차지하게 된 촉왕은 그것들을 운반해 올 방법이 없었다. 이에 진왕은 그에게 길을 만들어 돌소를 옮겨 가도록 제안했다. 재물에 눈먼 촉왕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길이 뚫리자 진나라의 20만대군은 일거에 촉나라를 멸하고 말았다. 훗날 남북조(南北朝)시대 북제(北齊)의 유주(劉晝)는 유자신론(劉子新論) 탐애(貪愛)편에서 이 일을 촉왕의 멸국망신하여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이는 작은 이익을 탐하다 큰 이익을 잃어버린 꼴이다(以貪小利失其大利也) 라고 하였다. 貪小失大란 작은 이익을 탐하여 큰 이익을 잃어버림 을 뜻한다. 이는 사람들이 인생에서 겪는 여러 실수들 가운데 가장 지혜롭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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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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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자서전. 시민의 불복종 - 간디 / 함석헌 역
제1편
17. 섭식의 실험
나 자신을 깊이 살핌에 따라,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변화의 필요를 더욱 느끼게 되었다. 비용을 줄이고 생활 방식을 고치자마자, 아니 그전부터 나는 내 음식을 변경하기 시작했다. 채식주의 학자들이 그 문제를 종교적.과학적.실제적 또는 의학적인 면에서 파들어가면서 세밀히 조사하고 있는 것을 나는 알았다. 도덕적으로는 그들은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즉, 사람이 하등동물보다 뛰어났다 해서 사람은 동물을 잡아먹을 것이 아니라, 사람과 동물 사이도 사람과 사람 사이처럼 서로 도와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 사람이 먹는 것은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밝혀냈다. 그리고 그중 어떤 사람은 육류나 생선만 아니라 달걀과 우유까지도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주장했고, 또 생활을 통해 거기 영향을 주기도 했다. 어떤 이는 사람의 생리적 구조는 요리한 음식보다 과일을 먹게 되어있으며, 사람은 어미젖만을 먹게 돼 있고, 젖이 떨어지고 이빨이 나면, 곧 굳은 식물을 먹기로 돼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결론지었다. 그들은 또 의학적으로는 모든 향료와 양념을 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적.경제적 이론으로 하면 채식이 가장 싸게 먹힌다는 것을 밝혔다. 그 모든 것이 내게 영향을 미치게 됐고, 나는 갖가지 형의 채식주의자들을 채식 식당에서 만나게 되었다. 영국에는 주간잡지를 내는 채식회가 있었다. 나는 그 주간지의 독자가 되고 그 회에 가입했으며 얼마 안가서 그 실행위원이 됐다. 거기서 나는 채식주의의 중진으로 알려진 사람들을 접하게 됐고, 나 자신 섭식의 실험을 시작했다.
나는 집에서 가져온 단것과 양념류를 먹는 걸 중지했다. 마음이 다른 방향으로 나가니 양념 즐기던 버릇이 떨어지고, 리치먼드에서는 맛이 없던, 양념 없이 익힌 시금치가 맛이 있었다. 그런 여러가지 실험은 내게 참맛은 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경제적인 문제도 물론 언제든지 마음속에 있었다. 그 당시 홍차와 커피는 몸에 해롭고, 코코아가 좋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몸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것만 먹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터이므로 나도 홍차와 커피를 그만두고 대신 코코아를 마셨다. 내가 잘 가는 식당은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상당히 잘 사는 사람들이 단골로 다니는 곳인데, 몇가지든지 제가 원하는 것을 골라 먹고 정가표에 따라 돈을 내는 것인데, 한 끼에 1내지 2실링 들었다. 또 하나는 세가지 음식에 빵이 한조각 끼어서 6페니를 내는 곳이었는데, 엄격한 절약을 하는 동안 나는 거기에 다녔다. 주되는 실험을 하는 동안 또 여러가지 작은 실험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든다면, 한번은 녹말로 된 음식을 안먹고, 다른 때는 빵과 과일로만 살아가고, 또 한동안은 치즈와 우유. 달걀만 먹었다. 이 나중의 것은 아무 가치가 없었다. 그 실험은 두주간도 가지 못했다. 녹말없는 음식을 주장하는 사람은 달걀을 퍽 좋게 말하면서 달걀은 고기가 아니라고 했다. 얼핏 보기에 달걀을 먹는 것은 산짐승을 해하는 것이 아닌 듯하다. 나는 그 설명에 끌려 내 맹세에도 불구하고 달걀을 먹었다. 그러나 그 실수는 일시적이었다. 맹세에 새 해석을 붙이는 것은 내 할 일이 아니었다. 나는 맹세를 주관한 어머니의 해석대로 따라야 했다. 어머니가 고기라 할 때는 달걀도 고기에 포함된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 맹세의 진정한 취지를 깨닫자 나는 곧 달걀을 그만뒀고 실험도 중지했다.
이론의 밑바닥에는 미묘한 점이 있고, 따라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나는 영국에서 고기에 대한 세 가지의 정의를 들었다. 처음 것에 의하면, 고기는 새나 짐승의 살만을 의미한다. 그 정의를 인정하는 채식자는 새나 짐승의 고기는 안먹지만 생선은 먹고, 달걀은 말할 것도 없다. 둘째 정의에 의하면 고기는 모든 생물의 살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생선은 물론 안되지만 달걀은 허용된다. 셋째 정의는 고기라는 것에 모든 산 물건의 살을 다 포함하고, 거기서 나오는 물건까지도 마찬가지로 포함시킨다. 그래서 달걀.우유도 거기에 든다. 내가 만일 첫째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나는 달걀 뿐 아니라 생선까지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의 정의를 따라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세운 맹세를 지키려면 나는 달걀을 먹지 말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왜냐하면 자세히 캐고 보면 채식 식당에서도 달걀이 들어있는 음식이 아주 많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 무엇인지를 내가 알지 못한다면, 음식 하나하나에 달걀이 들어있나, 안들어 있나 일일이 귀찮은 확인을 해 보아야 한다는 말이된다. 사실 대개 푸딩이나 과자 안에는 달걀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내 의무에 대한 계시가 이러한 곤란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이것으로 내 음식은 아주 간단해졌다. 음식의 간소화는 그대신 내게 고민을 가져왔다. 내가 맛을 들이게 됐던 여러가지 음식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이 어려움은 잠깐 뿐이었다. 맹세를 엄격히 지키면 뛰어나게 더 위생적이고, 더 맛있고, 더 지속적인 깊은 맛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시련은 이제부터였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맹세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하느님이 보호하는 사람을 누가 감히 해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잠깐 맹세 혹은 서약의 해석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아닐 것이다. 맹세의 해석이 전세계를 통해 많은 싸움의 근원이 되어왔다. 맹세를 아무리 분명히 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자기 목적에 맞도록 그 본문을 뒤집고 왜곡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부자로부터 가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제왕에서 농사꾼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각계 각층 속에서 만나볼 수 있다. 사욕에 눈이 어둡고, 애매하고 어중간한 말로써 자기 자신들을 속이고, 또 남을 속이고, 하느님을 속인다. 두가지 해석이 가능할 경우에는 하나의 황금률은 그 맹세를 주관했던 편에서 그 맹세위에 정직하게 붙여 놓은 해석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일이고, 또 하나는 약한 편의 해석을 듣는 일이다. 그들이 다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싸움과 불의가 일어난다. 그것은 다 진실치 못한 데서 오는 것이다. 진리만을 쫓는 사람은 그 황금률을 쉽게 따른다. 그에게는 해석을 위해 유식한 사람의 조언이 필요치 않다. 그 황금률에 의한다면, 고기에 대한 내 어머니의 해석이 내가 따라야 하는 유일의 참된 해석이었지, 나의 넓은 경험이나 나의 자랑스러운, 보다 나은 지식이 줄 수 있는 해석이 아니었다.
영국에서 행한 나의 실험은 경제와 위생의 견지에서 한 것이었다. 그 문제에 대한 종교적인 면은 내가 남아프리카에 가기까지에는 아직 생각되지 않았다. 거기에 가서야 나는 정말 고된 실험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음에 말하기로 한다. 그렇지만 그 모든것에 대한 씨는 영국에서 뿌려졌다. 개심자의 자기 종교에 대한 열심은 그 종교속에 태어난 사람의 것보다 강한 법이다. 채식주의는 당시의 영국에서 하나의 새 신조였는데 내게도 역시 그러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의 육식주의자로서 거기 가서 후에 지식에 의해 채식주의로 개종을 했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에 대한 새 개종자로서의 열의에 불타서 나는 내가 있는 지방 베이스워터에 한 채식 클럽을 조직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거기 사는 에드윈 아널드 경을 초대해서 부회장으로 세우고, '채식주의자'의 주필인 올드필드 박사를 회장으로 하고, 나 자신은 간사가 됐다. 그 클럽은 처음엔 잘 되었는데, 몇 달 후 그만두게 되었다. 이유는 여기저기 주기적으로 이사를 하는 내 버릇에 따라 내가 그곳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짤막하고 조그만 경험은, 기관을 조직하고 경영하는데 대한 약간의 훈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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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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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홍사석
제 6장 제우스의 아들과 딸
1. 아폴론 아폴론(Apollon, Apollo)은 예언.의술.음악.궁술의 신이자, 소때와 양떼를 보호하는 가축신, 이리를 다스리는 신, 농산물 증산에 피해를 주는 들쥐를 다루는 신이자 또한 집 앞뜰에 돌기둥을 세워 가정을 수호하는 신으로 숭배하였다. 서기 6세기에 와서는 광명의 신으로 추앙받게 되지만 태양신과는 다르다 그 외에 아폴론은 속죄 또는 보상의 신이도 하며 화살은 질병과 죽음을 가져왔다.
아폴론은 항상 젊고 현명하며 늠름하고 우아한 그리스 으뜸의 신이었다. 이집트 신 호루스나 인도 신 라마에 대응하는 신이면서 동시에 매우 그리스적인 신이지만 올림포스 신족에는 늦게 참여하였다. 전원적 성품으로 보아 아폴론의 원천은 인도 유럽인의 이동시기에 그리스로 유입된 종교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신탁을 내리는 신으로서 존경받는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아폴론은 거짓과 어둠은 아예 없는 진실과 밝음만 풍기는 신이자 델포이 신전의 신탁을 통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신앙상으로나 통치상으로 그리스 세계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신분이나 지위의 고하를 불문하고 혈족 간의 불화나 복수는 반드시 신탁에 따라야 하며 범죄는 반드시 속죄하여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였다. 이에 따라 신전이나 신탁소가 여러 곳에 생겨났는데 델포이와 델로스 신전을 위시하여 클라로스, 테네도스, 큐라 및 파타라에도 이름난 아폴론의 신탁소가 있었다.
[마르슈아스와 연주 대결을 벌이는 아폴론]
아폴론의 예능은 신의 경지에 달하고 특히 수금(하프) 연주는 절묘하였다. 한 번은 피리연주라면 자신에 필적할 상대가 없다고 자랑하는 마르슈아스의 도전을 받아 수금연주로 경연을 벌인 적이 있었다. 도저히 우열을 가릴 수 없게 되자 아폴론은 악기를 거꾸로 연주하여 실력을 겨룰 것을 제안하여 결국 마르슈아스를 물리쳤다. 그리고 연주에 진 마르슈아스를 소나무에 묶고 피부를 벗겨 참혹하게 죽였다. 이에 사람들은 마르슈아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옆에 흐르는 개울에 그의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아폴론은 신들의 음악 경연에서도 판을 물리쳐 음악의 신으로 인정받았는데, 이 때 이 곳에 온 미다스 왕이 공정한 판정이 아니라고 참견하자 화가 나 미다스의 두 귀를 당나귀 귀로 만들어 버렸다.
헤시오도스에 의하면 아폴론은 제우스와 레토(티탄족 포이베와 키이오스의 딸)의 아들이라 한다. 레토는 헤라의 눈을 피해 제우스와 메추라기(Quail)로 화신하여 어울려 쌍둥이를 임신하게 되는데 이를 알게 된 헤라는 질투로 튜폰이라는 용을 시켜 레토를 괴롭히고 온 세계는 후환이 두려워 레토에게 아기 낳을 은신처를 제공하지 않았다. 결국 자매 아스테리아가 살고 있어서 그 도움으로 아르테미스를 낳았다. 레토는 다시 바다에 떠 있는 옆 섬으로 건너가 아폴론을 낳기 위해 아홉 밤낮을 진통하였지만 아기를 낳지 못하였다. 헤라가 출산의 여신 에일레이튜이아를 올림포스에 붙들고 놔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올림포스의 여신들, 특히 레토와 친분이 두터웠던 아테나는 헤라로부터 출산 승인을 얻고자 의논 끝에 이리스를 헤라에게 보내 환심용 황금에 호박을 박은 9큐빗짜리 목걸이를 진상케 하였다. 과연 이 큰 선물을 받은 헤라는 노여움을 가라앉혔고 에일레이튜이아를 레토가 있는 곳으로 가게 하였다. 출산의 여신이 나타나자 드디어 레토는 아폴론을 낳았고 아기가 태어나는 동안 성스러운 백조가 섬 주위를 일곱 바퀴나 돌며 날았다. 아기가 태어난 후 이 섬은 고정되어 그 이름을 델로스(찬란하게 빛나는 섬)라 하게 되었다. 아기 아폴론은 테미스 여신이 암브로스아와 넥타르로 양육하여 4일 만에 성인으로 성장하였다.
[아폴론은 퓨톤을 퇴치하고 그곳을 정복하여 신탁소를 세웠다. 신탁을 맡아보는 무녀는 피티아라고 이름지었다.]
성장 후 아폴론은 먼저 방황하던 레토를 괴롭힌 퓨톤(배우자는 델프네)을 처치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나섰다. 마침내 행패를 심하게 부리는 퓨톤을 파르나소스 산 마르에서 찾아낸 아폴론이 활 시위를 당겼고, 큰 부상을 입음 퓨톤은 대지의 여신을 모신 델포이 성역으로 도망하였다. 이를 추격한 아폴론은 신탁의 영감을 얻는 갈라진 지층 틈에서 퓨톤을 죽였는데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신전을 더럽혔기 때문에 여신으로부터 그 죄값을 요구받았다. 제우스는 아들 아폴론은 테살리아의 사원으로 보내 제사를 올리고 속죄를 시켰다. 그 후 퓨톤의 넋을 진정시키고 아폴론의 승리를 기념하는 퓨티아 경기를 델포이에서 열도록 하였다. 아폴론은 델포이로 돌아와 자신의 상징으로 삼각대를 신전에 바치고 신전과 신탁에 종사하는 여사제를 자신에세 속하도록 하였다. 온 주민은 행패가 심하던 괴물을 퇴치한 아폴론을 퓨티오스라는 존칭으로 부르고 매년 아폴론의 왕림을 찬송하는 찬가(Paean)를 부르며 축제를 열었다.
예언의 신으로서 아폴론의 내력은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그리스 세계보다 훨씬 먼 북방민족에게서 시작하며 그리스로 와서도 신탁은 아폴론의 특권으로 된 듯하다. 류카이오스라는 별칭도 북방의 정토 주민과 연관성을 가진 '이리'를 의미하는데 이리떼를 다스리는 신은 목축하는 사람이 항상 두려워하고 숭배하는 존재였다. 어쩌다 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이리떼를 막아 주기는커녕 도리어 화를 입히는 일까지 있다. 북방유민은 이 아폴론 신에게 제를 올리고 매년 보리이삭을 델로스 신전에 바쳤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맞은 편에는 페이디아스가 만든 '아폴로 파르노피오스상'이라는 청동조상이 있었는데, 메뚜기라는 뜻을 가진 파르노피오스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아테네의 농토를 망치는 메뚜기떼를 없애는 영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폴론이 어떠한 방법으로 이 메뚜기떼를 퇴치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나타나 있지 않다. 단 파우사니아스는 세 번이나 시퓰로스 산에서 몰려온 메뚜기떼가 전멸하는 것을 보았는데, 첫 번째는 강풍, 두 번째는 비 온다음에 나타난 맹렬한 더위, 세 번째는 때아닌 추위 때문이었다고 하며 매번 양상이 다름을 회상하였다.
아폴론은 결혼에 묶여 지내는 것을 싫어 하였으나 연애상대는 많아 레우코토에, 다프네, 이세, 카스탈리아, 코로니스, 클류메네, 큐레네, 키오네, 아카칼리스, 칼리오페 등의 요정이나 인간 여인과 사랑을 하였다. 코로니스 공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료의 신이 되었는데 그가 제우스의 벼락에 맞아 죽자 벼락을 제공한 큐클로페스를 죽여 버렸다. 이로 인해 신격을 박탈당한 아폴론은 아드메토스 왕의 양치기가 되어 9년간 속죄하였으며 그 동안 양치기의 신으로 이름이 났다. 하신 페네이오스의 딸 다프네가 자신을 사랑하여 뒤쫓는 아폴론을 거부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다프네의 비명과 애원을 들은 그 아비가 딸을 월계수로 화신시킨 것이 그것이다. 아폴론은 이 다프네를 못있어 후에 월계수 가지를 승리자의 영예의 상징으로 쓰게 하였는데 이것이 월계관의 유래가 되었다. 요정 카스탈리아는 아폴론의 사랑에 쫓겨 연못에 몸을 던지고 델포이의 성스러운 연못이 되었다. 휴아킨토스는 아폴론이 매우 아꼈던 미소년으로 잘못 던진 원반에 맞아 죽자 그 핏방울에서 히아신스 꽃이 피어나게 하였다. 또한 큐파리소스가 길들인 신성한 사슴을 실수로 죽게 한 데 대해 너무 비통해 한 나머지 자살하려 하자 슬픔의 나무인 삼나무(Cypress)로 화신시켰다.
달리기 경주에서 아비를 제친 이다 청년과 결혼한 마르페사는 딸 클레오파트라를 두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런데 아폴론이 이 마르페사에게 연정을 품어 납치하자 격분한 남편이 활 시위를 당긴 채 뒤쫓아갔다. 제우스는 아폴론과 이다를 떼어 놓고 마르페사에게 두 여인 중 신뢰하는 쪽을 택하라고 하자 그녀는 남편 쪽을 택하였다. 아폴론은 에트루리아인이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모셔와 로마에 정착시켰는데, 처음에는 의료의 신으로 받들어지다가 두 나라의 교류로 예언의 신이 되었고 쿠마이의 시뷸레는 아폴론 신전의 여사제가 되었다. 기원전 433년 역병이 돈 다음 로마에 아폴론 사원이 세워졌고 아우구스투스(기원전 63~서기 14) 황제는 악티움 해전(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군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자 로마 시내의 팔라티네 언덕에 장엄한 아폴론 사원을 세워 자신의 수호신으로 모셨다. 로마에서는 아폴론만큼 매력 있고 영감을 느끼게 하는 신이 없었기 때문에 아폴론은 그리스 세계와 로마에서 보편성을 가진 신으로 되었으며 또한 모라에는 비슷한 신이 없어 아폴론이라는 이름도 그대로 보전하였다.
아폴론 신에게는 공양물로 월계수, 올리브, 야자(종려), 그리핀, 닭, 메뚜기, 이리, 까마귀, 백조, 매 등이 바쳐졌다. 또한 노래와 음악을 전수한 신으로서 수금을 가진 상과, 궁신으로 활을 지닌 조각상이 많다. 로도스에 세워진 거대한 콜로소스는 헬리오스의 동상인데 아폴론상으로 와전되어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악티움 산에 서 있는 아폴론 상은 바다 멀리에서도 볼 수 있어 위험한 해변의 암초를 피해 항해하는 뱃사람들의 지표로 유명하다.
[고대에 번성한 항구였던 로데스섬 입구에는 105피트에 이르는 콜로소스 상이 세워져 있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손꼽히는 조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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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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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류시화
음악회장에서
우연히 쑤닐을 만난 것은 점심을 먹으려고 찾아 들어간 뭄바이의 어느 노천 식당에서였다. 쑤닐은 인도의 타악기 타블라를 발아래 내려놓고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 옆 테이블에 앉은 나는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그와 인도 음악에 대한 얘길 나누게 되었다. 쑤닐은 뭄바이에 있는 사설 음악 학교에서 인도의 북 타블라를 배우는 학생이었다. 나 또한 인도 음악이라고 하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해온 터였다. 인도 음악을 수집하고 감상한 지 어느덧 10 년이 넘었다. 쑤닐과 나는 자리를 합석하고 앉아서 남인도의 카르타닉 음악과 북인도의 힌두스타니 음악에 대해 열렬한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여자 성악가 키쇼리 아몬카르를 세상이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며 연거푸 냉수를 마셔댔다. 쑤닐은 나의 음악 지식에 놀라면서, 마침 그날 저녁에 라비 샹카의 시타르 연주회가 있으니 들으러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너무 흥분해서 물컵을 엎지르고 말았다. 시타르는 인도의 대표적인 현악기이며, 라비 샹카라고 하면 시타르의 달인으로 일컬어지는 인도 최고의 음악가다. 명상가 오쇼 라즈니쉬는 라비 샹카의 음악을 이야기하면서, 10 년 이상 명상 수행을 하는 것보다 라비 샹카의 시타르 연구를 한 시간 듣는 것이 더 깊은 명상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까지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 대가의 음악을 실제 연주로 듣게 되다니 놀랍고 흥분된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인도 여행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여행이었다. 쑤닐은 자기도 연주회에 갈 예정이니 저녁에 그 식당에서 자기와 만나 함께 가자고 말했다. 연주회는 밤 열 시에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인도는 무더운 나라라서 한밤중에 그런 연주회들이 많이 열린다. 쑤닐은 자기가 연주회 장소로 안내하겠다며 저녁 여덟 시까지 잊지 말고 그 식당 앞으로 나오라고 말했다.
쑤닐이 먼저 식당을 떠난 뒤에도 나는 흥분이 돼 제대로 점심을 먹을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음반으로만 들어오던 대가의 음악을 직접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더구나 한국에서는 라비 샹카의 음반을 구하기도 힘들었다. 나는 계획했던 오후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남은 시간을 뭄바이 해변에서 산책을 하며 보냈다. 아라비아 해의 미풍이 얼굴을 간지럽히고, 산책로에선 인도인들이 코브라에게 피리를 불어대고 있었다. 코브라는 더위에 지쳐선지 피리로 뒤통수를 얻어맞아도 춤을 추려고 하지 않았다. 라비 샹카, 키쇼리 아몬카르, 그리고 피리 연주의 대가 하리 프라사드. 이들은 음악으로써 내 젊은 영혼을 지배한 이들이었다.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그들의 음악과 목소리가 채워주었던가. 쑤닐과의 약속 시간은 저녁 여덟 시였지만 마음이 급한 나는 일곱시 반쯤 시내에 있는 그 노천 식당으로 갔다. 물론 쑤닐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망고 주스를 시켜놓고 테이블에 앉아서 기다렸다. 이윽고 여덟 시가 되었다. 그러나 쑤닐은 오지 않았다. 여덟 시 반이 지나고, 아홉 시가 되어도 그는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밤 아홉 시 반이 됐을 때 나는 더이상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연주회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쑤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마냥 그를 기다리고 있다간 연주회를 놓칠 것만 같았다. 나는 서둘러 지나가는 릭샤를 잡았다. 쑤닐이 말한 연주회 장소를 댔지만 릭샤 운전사는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다고 했다. 내 기억이 틀린 모양이었다. 나는 망설이는 운전사를 재촉해 어떤 뮤직홀이든 유명한 곳으로 가자고 말했다. 인도 음악이 최고봉인 라비 샹카가 싸구려 음악당에서 연주회를 가질 리 없었다. 그러나 한 시간이 넘게 헤맨 끝에 찾아낸 라비 샹카의 연주회장은 거창한 예술의 전당이 아닌 어느 고등학교의 넓디넓은 운동장이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연주회가 막 시작된 상태였다.
나는 간신히 연주회장을 찾아낸 것에 기뻐하며 빈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수많은 청중이 구름떼처럼 운동장에 운집해 있었다. 나는 가능하면 앞자리에 앉아서 음악을 감상하고 싶었다.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잘만 부탁하면 귀빈석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 연주회장 맨 앞줄에 폼을 잡고 앉아 있었다. 다름아닌 쑤닐이었다. 나와 만나기로 약속을 해놓고선 저 혼자 먼저 와서 좋은 자릴 차지하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를 몇 시간이나 기다리게 한 장본인이 태연하게 맨 앞자리에 앉아 있다니! 더구나 나는 이 장소를 찾느라고 말도 통하지 않는 릭샤 운전사를 다그치며 낯선 밤거리를 얼마나 헤맸던가. 그런데도 녀석은 지그시 눈을 감고서 사뭇 감상가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화가 난 나는 객석의 앞줄로 걸어가서 녀석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겼다. 갑자기 일격을 당한 쑤닐은 놀라서 뒤돌아보았다. 나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이유를 따져 물었다. 녀석은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아아, 그래요.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지요." 나는 그 말투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아,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지요 라니. 아무리 인도인이라지만 어떻게 그런 식으로 약속을 어길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라비 샹카의 연주회만 아니라면 당장 끌어내 혼을 내고도 싶었다. 내가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며 자리를 뜨려는 순간이었다. 쑤닐이 내게 말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내 잘못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내 잘못을 갖고 자신까지도 잘못된 감정을 휘말리는군요. 그건 어리석은 일 아닌가요?" 그 지적에 놀라서 내가 쑤닐을 돌아보는 순간 띠융띠융 하며 라비 샹카의 시타르 음들이 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혼을 때리는 듯한 그 절묘한 가락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쑤닐이 또 말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쁜 건 감정에 휘말려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인도 음악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당신이 그 사실을 모를 리야 없겠지요."
내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또다시 라비 샹카의 긴 손가락이 띠융띠융 하며 현란한 음들을 내 존재 속에다 쏟아부었다. 쑤닐의 지적이 옳기도 했지만, 자꾸만 사람의 혼에 와서 울려대는 시타르의 선율 때문에도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날 밤 라비 샹카의 시타르 연주회는 현을 조율하는 데만 무려 두 시간이 걸렸다. 청중과 교감이 이루어질 때까지 현을 고르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본 연주가 시작되었다. 본 연주는 악보 없이 열 시간이나 계속돼 아침 열 시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무려 열 두 시간이나 걸린 연주회였다. 학교 운동장에 운집한 구름떼 같은 인도인들은 담요를 몸에 두른 채 아침이 밝아오고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모두들 새처럼 쪼그리고 앉아서 대가의 음악에 자신이 내맡겼다. 그곳에선 도무지 지상이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거기 음악을 연주하는 이도 사라지고, 음악을 듣는 이도 사라졌으며, 오직 한 음 한 음 만이 남아 허공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 역시 평범한 음악 생도가 아니라 힌두의 철학자다운 내면을 지닌 쑤닐 옆에 앉아 온 존재가 대가의 음악으로 가득 차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참석한 음악회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한밤의 열린 음악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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