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1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4. 가정과 가족을 위한 수프
내가 아버지를 선택한 이유
나는 드넓게 펼쳐진 아이오아 주의 아름다운 농장 지대에서 성장했다. 나를 키운 부모님은 흔히 말하듯 '지상의 소금이 되고 공동체의 중심 인물이 되는'그런 분들이셨다. 두 분은 내가 알고 있는, 좋은 부모가 되는 데 필요한 모든 걸 갖추고 계셨다. 늘 사랑을 간직하셨고, 기대감과 자기를 존중하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자식들을 키우는 데 힘을 쏟으셨다. 두 분은 우리가 아침과 저녁에 할 일들을 미루지 않기를 바라셨으며, 제 시간에 학교에 가고, 또한 일정 수준의 성적을 유지하며, 무엇보다도 선한 인간이 되기를 기대하셨다. 우리 자식들은 모두 여섯 남매였다. 세상에, 여섯 명이라니! 그토록 자식이 많은 집안에 태어나는 것은 내 본래 의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태어나기 전에 아무도 내 의견을 묻지 않았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다른 지역도 아닌, 기후가 가장 거칠고 혹독하기로 유명한 미국 중심부의 한 벌판에서 태어났다.다른 형제들과 마찬가리로, 나는 틀림없이 우주의 프로그램에 대착오가 일어나서 내가 엉뚱한 가정에, 또한 결정적으로 잘못된 고장에 태어나게 된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악조건들을 극복하면서 살아나가야 하는 것이 싫었다. 아이오와 주에선 겨울이면 그야말로 혹한이 닥쳐와 모든 걸 얼어붙게 만든다. 따라서 한밤중에 일어나 집에서 키우는 가축들이 얼어 죽지 않고 잘 살아 있는지 날마다 순찰을 돌지 않으면 안 된다. 갓 태어난 새끼들은 곳간으로 옮겨 놓고, 얼어 죽지 않도록 몸을 따뜻하게 녹여 줘야만 했다. 아이오와의 겨울은 그만큼 춥다!
아버지는 미남에다 건강하고, 카리스마적이며, 에너지가 넘치는 남자였다. 또한 무척 활동적인 분이셨다. 우리 형제 자매들은 늘 경탄의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곤 했다. 우리 모두는 아버지를 무척 존경했으며 언제나 높은 점수를 주었다. 난 이제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 그분의 삶에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 드물었다. 아버지는 고귀한 인격의 소유자셨고, 고결한 신조를 지닌 농부셨다. 자신이 선택한 농사일에 아버지는 정열을 다 쏟으셨다. 그분은 농사일에 있어서 대가가 되셨다. 특히 동물들을 키우고 돌보는 일에 탁월한 재능을 갖고 계셨다. 아버지는 또 대지와 하나가 된 느낌을 종종 가지셨으며, 곡식을 심고 거두는 일에 큰 자부심을 느끼셨다. 아버지는 제철이 아니면 사냥을 하지 않으셨다. 사슴과 꿩과 메추라기, 그리고 다른 사냥감들이 떼를 지어 우리의 농장지대에서 어슬렁거려도 아버지는 절대로 총을 잡지 않으셨다. 그리고 자연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땅에 인공 비료를 쓰거나 가축들에게 인공적인 사료를 먹이는 걸 반대하셨다.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를, 또 우리들 역시 같은 생각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셨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그 당시 얼마나 양심적인 분이셨나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때는 50년대 중반이었고, 지구 차원의 환경 보호에 대해선 아무런 운동도 일어나기 전이었으니까. 아버진 참을성이 그다지 많은 분은 아니셨다. 하지만 한밤중에 일어나 가축들을 순찰하는 일은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으셨다. 이 시기에 맺어진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남게 되었다. 그것은 내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해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나는 종종 사람들이 자신들의 아버지와 별로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음을 고백하는 걸 듣곤 한다. 사실 오늘날 많은 남성들의 가슴 속에는 자기들이 잘 알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아버지의 내면세계에 대한 결핍감이 늘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난 아버지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었다.
그 무렵 나는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자식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믿고 있었다. 물론 나머지 다섯 명의 자식들도 제각기 그런 은밀한 믿음을 갖고 있었겠지만, 난 언제까지나 그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거기엔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었다. 나쁜 점이란, 아버지가 한밤중의 순찰과 새벽녘의 마구간 점검의 동반자로 항상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당연히 나는 따뜻한 잠자리를 떠나 혹한이 불어닥치는 바깥으로 나가야만 했다. 난 그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러나 그 시절에 아버지는 자신의 최선을 다하셨고 자식들에 대한 애정에 변함이 없으셨다. 자식들에 대해선 누구보다도 이해심 많고 참을성이 있으셨으며, 부드러움을 잃지 않으셨다. 또한 우리들의 좋은 대화 상대가 되어 주셨다. 목소리는 늘 다정했으며, 미소를 지을 때면 왜 엄마가 아버지에게 반하셨는지 이해가 가곤 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훌륭한 교사가 되어 주신 것도 바로 이 시절의 일이다. 아버지는 늘 사물이 왜 그러하며 그 원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셨다. 순찰을 한 바퀴 다 도는 동안 한 시간이나 한 시간 반이 넘도록 많은 얘기를 들려 주셨다. 전쟁의 체험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참여한 전쟁이 왜 일어났으며, 그 지역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어떠했고, 전쟁의 결과와 여파가 무엇이었는지도 설명해 주셨다. 또한 당신께서 살아오신 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셨다. 그 결과 나는 학교에서 역사 과목에 가장 큰 흥미를 갖게 되었다. 아버지는 또 여행을 통해 자신이 얻은 것이 무엇이며, 세상을 두루 구경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아버진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여행의 필요성과 여행에 대한 애정을 심어 주신 것이다. 그 결과 나는 서른 살도 되기전에 30개가 넘는 나라에서 일을 하거나 여행을 할 수가 있었다.
아버지는 배움에 대한 필요성도 일깨워 주셨다. 우리가 배우는 일을 사랑해야 한다고 아버진 말씀하셨다. 학교 교육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서, 그리고 지식과 지혜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셨다.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성적이 향상되기를 무척 바라셨다. "넌 할 수 있어." 아버진 늘 그렇게 용기를 주셨다. "넌 부레스 집안의 딸이야. 넌 재능이 있어. 게다가 넌 선한 마음을 갖고 있다. 네가 부레스 집안의 자랑스런 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그러니 아버지를 실망시킬 수가 없었다. 나는 어떤 학과 과목이든지 항상 자신감을 갖고 도전했다. 마침내 나는 박사학위를 딴 다음에 또다시 두 번째 학위를 쉽게 따낼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아버지가 내 자신에게 심어 주신 호기심과 탐구심의 결과였다. 아버지는 가치관과 가치 기준에 대해, 그리고 인격의 발달과 그것이 한 사람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다. 나는 현재 그것과 비슷한 주제의 책들을 쓰고 강의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는 또 인생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방법과 그것을 되돌아보는 법,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그 결정을 포기해야 하며 때로는 역경이 닥쳐와도 끝까지 그것을 밀고 나가는 법에 대해 설명하셨다. 아버지가 자주 말씀하신 것은 소유나 획득 에 대한 것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의 성장에 대한 것이었다. 난 아직도 아버지가 해 주신 다음의 말을 곧잘 사용하곤 한다. "절대로 너의 가슴만은 남에게 팔지 말아라." 그분은 또 본능에 따른 직관을 지적하면서, 그것과 감정적인 판단을 구분하는 법, 그리고 남에게 놀림감이 되지 않는 법을 얘기하셨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언제나 너의 본능적인 직관에 귀를 기울여라. 너에게 필요한 모든 해답이 이미 네 안에 있음을 알아라. 혼자 조용한 시간을 갖도록 해라.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네 안에 있는 해답을 발견하고, 그것들에 귀를 기울여라. 네가 가장 사랑하는 일을 찾도록 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삶을 살아라. 너의 목표는 네가 가진 가치관에서 생겨나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네가 하는 일이 네 가슴이 바라는 것과 일치하게 된다. 이것이 네 인생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방황으로부터 널 지켜 줄 것이다. 너의 삶은 곧 너의 시간이다. 네게 주어진 시간만큼 넌 성장하게 될 것이다." 아버진 또 말씀하셨다. "네 주위 사람들을 돌봐 줘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너의 어머니인 이 대지를 존중해야 한다. 네가 어느 곳에서 살든지, 나무와 하늘과 흙이 바라보이는 장소를 선택해라." 나의 아버지! 그분이 얼마나 자식들을 사랑하고 높이 평가했는가를 추억할 때면, 난 자신들의 아버지에 대해 잘 모르고 있고 또한 한 인간 속에 깃들인 인격과 윤리와 감수성의 힘을 결코 느끼지 못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진심으로 연민을 느낀다. 나의 아버지는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 그대로의 삶을 살으셨다. 그리고 난 아버지가 늘 내게 진지하셨다는 걸 안다. 아버지는 나를 가치 있는 인간으로 대하셨으며, 나 역시 그 가치를 알게 되기를 희망하셨다. 아버지가 전해 준 메시지들은 내겐 정말로 의미 있는 것들이 되었다. 왜냐하면 난 그분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서 어떤 모순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버진 자신의 삶에 대해 사색하셨고, 날마다 그 삶을 살으셨다. 몇 군데의 농장을 구입해서는 그곳에 많은 시간을 쏟으셨다. 현재도 아버지는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활동적이시다. 아버지는 한 여자와 결혼해서 평생 동안 그 여자만을 사랑하셨다. 이제 엄마와 아버지가 결혼하신 지 50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변함없는 연인이시다. 두 분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 온 가장 아름다운 연인임에 틀림없다. 아버지는 또한 자신의 가정을 더없이 사랑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약간 지나치게 자식들을 보호하고 소유하려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한 사람의 부모가 된 나는 그것의 필요성과, 아버지의 심정이 어떤 것이었나를 이해한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홍역으로부터 보호해 주셨고, 동시에 파괴적인 악행에 우리를 잃는 것도 단호히 거부하셨다. 또한 우리를 책임감 있고 자기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성인으로 만들기 위해 아버지가 얼마나 굳은 의지를 가지셨었는지 난 안다.
현재까지도 아버지의 자식들 중의 다섯 명은 아버지와 불과 몇 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역에서 살고 있으며, 모두가 그분 삶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자식들 모두 헌신적인 배우자와 부모가 되었으며, 농사일을 천직으로 선택했다. 또한 모두가 자기들의 속한 공동체의 중심 인물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다. 나 혼자만 삐딱한 자식이 되었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아버지가 한밤중의 순찰에 날마다 나만 데리고 다녔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나머지 다섯 명의 자식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나는 현재 교육학자와 카운셀러의 길을 걷고 있으며,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다. 또한 내가 어린 시절에 배운 자기 존중의 중요성을 나누기 위해 부모와 자녀들을 위한 몇 권의 책을 썼다. 내가 내 딸에게 전하는 메시지들도 약간 다른 형식이긴 하지만 결국 내가 아버지로부터 배운 가치관들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내 자신의 삶의 경험도 그 속에 녹아들어가 있다. 그것들은 그렇게 대를 이어전해져 내려갈 것이다. 내 딸에 대해 약간 소개할 것이 있다. 그 애는 매년 세 가지의 운동 종목에서 상을 받아 오는, 키가 170센티미터인 말괄량이이며, 미스 틴에이지 캘리포니아 콘테스트의 최종 선발전에 오르기도 했다. 성적도 항상 A학점을 오르내린다. 그러나 그 애한테서 발견할 수 있는 나의 부모님의 유산은 외모나 성적만이 아니다. 그 애를 아는 사람들은 그 애가 친절하고, 영적이고, 외부로 발산되는 특별한 내면의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나의 부모님이 가지신 특성이 그들의 손녀딸 속에서 그대로 형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자식들을 존중하고, 그리고 헌신적인 부모가 되기 위한 두분의 노력은 우리 자식들의 삶뿐 아니라 두 분의 삶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글을 쓰는 현재 아버지는 미네소타 주로체스터의 마요 병원 근처에 계신다. 일주일 가까이 걸리는 종합 건강 테스트를 받기 위해서이다. 지금은 12월이다. 혹한의 겨울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외래환자로서 병원 근처의 호텔에 묵고 계신다. 집안일 때문에 어머니는 처음 며칠만 아버지와 함께 지내시다가 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이브인데도 두 분이 떨어져 지내게 되셨다. 그날 밤 나는 크리스마스 인사를 하려고 먼저 로체스터에 계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목소리에 기운이 없으시고 의기소침해 계셨다. 그 다음 나는 아이오와에 계신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어머니 역시 슬프고 침울한 분위기셨다. "이것이 네 아빠와 내가 처음으로 떨어져서 보내는 명절날이란다. 네 아빠가 안 계시니 전혀 크리스마스 같지가 않구나." 어머니는 끝내 목이 메셨다. 나는 그때 이미 14명의 저녁 손님을 초대한 상태였고, 곧 저녁 파티가 시작될 형편이었다. 나는 요리를 준비하러 부엌으로 돌아갔지만 부모님의 우울한 기분을 쉽사리 떨쳐 버릴 수가 없어서 다시 큰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큰언니는 다시 오빠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전화를 통해 서로 회의를 했다. 그래서 결론이 내려졌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부모님을 떨어져 계시게 해선 안 된다고 결론을 내린 우리는, 남동생이 두 시간 떨어진 로체스터로 차를 몰고 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집까지 가기로 했다. 물론 어머니한테는 비밀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우리의 계획을 말씀드렸다. "아, 아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렇게 할 것 없다. 이런 밤중에 차를 몰고 여기까지 오는건 위험한 일이야." 남동생이 로체스터에 도착해서 아버지의 호텔 방문을 두드렸다. 남동생은 나한테 전화를 걸어서 아버지가 집으로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신다고 전했다. "누나가 잘 말씀드려. 누나 말이라면 아빠가 들으실 거야." 나는 아버지에게 부드럽게 말씀드렸다. "집으로 가세요. 아빠" 아버지는 그렇게 하셨다. 남동생 팀과 아버지는 아이오와를 향해 출발했다. 우리들 자식들은 남동생의 카폰을 통해 그들이 지금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으며 날씨는 어떤지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때쯤 우리 집에는 손님들이 모두 도착했으며, 다들 이 일을 알게 되었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우리는 스피커 폰을 눌러 놓고서 대화를 주고 받았으며, 그래서 손님들 모두가 최종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9시가 조금 지나서 전화벨이 울렸는데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야, 내가 어떻게 네 엄마한테 줄 선물도 사지 않고 빈손으로 집에 들어갈 수 있겠니? 크리스마스에 향수 선물을 하지 않는 것은 50년 만에 이번이 처음이다." 이때쯤 우리 집 저녁 파티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이 계획의 열성적인 응원 부대가 되었다. 나는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와 남동생이 어머니에게 줄 선물을 살 수 있도록 집 근처에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쇼핑 센터가 있는지 확인하도록 했다. 아버지가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어머니에게 선물하시는 똑같은 상표의 향수를 사기 위해서였다.
그날 저녁 9시 52분에 남동생과 아버지는 미네소타의 작은 쇼핑 센터를 떠나 집으로 출발했다. 11시 50분에 두 사람은 우리의 농장지대 안으로 들어섰다. 아버지는 장난꾸러기 소년 처럼 킥킥거리셨으며, 집 앞에 이르러서는 어머니가 보실 수 없도록 문 뒤에 숨으셨다. 남동생이 자기가 들고 있던 가방을 어머니에게 건네 주면서 말했다. "엄마, 오늘 아빠한테 들렀더니 저더러 이 세탁물을 갖다주라고 해서 왔어요." "오냐, 그러냐. 어서 들어와라." 어머니는 부드럽고 슬픈 어조로 말씀하셨다. "안 그래도 네 아빠가 무척 보고 싶었는데, 지금 그 빨래나 해야겠다." 그러자 아버지가 문 뒤에서 걸어나오시면서 말씀하셨다. "오늘밤엔 빨래할 시간이 없을 텐데!" 친구이자 연인인 두 분의 감동적인 해후 장면을 남동생으로부터 전해 들은 뒤에 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 사랑해요!" "오, 이 장난꾸러기들!" 어머니는 목이 메어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하셨다, 우리 집 손님들은 일제히 환성을 질렀다. 비록 나는 두 분이 계신 곳으로부터 2천 마일이나 먼 곳에 떨어져 있었지만, 그 어느해보다도 두 분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물론 그렇게 해서 두 분은 크리스마스 이브를 한 번도 떨어져서 보내지 않게 되셨다. 그것은 부모님을 존경하는 자식들의 애정의 결과였고, 물론 두 분의 헌신적이고 아름다운 결혼 생활의 결과였다. 조나스 소크는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좋은 부모란 자식의 자녀들에게 뿌리와 날개를 준다. 뿌리는 가정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 위함이고, 날개는 높은 곳으로 날아 올라가서 자신들이 배운 것을 경험하기 위함이다." 자녀들 각자에게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엮어 나가는 기술을 가르쳐 주고, 또한 안전한 둥지를 만들어 언제나 자식을이 그 곳으로 돌아오면 환영하는 것이 부모의 책임이라면, 나는 내가 부모를 잘 선택한 것이라고 믿는다. 지난 크리스만스 이후 나는 두 분이 나의 부모가 된 것은 정말 필요한 일이었다고 가슴 깊이 느끼게 되었다. 비록 날개는 나로 하여금 지구여러 곳을 날아다니게 하지만, 이곳 캘리포니아에 또 다른 아름다운 둥지를 만드는 데는 두 분이 내게 심어 준 뿌리가 영원히 변치 않는 토대가 될 것이다.
베티영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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